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현임 전국정협주석, 중앙정치국상위 위정성의 형은 위창성이며, 1985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위창성은 강청(江靑)의 첫번째 남편인 유계위(兪啓威, 위치웨이)의 큰아들이다. 유계위는 혁명연대에 황경(黃敬, 황징)이라는 가명을 썼고, 신중국성립후 초대 텐진시장을 지낸다.
문혁전인 1958년, 유계위는 중국에서 정치적 박해를 받아 죽었다. 위치웨이의 부인은 범근(范瑾, 판친)인데, 범근은 역사학자 범문란(范文瀾, 판원란)의 여동생이다. 범근은 문혁때, 강청에게 박해받아 자살한다.
위창성은 강생(康生)의 양자로 보내어진다. 강생은 원래 유계위와 산동의 동향사람이며, 혁명동지이고 친구였다.
문혁후, 유계위의 큰아들 위창성은 국가안전부 북미사(北美司)에서 일을 했다. 또 다른 일설에 따르면, 위창성은 안전부 판공청에서 안전부장 능운(凌雲, 링윈)의 비서를 지냈다고 한다. 한번은, 능운이 광동성 안전청에 갔다. 광동성 안전청의 관리는 능운에게 미국 국방부의 한 중공간첩의 상황에 대하여 보고했다. 원래, 규칙에 따르면, 이 보고는 안전부장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능운이 위창성은 신뢰할만하다고 하여, 결국, 위창성이 이때 미국 국방부의 내에 중공간첩이 한 명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중에, 북경 국가안전부로 돌아온 후, 위창성은 안전부장 사무실에 접근할 수 있던 기회를 틈타, 미국국방부의 그 중공간첩이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의 항공사와 시간을 알아내게 된다. 이 정보를 손에 넣으면, 미국국방부와 CIA는 쉽게 누가 중공간첩인지 알 수 있을 터였다.
위창성의 집안내력은 그로 하여금 일찌기 문혁때 중공과 공산독재제도에 대하여 실망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중공독제제도를 미워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중국과 미국의 수교이전에 미국이 베이징에 임시대표처를 설립했을 때, 미국의 공작으로 이미 미국측으로 돌아섰다고 한다.
위창성은 1985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미국국방부에 잠복하고 있던 중공간첩 김무태(金无怠, Larry Wu-Tai Chin)는 구속된다. 구속된 후, 김무태는 중공이 웨이징성(魏京生)을 석방하는 것을 교환조건으로 미국에 김무태의 석방을 요구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중공은 이 요구를 거절한다. 김무태는 구치소에서 자살한다.
이 사건은 중공정계에 영향을 끼쳤다. 안전부장 능운은 등소평에 의하여 면직된다. 정법위 서기 진비현(陳丕顯)도 면직된다. 진비현은 원래 호요방(胡耀邦, 후야오방)의 사람이었고, 공청단파의 인물이다. 원래 진비현은 호요방이 발탁하고 중용한 사람이었다.
위창성은 미국의 여러가지 금전적 대우와 보호를 받은 후 공중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중공이 그를 암살할 것을 두려워하여서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위창성은 미국에서 말년을 편하게 보내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위정성만이 위창성의 근황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유계위의 큰아버지, 즉 위창성과 위정성의 큰할아버지는 대만의 전 국방부장 유대유(兪大維)이다. 유대유는 장경국과 사돈간이다.
위창성은 최소한 문혁때 철저히 공산독재제도를 포기한다.
위정성은? 공산독재제도를 좋아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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