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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식량(食糧): 진정한 역사의 조타수

by 중은우시 2012. 1. 30.

글: 왕효명(王曉明)

 

이런 말이 있다. '백성들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民以食爲天)". 중화대지의 양식을 이해하여야 우리는 비로소 중국의 고대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양식이 있어야 사람은 생존을 위한 조건을 갖추는 것이다. 사람이 생존해야 경제가 발전할 수 있고, 세금을 거둘 수 있다. 고대중국의 최대 경제비밀은 세수의 대부분이 농민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많은 자경농이 바치는 돈과 식량으로 중앙왕조는 지탱해왔다.

 

구미파초(狗尾巴草)로 배를 채우다.

 

중국역사를 알려면, 우리는 먼저 구미파초를 이해해야 한다. 구미파초와 양식은 어떤 관게일까? 사실 인류는 각종 농작물을 순화시켰다. 맥류(麥類, 보리)이건 속류(粟類, 조)이건, 도류(稻類, 벼)이건, 아니면 다른 식량작물이건, 대부분은 화본과(禾本科)에 속한다. 화본과의 식물에는 대량의 들풀이 포함된다. 우스개를 하자면, 우리는 현재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풀을 먹는 것이다.

 

구미파초는 고대중국의 중요한 농작물이다. 바로 '속(조)'의 조상식물이다. 중국인들이 구미파초를 순화시킨 역사는 근 만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속'은 우리가 쓰는 말로 하면 '조'이다. 우리가 아침메 먹는 달콤한 소미죽(小米粥)은 바로 속으로 만든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구미파초는 속의 야생종이며, 수(莠)라고도 부른다. 막 싹이 나왔을 때는 속의 어린 싹과 구분이 어렵다. 그래서 우리의 사전에서는 "양수불분(良莠不分)"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속(조), 서(黍, 기장) 및 숙(菽, 콩)은 선진시기 중국고대의 가장 중요한 농작물이다. 발음으로 보면 이 세 개의 작물의 명칭은 아주 비슷하다. 왜 고대인들은 이들 농작물을 이렇게 불렀을까? 그것도 지금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세 가지 작물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추위를 잘 견디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는 점이다. 그리고 생장기간이 비교적 짧다. 그리하여 중국북방의 춥고 메마른 땅에 심기 적합하다. 그리고, 선진시기의 농업기술은 아주 원시적이어서, 도경화종(刀耕火種)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껍질이 두터운 작물이 가장 먼저 백초중에서 두드러졌던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이 골라내어 당시의 주요작물로 삼게 된다.

 

하나라와 상나라는 사람들이 '속문화'로 부르는 왕조들이다. 이를 보면 이 구미파초의 지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인구가 비교적 적었다. 인구밀도도 아주 낮았다. 하늘 아래 많은 삼림과 늪이 있었다.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음식물은 여러 가지로 다양했다. 어떤 사람은 선진시대의 시가집 <시경>을 가지고 305편의 시가중에서 141편에서 492번 동물을 언급하고, 144편에서 505번 식물을 언급했다고 통계를 낸 바 있다. 많은 동식물은 당시 사람들의 먹거리였다. <관조>를 놓고 보면, "참치행채(參差荇菜), 좌우채지(左右採之)"라는 구절이 나온다. 소위 '배가 부르고 나면 음욕이 생각난다(溫飽思淫慾)"은 배가 고프면 어찌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미인을 쫓아다니겠느냐는 의미이다.

 

이런 전원목가적인 시대는 흘러가게 되어 있다. 동년시절이 아름답지만 어쨌든 흘러가는 것처럼. 인구수량의 증가와 더불어, 사람들은 더 많은 황무지를 개간해야 했고, 생산량이 비교적 높은 작물을 심어, 대량의 인구들의 음식물에 대한 수요를 맞추어야 했다.

