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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경국)

장경국은 왜 장씨후손을 후계자로 고려하지 않았는가?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도함(陶涵)

 

 

 

장경국은 8월 타임지 인터뷰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는 장씨집안후손을 후계자로 삼는 것을 전혀 고려해본 적이 없다고. 장경국은 장효무, 장효용 형제가 국민당 '중앙위원' 경선에 참가할 뜻이 있음을 알게 되자, 비서장 마수례(馬樹禮)를 시켜 제지하게 한다.

 

장경국의 건강은 날로 나빠졌고, 여기에 왕승(王昇)사건이 더하여 후계자를 정해야할 필요가 더욱 두드러졌다. 장경국이 지난번에 입원했던 기간동안 '총통부 비서장'은 '8인소조'를 만들어 '총통'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거나 직무를 집행할 수 없을 경우에 대비했다. 이를 통하여 집단지도체제를 취하려 한 것이다. 장경국은 이런 움직임을 불쾌하게 여긴다. 그의 임기는 아직 1년이 남아 있었다. 1984년 5월이 되어야 임기만료되는 것이다.

 

국민대회는 3월에 선거를 통하여 그의 후계자를 뽑게 된다. "부총통". 장경국은 마음 속으로 잘 알았다. 자신이 1990년까지 살 수는 없다는 것을.

 

1983년연말이전에, 그는 대만성출신인사를 후계자로 삼기로 확정한다. 현임 부총통 사동민(謝東閔)는 나이가 이미 너무 많고, 신뢰도가 떨어졌다. 다른 한편으로, 장경국은 대만성주석 이등휘(李登輝)에 대한 인상이 날로 좋아지고 있었다. 이등휘가 '성주석'을 맡는 동안 아주 잘 처신했고, 전임 '성주석' 임양항(林洋港)이 해결하지 못한 여러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놓았다. 예를 들어, 지방인사의 항쟁으로 대만북부의 약간 홍수방지공사계획이 저지된 것등이다. 이등휘는 여러번 지방인사 및 민중과 직접 대면하여 결국 지방인사들에게 홍수방지계획이 지방에 유리한 것이라고 설득해내는데 성공한다.

 

이등휘는 장경국과 마찬가지로 기술관료출신이다. 그리하여 권력에 야심을 가진 이미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등휘가 정치인, 경영인, 지도자로서의 재능을 드러낸 이외에, 장경국의 개인의견에 따르면, 이등휘는 중화민국총통으로서의 외모형상과 내재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장경국은 이등휘는 키도 크고, 얼굴에 미소를 띄고 있어 전세계에 좋은 인상을 준다는 점에도 만족하고 있었다.

 

장경국이 마지막 선택을 고민하고 있을 때, 하루는 아침에 이등휘가 성의회에서 의원과 변론한 내용을 읽었다. 대만독립이념을 배척하는 원고이다. 이등휘는 성의회에 이렇게 보고한다. 중국은 지금까지 대만을 버린 적이 없다. 대만도 절대로 중국을 잊을 수 없다. 장경국은 아주 기뻐한다. 그 자리에서 고급조리를 시켜 이등휘를 며칠후에 개최되는 '중앙상무위원회'로 와서 보고하게 한다.

 

장경국은 그에게 간단히 연설하게 하고, 그를 격려해준다. 이등휘는 중앙상무위원회에서 성의 업무를 가난히 보고한다. 그가 자리에 앉은 후, 장경국은 아주 보기 드물게 이 광경을 평론한다: "이등휘 동지의 업무실적은 아주 좋다." 회의장에서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는 이등휘가 앞으로 신임 '부총통'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장경국의 후게자는 최소한 '정권지도자'가 되어야 했다.

