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국21 장개석은 어떻게 성도(成都)에서 대만(臺灣)으로 도망갔는가? ㅠ상,글: 왕풍(王豊) 장개석이 처음 사천에 온 것은 1935년 3월 2일이다. 그가 사천에 간 목적은 첫째가 독군(督軍)이다. "공비토벌" 전선을 시찰하기 위함이다. 장개석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전력을 다하여 사천성정부가 사천을 건설하는 것을 돕고, 사천동포의 고통을 해소시켜 주겠다고, .. 2015. 11. 2. 장개석의 "마지막 하루" 글: 구양박문(歐陽博文) 대만 의 보도에 따르면, 대만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는 31명의 장개석의 신변에서 일했던 시종인원들을 인터뷰하여, 근 60만자에 이르는 구술역사를 완성했다. 대만당국의 '유엔퇴출'시 장개석이 분노하여 압설모를 집어던지고 화가나서 눈물을 흘린 일도 기록했고, 장개석의 마지막 하루도 기록했다. 장개석의 시위관, 내무조 부주임등의 직위를 지낸 응순인(應舜仁)의 회고에 따르면, 1971년 10월 26일 장개석을 모시고 대계빈관(大溪賓館)으로 갔다. 그날 무관이 장개석에게 '유엔퇴출' 소식을 보고한다. 장개석은 '압설모를 집어 바닥에 던졌다' 응순인은 장개석을 오랫동안 모셨지만 처음으로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목도했다고 말한다. 대만당국이 전 외교부장 전복(錢復)은 당시 장개석의 영.. 2014. 10. 24. 장경국은 왜 장씨후손을 후계자로 고려하지 않았는가? 글: 도함(陶涵) 장경국은 8월 타임지 인터뷰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는 장씨집안후손을 후계자로 삼는 것을 전혀 고려해본 적이 없다고. 장경국은 장효무, 장효용 형제가 국민당 '중앙위원' 경선에 참가할 뜻이 있음을 알게 되자, 비서장 마수례(馬樹禮)를 시켜 제지하게 한다. 장경국의.. 2014. 4. 4. 위정성(兪正聲)의 형 위창성(兪强聲)의 1985년 미국망명내막 작자: 미상 현임 전국정협주석, 중앙정치국상위 위정성의 형은 위창성이며, 1985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위창성은 강청(江靑)의 첫번째 남편인 유계위(兪啓威, 위치웨이)의 큰아들이다. 유계위는 혁명연대에 황경(黃敬, 황징)이라는 가명을 썼고, 신중국성립후 초대 텐진시장을 지낸다. 문.. 2013. 12. 22. 송미령(宋美齡)의 마지막 30년 글: 란혜(欒慧), 복창형(卜昌炯) 남편이 죽은 후 28년만에 송미령도 세상을 떠난다. 호평과 악평이 넘쳐나는 남편과는 달리,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녀는 '퍼스트 레이디'의 우아함과 풍채일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그녀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계속 갱신되었고, 그들이 송미령.. 2013. 12. 6. 장개석의 제4대 자손들 글: 울수원(蔚秀園) 1949년이후 장개석 부자는 전후로 타이완을 통치했다. 1988년 1월 13일, 타이완의 정치강자 장경국이 아무런 사전 조짐도 없이 칠해관저(七海官邸)에서 사망한다. 돌연한 사망이었으므로 국민당 고위층은 아무런 마음의 준비를 갖추지 못하여, 장경국 사후의 권력배치를 .. 2013. 11. 10.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