 

이는 기실 유명한 맬더스의 인구론의 견해이다. 인구수량은 기하급주적으로 상승하여, 1,2,4,8,16....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양식과 기타 생활필수품의 수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 1,2,3,4,5.... 인구는 항상 빨리 증가한다. 이 영국경제학자는 비관적으로 얘기했다. 전쟁과 질병만이 잉여인구를 줄일 수 있고, 인구와 자원간의 증가속도가 불일치하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다만, 만일 다른 사람을 이기지 못하면 더 많은 땅을 차지할 수 없다; 그리고 전염병이 발발하여 전투외로 80%를 감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북유럽의 쥐들처럼 쥐의 수량폭발압력속에 속속 바다로 몸을 던져 자살할 수 있을까? 특히 토지가 개인재산으로 변하면, 인구와 자원의 모순은 더욱 두드러진다. 멀리 산림속에 은둔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반드시 고민해야 한다. 자신의 유한한 토지에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양식을 얻어서 창고 속에 넣어둘 수 있을까?

 

고대농업사회에서, 인구수량의 상한은 사실 농작물의 수중에 달려 있었다. 농작물의 생산량이 높고 낮음에 따라, 인구수량의 다과가 결정되었다. 먹을 거리를 달라고 벌리고 있는 입들을 보면, 속과 같은 생산량이 낮은 작물은 이미 더 이상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소맥(小麥, 밀)  

 

바로 이때 소맥(보리)가 눈부시게 등장한다. 소맥은 입맛도 좋고 생산량도 안정적이다. 그리하여 중국북방지역을 석권한다. 각지의 농민들은 속속 소맥의 광팬으로 바뀐다. 소맥을 심는 면적이 늘어나고 기타작물을 심는 면적은 감소한다.

 

그러나, 소맥은 중국에서 순화시킨 작물이 아니다. 소맥의 고향은 멀리 서아시아였다. 그곳도 인류최초의 농업기원지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전에, 그곳의 사람들은 평지에 소맥(小麥, 밀)과 대맥(大麥, 보리)을 심는다. 산언덕에는 산양(山羊)과 면양(綿羊)을 길렀다. 그때의 사맘들이 새로운 농작물을 획득한 기쁨은 아마도 우리가 오늘 날 애플의 신형컴퓨터를 얻은 느낌에 못지 않았을 것이다. 그후 소맥의 종자는 신속히 서아시아에서 사방으로 퍼져간다.

 

소맥이 중국에 도착한 시간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중국경내의 최초의 소맥 유물은 신강 공작하변의 고묘구묘지에서 발견되었다. 고묘의 한 풀로 엮은 바구니에 소맥이 부장품으로 담겨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이미 3800년전의 일이다. 현지 유적지에서는 대형 마맥기(磨麥器)도 발견된다. 신강의 발견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소맥은 아마도 서아시아에서 신강을 거쳐 중국북방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사서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주목왕이 서쪽으로 순유를 갔는데, 서왕모와 약속을 할 때, 연도의 부락민들이 속속 주목왕에게 소맥을 바쳤다. 이를 보면 당시에 소맥은 이미 전 아시아인들이 즐겨 먹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주시기에, 소맥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의 지위가 아직은 속만 같지 못했다.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속은 존귀한 양식이었다. 이를 보면 습관의 역량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입이 최종적으로 머리를 결정한다. 아무리 고대 원시적인 경작제도하에서라도 단위면적당 소맥의 생산량은 아마도 속의 생산량의 두 배 이상이었을 것이다. 만일 물이 있으면 생산량은 더욱 높다.

 

전국시대가 되어, 소맥은 이미 속을 대체하고, 각국의 양식창고의 주인공이 된다. 특히 진(秦)나라에서는 그러했다.