 

1984년 2월, 왕승이 비록 막 파라과이에 부임한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았지만, 아순시온에서 귀국하여 국민당중앙위원회의에 참가하도록 허락받는다. 장경국은 주목했다. 많은 퇴역인원들이 공항으로 가서 이 전임 '총정전부' 주임을 맞이하는 것을. 만일 그가 이전에는 의심만 품었다면, 이제는 아주 확신하게 된다. 왕승을 대만에서 내보내는 것은 역시 정확한 선택이었다.

 

국민당중앙위원회회의는 평상시와 같이 양명산 중산루에서 개최된다. 다만, 이번 회의의 의미는 아주 컸다. 당연히 일반적으로 회의에서 장경국을 '총통후보자'로 뽑을 것으로 여겼다. 잘 모르는 점은 누구를 '부총통'후보자로 하느냐이다. 그 부총통은 아마도 총통의 직위를 승계하게 될 것이다. 중앙상무위원회외에, 이것은 큰 비밀이었다. 장경국이 수수께끼의 다안을 이등휘라고 내놓았을 때, 민심과 매체는 모두 의외라고 여긴다. 그러나 중앙상무위원회는 이 인선을 신속히 통과시킨다.

 

이등휘가 지명을 받아 부총통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전국은 그가 젊었을 때, 1945년부터 1946년 사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거나 중국공산당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급히 이 깜짝 놀랄 정보를 장경국에게 보고한다. 장경국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그건 이제 방법이 없다"고 한다. 장경국은 자신이 젊었을 때 소련공산당과 장기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다만, 강경파인 정치(情治) 및 총정전부(總政戰部)형의 인사들은 장경국이 이등휘를 선택한 것에 대하여 조그만치도 인정하지 않았고, 특히 이 대만인이 공산당경력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는 더더욱 불쾌하게 생각했다.

 

장경국은 일부 인원들이 후계자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여긴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두 아들 장효무, 장효용, 동생 장위국 및 장부인(송미령)은 현재 당의 주석을 장씨집안 사람이 맡지 않는다면, 장씨에게 충성스러운 외성인에게 맡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여긴다. 그들은 '당주석'이야말로 실제대권을 장악하는 관건이라 여긴다. 이때, 오랫동안 후계자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손운선(孫運璇)이 중풍에 걸린다. 그후에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여 정계로 돌아오지 못한다. 장경국은 장씨집안에 충성하는 봉화의 고향사람이며 하버드에 유학하고 런던정치학원을 다닌 유국화(兪國華, 70세)로 하여금 행정원장을 맡게 한다.

 

2월의 국민당중앙위원회전체회의에서는 중앙상무위원회를 확대하여 27인에서 37인으로 늘인다. 대만적의 '중앙상무위원'은 12명으로 늘어난다. 비중은 39%가 된다. 다만, 장경국은 과거보다 훨씬 더 그의 심복들에게 의존한다. 여기에는 노간부 및 젊은 제3대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환(李煥)을 꺄오슝에서 중앙으로 불러들여 '교육부장'을 맡긴다. 이때, 장경국은 칠해관저에 의원형의 침상을 설치하고, 대부분의 공무를 관저에서 보았다. 소수의 '침상곁을 지키는 엘리트'들이 처리한다. 81세의 등소평은 장경국보다 6살이 많았다. 한평생 마신 술도 장경국보다 적지 않았고, 피운 담배도 더 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신체는 장경국보다 나았다. 1985년 9월, 등소평은 은퇴를 선언하고, 더 이상 일상행정업무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비정식의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유지한다. 여전히 당정군의 최고권력자였다.

 

타이페이쪽에서 이해 여름, 안과전문의는 장경국의 시망막이 퇴화하는 것을 발견하여 반드시 다시 수술해야한다고 했다. 두 명의 현지 외과의사가 집도를 책임진다. 수술후, 장경국의 신체는 급속히 나빠진다. 다리의 신경통도 심해졌다. 비록 젊은 부관이 부축하지만, 그는 걸음을 걷기가 어려웠고, '중앙당부' 3층의 회의실까지 가는 것이 힘들었다. 마수레는 '당부'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도록 건의하지만 장경국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앙상무위원회'를 타이페이호텔로 옮겨서 회의를 연다. 한 동안이 지난 후, 장경국은 정부건축물에서 당의 회의를 거행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여겨서 비로소 엘리베이터설치에 동의한다.

