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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장개석은 어떻게 성도(成都)에서 대만(臺灣)으로 도망갔는가?

by 중은우시 2015. 11. 2.

ㅠ상,글: 왕풍(王豊)

 

장개석이 처음 사천에 온 것은 1935년 3월 2일이다. 그가 사천에 간 목적은 첫째가 독군(督軍)이다. "공비토벌" 전선을 시찰하기 위함이다.

장개석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전력을 다하여 사천성정부가 사천을 건설하는 것을 돕고, 사천동포의 고통을 해소시켜 주겠다고, 한편으로 전체 사천의 군대가 친애정성(親愛精誠)의 정신을 가지고 단결과 일치를 축진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군인으로써 국가와 국민을 보위하는 천직을 다하자고 하였다.  그의 두번째 목적은 경내의 군벌세력을 초안(招安)하는 것이었다. 사천이 남경정부에 귀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사천군벌간에 각자 자신의 지역을 분명히 나눠서 가지고 있는 국면을 타파하고, 사천의 군대를 통합하고자 했다. 장개석은 반년의 시간을 들여서 기본적으로 "사천의 정치를 통일시키고, 사천의 군대를 국가화한다"는 목표를 달성한다.

 

사천의 군대를 정돈하기 위하여 장개석은 사천에 "아미군관훈련단(峨嵋軍官訓練團)"을 만든다. 사천, 운남, 귀주등 지방의 군사간부, 행정인원과 단경간부를 훈련시키는데 전후로 2기의 훈련반을 훈련시킨다. 

 

1937년, 사천과 서강(西康)의 지방무장세력은 기본적으로 정리가 끝난다. 정군업무가 완료된 후, 마침 '노구교사건'이 발발한다. 장개석은 강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신해혁명은 비록 무창에서 발생했지만, 그 발인지는 실제로 사천이다. 왜냐하면 사천의 보로운동이 신해혁명의 도화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개석은 "아미군관훈련단'의 구성원들에게 말한다. 혁명이 사천에서 일어났으니, 성과도 사천에서 거두어야 한다고.

 

항전이 발발한 후 사천성은 제22, 제23, 제27, 제29, 제30, 제36의 6개 집단군을 사천성 밖으로 내보내 항일전투에 참가한다. 8년의 항전기간동안 사천성은 모두 300만의 사병과 장정이 항전에 참전했다.

 

1937년 10월 31일, 국민정부는 이렇게 선언한다. 전선의 전사들에게 중국정부가 수도를 중경으로 옮긴다고. "전황을 응전하고, 전체국면을 통합지휘하고, 장기간 항전하기 위하여 오늘 중경으로 이주한다. 이후 가장 광대한 규모로, 더욱 지구적인 전투를 벌이겠다."

 

이때, 사천성주석인 유상(劉湘)은 이미 병을 안고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다. 1938년 1월 20일 유상이 한구(漢口)에서 병사한 후, 장개석은 장군(張群)으로 하여금 승계하게 한다. 다만 무한의 전투상황이 긴급하여 장군은 사천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왕찬서(王纘緖)가 사천성주석의 직무를 대행한다.

 

1938년 10월 무한이 함락되고, 사천의 당정군의 요인은 연명으로 장개석에게 사천으로 가서 대계를 주재하도록 요청한다. 12월 8일, 장개석은 계림에서 비행기를 타고 중경으로 가고, 장개석의 사천시대가 개막된다.

 

장개석이 사천에 도착하여 정무를 주재한 후, 일찌기 사천성 주석의 직을 겸임한 바 있다. 1939년 10월 3일, 장개석은 중경에서 성도로 날아간다. 10월 7일, 사천성주석에 취임한다. 10월 15일, 장개석은 그의 부임을 발표한 후 처음으로 사천동포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한다.

 

장개석은 3가지 주요시정방침을 내놓는다: 첫째, 전체 성의 현달(賢達)과 지식인사들에게 사회를 지도하고 기풍을 바꾸기를 바란다. 둘째, 오늘 사천의 주요업무는 쉬면서 힘을 기르는 것이다. 다만 쉰다는 것은 그저 구차하게 안전만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싹을 낳는 뿌리이다. 그리고 열심히 엄숙히 일을 해야 한다. 셋째, 사천의 인민을 구하기 위하여 정치를 엄격히 하고, 마약을 숙청한다; 이는 중정(장개석의 호)이 특별히 밝히고자 하는 바이니 우리 성의 군민들이 확실히 따르고 지켜야할 일이다.

 

군정사무가 바쁜 바람에 장개석은 1940년 11월 장군에게 사천성주석의 직을 넘긴다.

 

무한이 함락된 후, 전쟁의 포연은 사천의 대후방까지 확산된다. 1939년 5월 3일부터 4일까지, 일본군은 중경시에 계속 폭격을 한다. 중경시상업중심지, 인구가 가장 조밀한 주택지역, 내지 중립국의 영사관 및 외국인이 개설한 교회와 병원도 모두 일본군의 무자비한 포격을 당한다.