 

전국칠웅 가운데 진나라는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보면, 서역에 가깝다. 그래서 소맥과 같은 농작물에 접촉한 시간이 더욱 이르게 된다. 그리고 진나라는 위하의 충적으로 형성된 관중평원을 가지고 있다. 이곳의 기후화 수리조건은 소맥을 심기에 아주 적합하다. 그래서 진나라가 마지막에 대국이 되고, 천하를 통일하는데, 좋은 환경적 기초를 닦게 된다. "병사와 말이 움직이기 전에, 양식과 풀이 먼저 움직인다(兵馬未動, 糧草先行)" 진나라의 군대가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그들이 며칠을 굶으면 전투력이 없어질 것이다. 전국시대 후기의 진나라군대가 매년 전투를 할 수 있었던 것의 경제적 기초는 바로 관중평원에서 나는 소맥이었다.

 

이 점을 사마천은 명확히 보았다. 그는 <사기.화식열전>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진나라가 위치한 관중지구는 토지가 천하의 1/3에 불과하고, 민중도 대체로 이런 비율이었지만, 그들이 부유한 정도는 천하총량의 60%에 달하였다. 그래서 한나라때가 되어, 국가의 관리자는 관중평원을 아주 중시하는데 이는 관중평원상의 소맥과 관련된다. 서한의 많은 농학자 겸 관리들은 관중평원에서 소맥을 심도록 널리 보급한다.

 

진나라말기의 전쟁과 한나라초기의 여후전권을 겪은 후, 한문제와 한경제의 시기에, 서한은 소위 '문경지치(文景之治)"의 태평성대를 맞이한다. <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국가의 양식창고는 날로 꽉 차갔고, 새로운 양식이 옛 양식의 위에 쌓이고, 나중에는 양식창고의 바깥에까지 쌓아놓게 된다. 국가의 창고에는 대량의 동전이 쌓아고, 여러해동안 쓰지 않다보니, 동전을 꿴 밧줄이 썩어버려, 땅위로 떨어진 동전이 부지기수가 된다.

 

후인들이 문경지치를 평가할 때, 그 공을 전란이 평정된 후의 정치적 안전과 황제가 앞장서서 근검절약하였고, 농민의 세금부담을 감경시킨 등의 요인을 든다. 이들 해석은 모두 어느 정도 이치에 맞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더욱 중요한 하나의 원인은 바로 소맥을 널리 심게 되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각왕조의 뿌리는 농민이다. 비록 농민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자경농, 전농(佃農), 농노등등. 그러나 고대중국에 있어서, 농민중의 주력군은 자경농이다. 만일 이들 자경농의 토지상의 양식생산량이 아주 낮으면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이고, 황실에 양식을 바칠 수 없게 된다. 황제가 근검절약하고,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더라도, 한푼도 나눠서 아껴써야 한다. 그러게 되면 세수도 얼마 거두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문경시대에 평화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전국적으로 생산량이 다른 작물보다 많은 소맥을 널리 심게 된다. 그리하여 자경농들이 추수할 때면 더 많은 양식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라에 더 많은 양식을 바칠 수 있게 된다.

 

중국사서에 기재된 일부 '태평성대'는 유가사상을 강령으로 하는 사관의 붓아래에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인정(仁政)을 베푼 산물이다. 이는 인품문제이다. 그러나, 기실 일부 '성세'는 근본적으로 관료식이고 허풍인 것이다. 그리고 일부 '성세'는 다른 원인이 있다. '황상이 성명'하다는 것으로 개괄할 수는 없다. 문경지치는 바로 그 사례중 하나이다. 두 황제는 무슨 뛰어난 정책을 실시하지도 않았다. 즉, 명절때 호미를 들고 그저 폼을 잡았을 뿐이다. 소맥이 바로 문경지치의 진정한 막후주인공이다.

 

진나라때부터 관중평원에서 장기간 안정적으로 높은 생산량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정국거(鄭國渠)의 덕분이다.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역사상 사상계의 황금시대이다. 당시에는 어떤 희귀하고 괴상한 사상도 다 있었다. 겸애천하를 주장하는 묵자, 털 하나를 뽑아서 천하에 이롭더라도 하지 않겠다는 양주가 있다. 정국거라는 이 공사는 바로 한(韓)나라가 기획한 아주 웃기는 하나의 음모이다.

