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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청왕조가 무너질 때 전국의 9대총독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by 중은우시 2018. 12. 12.

글: 용가독사(勇哥讀史)


청나라때 조정은 1개성 혹은 2,3개성의 군사, 행정대권을 통할하는 지방관리를 두었다. 즉 총독이다. 조정은 모두 9대총독을 설치하였는데, 각각 동삼성총독(東三省總督), 직예총독(直隸總督), 양강총독(兩江總督), 양광총독(兩廣總督), 민절총독(閩浙總督), 호광총독(湖廣總督), 섬감총독(陝甘總督), 사천총독(四川總督), 운귀총독(雲貴總督)이 그것이다.


1912년 2월 12일, 청왕조는 신해혁명의 타격하에 와해된다. 이때 구대총독은 각각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동삼성총독 조이손(趙爾巽)


전국구대총독중에서 동삼성총독은 가장 늦게 설치되었다(1906년). 그러나 지위는 가장 높았고, 강신지수(疆臣之首)라고 불리웠다. 이는 동삼성이 만주족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용흥지지(龍興之地)'인 것이다. 이곳에서 총독을 맡는다는 것은 지위가 자연히 남다르게 된다.


마지막 동삼성총독은 조이손이다. 나중에 <청사고>를 편찬한 바로 그 사람이다. 조이손은 호남순무, 호부상서, 성경장군, 호광총독, 사천총독등의 직위를 지냈고, 1911년에 동삼성총독이 되었다.


그때 무창의거가 일어나고, 전국각지의 혁명당원들이 열렬히 호응하였다. 봉천성이 혁명당인들도 시간을 약속하여 의거를 일으키기로 했다. 조이손은 시국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여전히 '보경안민(保境安民)'을 명목으로 군대를 소집하여 진압한다. 이렇게 시류를 역행하는 행위로 그는 일생에 오점을 남긴다. "조이손은 병력을 보내어 진압했다. 매일 수색하여 죽이는데, 군대가 이르는 곳에는 화가 부녀자에 미쳤고 비인간적인 짓을 저릴렀다. 당시 공화에 찬성했지만, 실은 민군의 공적이다."


직예총독 장진방(張鎭芳)


직예총독의 관할범위는 경기의 요지인 직예성이다. 그의 중요성은 다른 일반적인 총독과 비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예총독이라는 자리는 수많은 유명인물들이 거쳐간다. 예를 들어, 증국번, 이홍장등이다.


마지막 직에총독은 장진방이다. 그는 하남 항성 사람이고, 1892년에 진사가 되어 계속 북경에서 관직을 지냈다. 그는 아주 잘나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실의에 빠지지도 않았다. 1900년 서태후, 광서제를 따라 서안으로 피난가면서 관운이 형통해진다. 1912년 2월 2일, 장진방은 호남제법사(湖南提法使)로 서리직예총독(署理直隸總督)이 된다. 그러나 서리로 겨우 10일간 지내고나서 청황제가 퇴위를 선포한다. 장진방도 황급히 직예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양강총독 장훈(張勛)


양강총독은 강남, 강서의 두 성의 군정을 관할한다. 청나라때 강남성은 강소, 안휘 두 성을 합친 것이고, 지금의 상해시도 관할한다. 이 일대는 자고이래로 번화하고 부유한 곳이다. 대청왕조의 세금을 가장 많이 거두는 곳이다. 그래서 양강총독을 맡는다는 것은 청왕조의 '돈주머니'를 관장하는 것이 된다.


마지막 양강총독은 장훈이다. 그는 강서성 봉신현 사람이고, 1884년에 청군에 입대한다. 청불전쟁, 청일전쟁에 참가한 적이 있다.  1901년 경성으로 가서 여러번 서태후, 광서제의 호종(扈從)을 맡는다. 1909년에는 강남제독이 된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한 후, 양강총독 장인준(張人駿)이 업무태만으로 청나라조정에 의하여 파직된다. 그후 청나라조정은 황급히 장훈을 강소순무 겸 서리양강총독(署理兩江總督), 남양통상대신(南洋通商大臣)에 안진다. 장훈이 비록 전력을 다하여 혁명군을 진압하였지만, 청나라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양광총독 장명기(張鳴岐)


양광총독은 광동과 광서 두 성의 군민정무를 통할한다.