 

병은 장경국으로 하여금 이등휘의 후계자로서의 준비작업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자주 함께 국사를 논의했다. 그러나, 이등휘는 한번도 그의 침실에 들어간 적이 없다. 그곳은 외성적의 심복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장경국은 이등휘가 군대측과 아무런 연원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참모총장' 학백촌(郝柏村)으로 하여금 자주 이등휘와 얘기하도록 한다. 한 달후, 그는 다시 이 훈시를 내린다. 특별히 학백촌과 이등휘에게 유의량(劉宜良)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협의하게 한다. 학백촌은 명령에 따라 이등휘와 교분을 쌓기 시작한다. 장경국은 또한 이등휘로 하여금 그를 대표하여 정전학교 졸업생에게 강연을 하게 한다. 그리고 약간의 큰 행사에도 참석하게 한다. 이등휘의 외교사무능력을 보여주기 위하여, 장경국은 그를 '특사' 신분으로 중남미에 코스타리카, 파나마 및 구아테말라에 보낸다. 장경국은 미국 '주대만대표'인 이결명(李潔明)에게 그는 이결명이 이등휘와 자주 접촉하고 더 많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을 곁에 두지 말고." 이결명과 이등휘는 금방 아주 친해진다. 한번은 두 집의 부부가 함께 섬일주여행을 3일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계문제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대만 및 국외에서의 일부 정치분석가들은 일단 장경국이 사망하면, 이등휘는 유명무실한 '허군(虛君)'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트장경국시대에 국민당을 장악하는 것이 관건이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 부분은 장씨집안 혹은 군인이 넘겨받을 것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이등휘가 강자로 외성적 강자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소수의 관찰가들은 심지어 장효무를 좋게 보았다. 왜냐하면 그는 장씨이고, '변동시기가 오면 임시로 맡을 때 어느 정도 안정성을 증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유의량사건이후, 장경국은 더 이상 '정치기관'을 믿지 않는다. 장효용은 부친의 심복으로 되어, 매주 화요일, 금요일에 그에게 최신 정치상황보고를 한다. 일부 반대파의 간행물에서는 장효용을 '지하총통'이라고 칭하기 시작한다. 사태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장경국은 8월말 타임지와의 회견에서 '한번도 장씨구성원이 후계자가 되는 것을 고려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장경국은 장효무, 장효용이 국민당 중앙위원에 뜻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비서장 마수례를 시켜서 제지한다. 12월 15일 국민대회에서 연설할 때 그는 더욱 명확하게 그가 죽은 후 장씨집안 사람 혹은 군인이 정치를 주재할 것인지에 대하여 이렇게 답한다. "그럴 수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얼마후 장경국은 장효무를 '대만주싱가포르부대표'로 내보낸다. 이것은 쫓아낸 것과 다름없다. 이광요는 그의요청을 받아들여 장효무를 잘 돌본다.

 

지구의 반을 넘어서, 얼음과 눈의 나라 모스크바에서는 또 다른 지도자 후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체르넨코, 안드로포프가 짧게 직위를 맡은 후 병사하자, 고르바초프가 55세의 나이로 소련공산당 총서기에 오른다. 고르바초프는 경제, 문화, 민주와 외교정책의 모든 것을 새로 평가하고 개조한다. 그는 소련공산주의에 인도, 민주의 면모를 더하고자 하였다. 이 놀라운 조치는 소련제도의 해제츨 가져온다. 단기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개혁운동은 동유럽, 필리핀, 중국과 대만지구의 민주화운동에 세상을 뒤집고 역사를 새로 쓰는 동력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