 

전국칠웅 가운데, 한나라는 진나라와 이웃해 있었다. 실력은 가장 약했다. 언제든지 강한 진나라에 의하여 멸망할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 어쩔 도리가 없던 한나라는 하나의 '묘계'를 생각해 낸다. 본국의 수리전문가인 정국을 진나라로 파견하여, 막 왕위에 오른 진왕 영정(진시황)에게 위하유역에 도랑을 파게 하여, 관중평원의 만무짜리 벌판을 관개하도록 한다. 수리공사는 대공사이다. 이 계획이 성공하면, 단기간내에 진나라는 한나라를 공격할 재력, 물력이 없게 되는 것이다.

 

당시, 진나라가 비록 강했지만, 수리인재는 모자랐다. 정국이 온 것은 진시황에게는 망외의 기쁨이었다. 즉시 그로 하여금 전국시대의 '삼협공정'을 주재하도록 한다. 진나라의 자원과 인력은 이 대공사에 투입된다. 확실히 전쟁을 벌일 역량이 없게 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5년후 한나라의 음모가 드러난다. 진왕은 대노하여 정국을 죽이고자 한다. 생사의 순간에 정국은 진왕에게 말한다. 나는 확실히 간첩이다. 그러나 만일 도랑이 완성되면, 진나라에 큰 이점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한나라를 몇년간 더 버티게 해줄 수 있을 뿐이지만, 진나라는 만년에 걸쳐 수익을 얻게 될 것이다.

 

진왕 영정이 경제학의 고수였다면 즉시 이 이치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진왕은 정국에게 수리공사를 계속하도록 지시한다. 십여년만에, 도랑은 완공된다. 이름을 정국거라 칭한다. 정국이라는 수퍼간첩은 이름을 천고에 남기게 된다. 이는 완전히 진왕의 넓은 흉금과 탁월한 식견때문이다.

 

정국거에 대하여 얘기하자면, 사실 소맥에 대하여도 얘기해야 한다. 소맥은 추위를 견디는 작물이다. 필요한 수분이 많지는 않다. 정국거를 만든 것에서 관개는 그저 부차적인 작용이고, 주요 작용은 물로 밭에 쌓여있는 소금기를 없애는 것이었다. 황하유역의 농업지구는 모두 계절풍기후지역이다. 계절풍이 올 때면 강수량이 충분하지만, 계절풍이 오지 않으면 가뭄이 온다. 토양이 수분이 금방 증발하지만 소금기는 토양에 남아 있다. 이렇게 한해 또 한해가 가면, 밭은 소금으로 알칼리화가 이루어져 토지의 힘이 많이 약화되고, 나중에는 작물을 심을 수 없게 된다.

 