 

이번 공습에서 사상자는 1만명을 넘었다. 이번 대공습의 참혹한 경험에 기하여, 국민정부 지도자는 방공시설을 강화하고, 기관과 공장은 일률적으로 지하로 들어가거나 혹은 부근의 시골로 이전한다.

 

일본군은 일찌기 1940년 봄에 다시 한번 공습을 진행한 바 있다. 다만 이번 공습에서 수백톤의 폭탄이 지변건축물을 심각하게 파괴시켰지만, 지하에 있는 공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진 못한다.

 

일본군의 중경에 대한 가장 격렬한 공습은 1941년 8월말에 일어난다. 일본군은 수천의 군용기를 동원하여 150시간동안 폭격하고, 장개석의 황산관저는 심각하게 파괴된다.

 

적기의 연이은 폭격이 수시간동안 계속된 후 적기가 떠난 빈 틈에 장개석등은 방공동을 나와서 멀리 중경시가지를 쳐다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짙은 포탄연기뿐이었다. 2시간후, 적기는 다시 공습한다. 두번째 맹령할 포격이 이루어진 것이다. 황산관저는 그날 사상자를 조사하는데, 3명의 시위가 불행히도 순직했고, 또 몇 명이 부상을 입었다.

 

9월 1일 새벽 7시, 장개석은 시내 중경국민정부로 나가서 시찰한다. 그리고 포격으로 파괴된 교회의 부지에 임시 텐트들 치고, 예전과 동일하게 총리기념주를 거행한다. 장개석은 치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국민이 이런 위난을 당했고, 한번이 아니고 사년여가 되었다. 이로 인한 희생자 순직자는 이미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 일을 생각하면 비통하기 그지없다.

 

이 경력은 장개석으로 하여금 사천에 대하여 특별한 감정을 갖게 해주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항복을 한다. 장개석은 중경국민정부에서 승리대하고 가서 승리방송을 발표한다. 연도에는 승리를 환영하는 인파들이 물결을 이루었다.

 

그 후의 해방전쟁에서, 국민당 군병은 일패도지한다. 정권을 지킬 수 없는 운명을 피할 수가 없었다.

 

1949년 11월 14일, 장개석, 장경국 부자는 "중미호총통전용기"를 타고 중경으로 간다. 이는 장개석이 마지막으로 중경에 간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린 후, 장개석은 전용차를 타고 백시역공항과 시내지구의 사이에 있는 임원관저로 간다.

 

중경에서 2주간 머문 후, 장개석은 중경의 상황이 좋지 못하다고 보고, 임원관저에서 전용차를 타고 백시역공항으로 가서 중경을 떠나고자 한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는 패잔병과 난민이 가득했고, 여러 대의 군용차량이 도로에 가로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장개석의 전용차가 지나갈 수 없게 된다. 장개석은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려 걸어간다. 진흙투성이인 도로를 한참 걸어서야 다시 차에 오를 수 있었고, 공항까지 달려갈 수 있었다.

 

백시역공항에 도착한 후, 장개석은 잠시 중경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장개석 전용기 조종사인 의복은(衣復恩)의 회고에 따르면, 장개석 일행이 백시역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1월 29일 밤이었다. 장개석은 말한마디 하지 않고 전용기에 오른다. 비행기 안에 탄 후에 바로 잠이 든다. 수행원들은 장개석부자가 도착하면 바로 출발하려 했으나, 장개석의 기분이 극도로 좋지 않고, 아무런 분부도 없다보니, 아무도 그에게 가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때 수행원들이 소식을 듣는다. 공항에서 멀지 않은 강진(江津)에 이미 인민해방군부대가 활동하는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고축동(顧祝同)은 의복은에게 장개석에게 가서 지시를 받아오라고 한다.의복은은 조용히 전용기에 올랐다. 장개석의 방문을 두드리려는데, 장개석이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의복은은 즉시 장개석에게 보고한다. 현재 상황이 위급하니 빨리 출발해야겠습니다라고.

 

장개석은 아무런 표정없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좋다!" 의목은은 급히 비행기 엔진의 시동을 건다. 활주로에 서 있던 몇 대의 비행기는 모두 엔진을 켠다. 새벽녁에 장개석은 중경이라는 이 전시 배도(陪都)를 떠난다.

 

중경을 잃고, 장개석은 한가닥 희망을 안고 성도로 간다. 그가 성도에 도착하자마자 더 많은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전까지 40만대군을 이끌고 있던 호종남은 이미 서안에서 서창으로 패퇴했고, 송희렴은 악서(호북서부)와 천동(사천동부)를 지켜내지 못했고, 운남의 노한도 12월 9일 국민정부에 반기를 든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1949년 12월 10일, 장개석, 장경국은 10여명의 시위의 수행을 받고, 성도군관학교를 거쳐 봉황산으로 가는 좁은 길을 통해 공항으로 달려간다. 전용기가 떠난 후, 지상을 지키고 있던 헌병부대는 계속 패퇴한다. 장개석은 이렇게 대륙을 떠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