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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장97

원세개의 용인철학(用人哲學): 4종류의 인재를 중용한다. 글: 백가잡평(百家雜評) 근대사의 풍운인물로 원세개(袁世凱)는 논쟁의 대상이다. 사학자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정설이 없다. 그러나, 만일 용인의 각도에서 본다면, 원세개는 거의 일치하여 찬양받는다. 심지어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보다도 훨씬 높은 평가를 받는.. 2019. 1. 26.
청나라에서 불평등조약을 가장 많이 체결한 대신은 누구일까? 글: 이자지(李子遲) 불평등조약일람표 1. 1841년. 중영(中英) 광주화약(廣州和約) 670만냥백은, 여보순(余保純) 2. 1842년, 중영 남경조약(南京條約), 2100만냥백은, 기영(耆英), 이포리(伊布里) 3. 1843년, 중영 남경조약보충조항, 기영 4. 1843년, 중영 호문조약(虎門條約), 기영 5. 1844년, 중미(中美) .. 2019. 1. 21.
영년(英年): 서태후가 총애한 풍수가 글: 포강객(浦江客) 광서24년(1898) 팔월 초엿새, 서태후는 정변을 일으켜, 변법을 시행하는 광서제는 영대(瀛臺)에 연금하고, 훈정(訓政)이라는 명목으로 최고권력을 다시 장악한다. 기실 1년전에, 대권을 놓칠까 우려하던 서태후는 이미 광서에제게 손을 쓴 바 있다. 그것은 바로 칠왕분(七.. 2019. 1. 20.
중국최초의 "국가(國歌)"는? 글: 한정우기(閑情偶記) 1997년 7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은 홍콩에 대한 주권을 회복했다. 홍콩회귀행사때, 이런 장면이 있었다. 0시이전 5분간 악단이 연주한 곡은 <말리와(茉莉花)>였다. 0시정각이 되자, 위풍당당한 <중화인민공화국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이 연주되었다. <.. 2019. 1. 10.
고대의 시호(諡號)제도와 규칙 글: 배주품역사(杯酒品歷史) 중국에 이런 말이 있다: 개관정론(蓋棺定論)! 관두껑을 닫고나서 결론을 내린다. 그 의미는 한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 대한 시비공과는 그가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황제와 문무대신이 죽은 후에 조정은 그들에게 시호를 내린다. 1개의 글자로서 그의 일생을 개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호가 그냥 간단한 글자 1자는 아니다. 그 안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통상 황제의 시호와 묘호는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청나라의 강희(康熙)황제는 우리가 그를 성조인황제(聖祖仁皇帝)라고 부른다. '성조'는 묘호(廟號)이고, '인(仁)'은 시호(諡號)이다. 황제에게 묘호를 올릴 때는 불문율이 있다. 조(祖)는 공(功)이 있어야 하고, 종(宗)은 덕(德).. 2019. 1. 8.
청왕조가 무너질 때 전국의 9대총독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글: 용가독사(勇哥讀史) 청나라때 조정은 1개성 혹은 2,3개성의 군사, 행정대권을 통할하는 지방관리를 두었다. 즉 총독이다. 조정은 모두 9대총독을 설치하였는데, 각각 동삼성총독(東三省總督), 직예총독(直隸總督), 양강총독(兩江總督), 양광총독(兩廣總督), 민절총독(閩浙總督), 호광총.. 2018. 12. 12.
중국이 미중무역전에서 굴복한 이유는...? 글: 문무(文武) 중국은 반년전에 미국과 무역전을 시작한 초기 계속하여 미국과 끝까지 싸우며 절대로 양보하지 않고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고 소리높였다. 그러나, 반년여의 시간이 흐른 후 중국은 자신의 말을 스스로 뒤집고 양보했고, 굴복했으며, 투항했다. 그 원인을 따져보년 이거.. 2018. 12. 6.
청일전쟁 직전에 청과 일본은 서로를 어떻게 보았는가? 글: 정만군(程萬軍) 1894년 봄여름이 교차하는 시기에,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인데, 대청국에서는 한 목소리로 '싸우자'고 외치고 있었다. 다만, 청정부는 제대로된 정보가 없었다. 그들은 일본의 군사력이 어떤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인식에서 혼란이 있을 정도였다. 전쟁전에 중국내.. 2018. 12. 5.
양면인물 유석홍(劉錫鴻): 군주제가 만들어낸 비극 글: 연비(燕飛) 이 편은 <유학자 곽숭도는 왜 매국노라 불리웠을까?>이 자매편이다. 그 글에서는 곽숭도를 썼고, 이 글에서는 유석홍을 쓴다. 곽숭도에 대한 글을 읽어본 사람들이면 유석홍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아직 읽어보짐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먼저 곽숭도에 관한 글에서 유석.. 2018. 12. 4.
명망청흥(明亡淸興) (3): 견딜 수 없는 아픔 당시 자본주의가 발전한 외국인이 보기에, 명나라는 아주 특이한 나라였다. 한편으로 대명제국은 돈이 모자라지는 않는 듯했다. 황인우(黃仁宇) 선생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전체 명나라276년동안의 동전주조수량은 북송에서 2년에 주조했던 수량이다. 그러므로 명나라경제는 쇠락했다.. 2018. 8.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