고대 중국인들은 소맥을 심기로 선택하면서, 동시에 염분과 장기간에 걸친 투쟁을 벌인다. 비록 정국거와 같은 수리공정으로 알칼리화의 추세를 늦추기는 했지만, 토지비옥도의 하강은 피할 수 없었다. 또 다른 보완조치는 휴경(休耕)이다. 한 계절은 작물을 심고 한동안 작물을 심지 않는다. 토지가 비옥해진 후에 다시 한 계절을 심는다. 휴경은 한동안의 양식생산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고대중국의 자경농에 있어서, 생활에서 한동안 수확이 없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소맥을 심는 곳에서는 관중평원이건 아니면 나중의 화북평원의 일부 농경지역이건, 농민들은 부득이 매년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토지에 염분이 쌓여 알칼리화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면 많은 농민들이 안정적인 양식수입을 잃게 되고, 깃발을 들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피하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볼 수 있다. 여러번 왕조를 멸망시킨 농민의 난은 모두 소맥농사지역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서한말기의 녹림, 적미의 난은 산동 거현에서 발발한다. 동한말기의 황건적의 난은 하남 낙양에서 발발한다. 북위말기의 육진기의는 하투지역에서 발발한다. 수나라말기의 농민의 난은 산동, 하북, 하남에서 발발한다. 당나라말기의 황소의 난은 산동에서 일어난다. 명나라말기의 이자성의 난은 섬서 미지에서 일어난다...이들 반란의 도화선은 아마도 서로 다를 것이다. 그러나, 배후에는 모두 토지알칼리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당나라는 소맥의 마지막 영광을 보여준 시기이다. 안사의 난 이전에, 진령, 회하의 선을 경계선으로 하여, 북방지역의 인구는 전국인구의 60%를 점하고, 남방지구는 40%를 점했다. 당시 북방지구는 기본적으로 소맥을 심는 지역이고, 당나라는 경작지의 개발에 있어서 당시 과학기술의 극한에 도달했다. 당나라인구는 오늘날 중국의 4%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경지면적은 최고일 때 8억-12억무에 달한다. 지금 전국이 18억무의 경작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과 비교하면, 이미 50%에 달한 것이다. 정관지치(貞觀之治)는 사실 문경지치와 유사하다. 모두 장기간의 전란후에 왕조가 평화시기를 이용하여 소맥의 경작면적을 늘여서 경제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오늘날의 약 50%의 경작지를 보유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약 4%의 인구만 먹여살리면 되었다. 경작지는 충분히 남아돌았다. 그러나 북방지구의 경작지의 생산량은 이미 일락서산(日落西山)이었다. 속의 생산량부족으로 제1차 양식위기를 맞이한 이후, 소맥생산량이 하락한 것으로 인하여 제2차 양식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벼가 소맥의 소파에 앉다

 

중화대지에서 살던 고대인들에게 벼(水稻)는 전혀 낯설지 않다. 지금으로부터 칠팔천년전에, 태호유역과 항주만지역에 살던 고대인들은 습지에서 생장하는 관목을 불태워버린 후, 습지에 벼류의 초본식물을 심었다. 고고학자들은 7500년경 이전에, 해수면이 상승한 적이 있고, 이들 강과 호수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물이 거꾸로 흘러들어왔다. 이들 선조들은 제방을 쌓아서 해수의 침입을 막아서 자신의 논을 지키고자 했다.

 

소맥의 기원이 구미파초인 것과 유사하게, 벼도 선주민들이 풀에서 고르고 고른 것이다. 그러나, 강남지역의 선주민들에 있어서, 당시는 물고기사냥이 위주였고, 매일 해산물을 먹었다. 벼를 심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실 벼의 음식물로서의 기능을 그다지 중요하게 보지 않았다. 그저 쌀을 도자기에 넣어서 발효시켜 맛좋은 술을 만들곤 했다. 당시 먹거리는 풍부하고, 인구는 적어서, 선주민들이 벼를 심은 최초목적은 아마도 새로운 맛을 탐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강남지역의 인구가 증가하여 벼가 중요한 양식작물이 되었지만, 쌀의 생산량은 여전히 별볼 일이 없었다. 주요한 원인중 하나는 벼를 심는데는 기술이 필요하도 특정한 일자에 재배하고, 특정한 일자에 모내기를 하여야 했다. 고대인들은 벼를 심는 전체적인 기술을 장악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또 다른 원인은 중국고대에 생산량이 높은 벼종류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에 한 계절밖에 심지 못한다. 당시에는 현대의 유전자기술이 없어서, 새로운 벼종류를 찾아내는 것은 일대일대를 거치며 고르고, 일대 일대에 걸치며 시험해야 했다. 일단 전란을 맞이하면, 이런 연구는 모두 헛고생이 되어버린다.

 

소맥으로는 중국인민을 먹여살릴 수 없는 관건적인 순간에, 월남의 인민들은 중국에 도움의 손길을 뻗는다. 그들은 좋은 벼종류인 점성도(占城稻, 안남미)를 전해주었다. 점성도의 원산지는 월남 중남부이다. 생산량이 높고, 일찍 익으며, 추위를 견디는 삼대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생장기간도 짧고, 조건이 맞으면, 심기 시작해서 거두는데 2달이면 되었다.

 

송나라초기에 점성도는 천주상인이 동남아에서 복건등지로 가지고 온다. 점성도는 신속하게 장강유역의 논을 점령한다. 송진종은 심지어 관리를 복건에 파견하여 벼를 다른 지역으로 보급하게 한다. 송나라때 농민들은 현재 농지에서 보리와 쌀을 윤작하는 법을 발견한다. 수입한 벼는 성숙기가 아주 짧으므로 1년중 1계절은 벼를 심고, 1계절은 소맥을 심는 것이 가능했다. 이렇게 되니 단위당 생산량이 늘어나고, 휴경하는 횟수도 크게 줄게 된다. 그리고 벼를 심는 논은 수십밀리미터 깊이의 물 속에 놓여 있게 되므로 수분이 대량으로 증발하여 염분이 많아져 알칼리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된다. 토지의 비옥도가 기본적으로 안정되게 된다.

 

우수한 벼종류의 도입과 보급은 직접적으로 송나라때 중국인구의 대폭발을 가져온다. 특히 남방지역이 그러했다. 북송때, 전체 인구는 약 1억명이었는데, 진령 회하를 기준으로 구분하면 남방인구의 수량이 이미 북방인구의 1배가 된다.

 

자고이래로 중화대지의 인구는 북쪽이 많고 남쪽이 적은 국면이 이어졌는데, 이것이 철저히 역전된다. 이 변화는 상당히 중요하다. 국가의 세수는 자경농으로 결정되는데, 남방인구수량이 많아지면서 남방의 세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국가의 경제중심이 자연히 남방으로 옮겨온다. 북송시대부터 시작하여, 경제중심은 황하유역에서 점차 장강유역으로 옮겨온다. 농민의 양식창고에서 쌀이 소맥을 대체하고, 양식창고의 주인공이 된다.

 

벼가 소맥의 소파를 차지한 후, 중국의 지대물박한 장점은 나타나기 시작한다. 북방의 생산량이 적을 때는 남방에서 양식을 공급하고, 남방에서 수확이 적으면, 북방에서 양식을 공급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대운하가 운영된 후, 남북의 양식이동은 더욱 편리해진다. 이재민을 구하는 효율도 더욱 높아진다. 국가는 이로 인하여 더욱 안정적으로 된다.

 

소맥이 양식창고를 지배하던 시기는 기원전221년 진시황이 통일중국을 건립한 때로부터 계산하여, 북송왕조가 건립된 때인 960년까지 중국은 모두 진, 서한, 동한, 삼국, 서진, 동진, 남북조, 수, 당, 오대십국의 10개시대를 거친다. 평균 매 백년여마다 한 왕조씩 바뀌었다. 만일 남북조와 오대십국시대의 단명왕조까지 계산한다면 왕조의 교체주기는 더욱 짧다.

 

벼가 양식창고의 주인공이 된 후, 중국은 모두 북송, 남송, 원, 명, 청의 5개 왕조를 거친다. 만일 1911년까지로 계산하면, 950년의 기간동안 왕조의 수명은 200년에 가깝다. 바로 수중에 양식이 있으므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북송과 그 이후의 왕조는 모두 널리 벼를 심음으로써 연년익수할 수 있었다.

 

농작물의 생산은 고정된 주기가 있다. 예를 들어 북방지구는 1년에 1번 거둔다. 남방지구에서는 1년에 2번 내지 3번까지 거둔다. 경제중심이 북방에 있을 때 유목민족이 일단 장성을 넘어 남하하면, 중원왕조는 아주 난감한 지경에 처했었다. 자신의 농업생산이 단절되기 때문에 힘을 다해서 침입자를 막았다. 각 왕조가 받는 압력이 컸다. 벼가 굴기하자, 경제중심이 남방으로 옮겨간다. 중앙왕조는  북방유목민족을 대할 때, 훨씬 여유있게 된다. 어쨌든 유목민족이 진령, 회하일선의 이남까지 침입해 들어가기는 어려웠고, 양식생산의 기반을 해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거꾸로, 경제중심이 남방에 있으므로, 중앙왕조가 새외를 북벌하고자 하면, 남방에서 인력, 물력을 모으는 것이 아주 곤란했다. 이것도 북송이후의 중앙왕조가 왕왕 대외적인 영토확장이 어려웠던 이유이다. 예를 들어, 북송과 요와의 싸움, 남송과 금과의 싸움, 그후 명나라와 몽골의 대치에서 중앙왕조는 모두 강역을 장성의 북쪽너머까지 확장할 힘이 없었다.

 

월남인민이 공헌한 점성도는 중국의 인구수량이 송나라때 처음으로 1억을 돌파하게 만든다. 그후는 완만하게 증가하는 시기이다. 명말청초에 이르러 국토면적은 많이 확대되었다. 동북지구, 몽골고원, 신강과 티벳까지 모두 포함된다. 인구수량도 1억가량에서 오가고 있었다. 농경지구의 인구는 기본적으로 송나라때의 수준을 유지했다. 어쨌든 식량생산량이 인구수량을 결정한다. 농사를 짓는 논과 밭은 이미 모두 농사를 짓고 있었고, 새로 개간할 논밭은 한도가 있었다. 점성도의 생산량은 이미 극한에 도달했다.

 

중국의 인구수량은 다시 새로운 최고치를 갱신하려면, 새로운 농작물이 나타나야 했다.

 

옥수수에 감사하고, 인디안에 감사한다.

 

콜롬보가 미주대륙을 발견하여, 유럽의 식민자들에게 황금과 백은을 가져다 주고, 대량의 개발될 토지를 가져왔다. 유럽인들은 졸지에 넓은 땅을 가지게 되어, 전체 사회의 면모가 일신된다.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콜롬보의 발견은 동방의 중국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중국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았다. 원래 세계에 미주대륙도 있었던 것이다.

 

기실 세계는 하나이다. 미국의 대평원에 나비 한 마리가 날개짓을 하면, 남미에서는 폭풍이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혼돈학설이 말하는 나비효과이다. 미주대륙의 발견은 유럽을 바꾸었을 뿐아니라, 마찬가지로 고대중국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미주에서 온 일부 농작물은 중국사회를 바꿔 놓는다. 그것들은 옥수수, 고구마, 땅콩, 해바라기, 고추, 담배이다.

 

이들 농작물 중에서, 옥수수와 고구마는 양식창고에 큰 공헌을 했다. 명말청초때, 황하유역이건 장강유역이건, 소맥과 벼를 심을 수 있는 토지는 기본적으로 모두 개발이 완료되었다. 당시의 생산량으로는 겨우 1억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었다. 다시 더 이상의 인구를 낳는다면, 상당한 사람들이 굶어죽을 것이다. 바로 이때, 미주의 옥수수와 고구마는 기나긴 전파과정을 거쳐, 지구의 절반을 돌아 중국에 도착한다.

 

옥수수는 적응능력이 아주 강한 농작물이다. 북으로 러시아, 카나다와 같은 추운 곳으로부터, 남으로 남미주의 요지인 원시밀림까지, 모두 옥수수를 심을 수 있다. 그래서 옥수수가 중국으로 들어온 후, 원래 소맥을 심을 수 없었던 많은 마르고 척박한 땅까지 개간이 가능해졌다. 소맥과 비교하여 옥수수는 생산량이 더욱 높았다. 비록 영양가치로 보면, 소맥보다 약간 못할지 모르지만, 가난한 농민에 있어서, 배를 불리는 것은 영양가치보다 더 중요하다. 명말청초의 시기에, 토지를 잃은 농민은 속속 주인없는 구릉지대로 가서 산언덕에 옥수수를 심었다. 산자락 아래에는 고구마를 심었다. 그리하여 양식창고가 가득 차게 된다. 그러자 추가로 몇몇 아이들을 더 먹여살릴 수 있게 되었다.

 

미주 인디안이 공헌한 농작물은 중국인의 배를 불릴 뿐아니라, 중국인의 식사를 개선하게 된다. 고대중국은 장기간 농업사회이다. 목축업은 발달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육류가 아주 적었다. 비록 계란, 닭고기와 돼지고기에 풍부한 동물성 단백질이 포함되어 있지만, 가난한 농민들이 먹기는 어려웠다. 하층 자경농의 식단에서 주식을 제외하고, 단백질이 풍부하게 포함된 음식물을 찾기는 어려웠다. 식물성 단백질이 있는 콩은 중국고대인들의 단백질공급원이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말하여, 대두가격은 싸고도 충분했다. 자경농들이 식사를 개선하는 좋은 선택이 된다. 이는 바로 왜 오늘 많은 중국인들이 우유를 마시면 배탈이 나고, 두유를 먹으면 아무 일이 없는 원인을 설명한다. 중국의 보통대중은 수천년동안 채식을 해왔다. 장에는 우유를 분해하는 성분이 결핍되어 있다.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온 해바라기와 땅콩은 하층농민들에게 단백질과 지방을 섭취할 수 있는 기타선택을 제공한다. 그리고 땅콩과 해바라기는 마찬가지로 척박한 산지에 심을 수 있게 된다. 이는 바로 고대 중국인들의 복음이고, 양자는 신속히 전국을 풍미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중요한 먹거리가 된다. 약간 유감인 것은 이 두 가지 작물이 제공하는 단백질은 식물성 단백질이라는 것이다. 보통 중국인(유목민족 제외)이 우유제품을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은 겨우 1,2십년 전의 일이다.

 

고추는 사람들이 콧물 눈물을 흘리게 하지만, 그 맛을 잊지 못하게 한다. 이런 작물도 인디안들이 준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의 식탁에 또 하나의 조미품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고추의 막대한 소비량은 상당한 규모의 고추사업을 일으키게 한다.

 

미주에서 전해져온 담배는 기호품이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환영을 받았다. 상류층이건 보통사람이건 많은 사람들은 모두 식사후에 담배를 피우고 구름연기를 내뿜는다. 담배를 심는 것은 많은 저층농민들에게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욱 높은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콜롬보의 미주대륙 발견의 나비효과는 고대중국에서 더 많은 경작지와 더 많은 인구를 가져다 준다. 만일 우리가 청나라가 시작한 때의 인구를 억으로 계산하면, 100년후에 강건성세를 거쳐, 중국인구는 가볍게 배로 뛰어 3억을 돌파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문경지치는 많은 정도에서 소맥을 심고 보급한 덕분이다. 그렇다면 소위 강건성세는 옥수수, 고구마의 보급과 관계있을 것인가?

 

청나라의 강건(강희,건륭)시대는 사실 한나라의 문경지치때와 비슷하다. 모두 정국이 점차 안정되고, 국민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한다. 더욱 유사한 것은, 농작물의 품종에서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문경지치때는 소맥이 점차 속을 대체하여 창고의 주력군이 되었고, 강건성세때는 옥수수, 고구마가 양식창고에 들어가서, 벼, 소맥과 함께 양식창고를 채웠다. 만일 옥수수, 고구마, 땅콩등 작물이 도입되지 않았더라면, 강희와 건륭이 아무리 하늘이 내린 기재라 하더라도, 이미 극한에 도달한 중국인구를 배로 늘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일 옥수수와 고구마가 백년 일찍 중국에 들어왔으면, 명나라중엽에 더 많은 가난한 농민들을 먹여살릴 수 있었을 것이고, 배부른 이자성은 농민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후금의 철기도 중원을 차지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러나 논리나 상식으로 볼 때, 강건성세는 옥수수, 고구마의 기초 위에서 건립된다. 3억여의 자경농이 납부하는 양식이 없었다면 청나라귀족들은 새장을 들고 경극이나 구경하는 멋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소위 태평성대에 미련을 두지 말라. 그것은 그저 전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