마지막 양광총독은 장명기이다. 그는 산동 무체(無棣) 사람이며, 양광학무(兩廣學務), 영무처(營武處), 광서포정사, 광서순무등의 직위를 지냈다. 1910년, 장명기는 큰 돈을 써서 당시 뇌물을 받기로 유명한 경친왕(慶親王) 혁광(奕劻)에게 주고 서리양광총독의 자리를 얻는다. 1911년 4월 12일, 광주의거가 발발하자, 장명기는 청군을 지휘하여 진압한다. 그리고 친히 명을 내려 임각민(林覺民), 유운기(喩雲紀)등 43명의 혁명지사를 살해한다. 무창의거가 발발한 후, 장명기는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광동독립을 선언한다. 그 후 장명기는 몰래 광주를 빠져나가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간다.


민절총독 송수(松壽)


민절총독은 복건, 절강, 대만의 3성의 군민정무를 통할한다.


마지막 민절총독은 송수이다. 송수는 만주 정백기 사람으로 1907년, 송수는 차하르도통(察哈爾都統)에서 민절총독이 된다. 1911년 무창의거가 발발한 후, 복건신군은 복주에서 혁명의거를 일으키고자 한다. 의거 전날, 복건 자의국(諮議局)은 송수에게 권력을 내놓을 것을 권유하여, 평화롭게 인수인계되며 유혈충돌을 피하자고 한다. 그러나 송수는 결연히 거절하며 완강하게 버틸 생각을 한다. 복건신군은 그 자리에서 의거를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송수는 팔기병을 조직하여 저항한다. 하루밤의 격전을 거친 후, 복건신군이 팔기병을 격패시키고, 송수는 자살한다. 그는 망해가는 청왕조를 위해 순장된 것이다.


호광총독 서징(瑞澄)


호광총독은 호북과 호남의 군민정무를 통할한다.


마지막 호광총독은 서징이다. 서징은 만주 정황기 사람이다. 소년시대에는 놀기좋아하는 경성이 유명한 환고자제(紈絝子弟)였다. 나중에 공생으로 관직에 나간다. 1910년, 서징은 호광총독이 된다. 1911년, 사천의 '보로운동(保路運動)'이 발발하고, 서징은 호북의 군대를 사천으로 파견한다. 그리하여 호북이 텅 비게 된다. 10월 9일, 서징은 혁명당인의 명단을 수색해서 찾아낸다. 호북포정사 진수병(陳樹屛)은 이 명단을 없애서 민심을 안정시키자고 건의한다. 독부사야(督府師爺)인 장매생(張梅生)은 명단에 있는 사람을 체포하자고 건의한다. 서징은 후자의 건의를 받아들여, 3명의 혁명당을 체포하여죽인다. 그리하여 무창의거가 일어나게 된다. 서징은 어쩔 수 없이, 무창을 빠져나가 일본으로 도망친다.


섬감총독 장경(長庚)


섬감총독은 섬서 감숙과 이리(伊犁)의 3개성의 군민정무를 관할했다.


마지막 섬감총독은 장경이다. 그는 만주 정황기 사람으로 이리부도통(伊犁副都統), 주장대신(駐藏大臣), 성도장군(成都將軍), 병부상서, 이리장군등의 직위를 지냈고, 1909년 섬감총독이 된다. 2년후, 무창의거가 발발하고, 서안혁명당인이 적극 호응한다. 1912년 2월 12일 청황제가 퇴위한 후, 장경은 총독대인을 감숙포정사 조유희(趙惟熙)에게 넘긴 후 도망친다.


사천총독 조이풍(趙爾豊)


사천총독은 사천성의 군민정무를 통할한다.


마지막 사천총독은 조이풍이다. 조이풍은 마지막 동삼성총독 조이손의 동생이다. 그는 일찌기 사천의 군대를 이끌고 서장으로 들어가 반군을 격퇴한 바 있다. 1911년, 조이풍의 형이자 사천총독인 조이손이 동삼성총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조이풍이 사천총독에 임명된다. 그러나, 부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천에서 보로운동이 일어나고 조이풍은 군대를 동원해서 탄압한다. 이로 인하여 일련의 연쇄반응이 나타나서 결국 신해혁명을 초래한다. 조이풍은 사천총독의 직에서 파직되고, 다시 혁명군에 참수시중(斬首示衆)된다.


운귀총독 이경희(李經羲)


운귀총독은 운남, 귀주 두 성의 군민정무를 총괄한다.


마지막 운귀총독은 이경희이다. 이경희는 이홍장의 조카이다. 1909년 2월, 운귀총독으로 승진한다. 청나라의 구대총독중에서 이경희는 비교적 개명한 인물이다. 그가 만든 운남육군강무당은 많은 군사인재를 양성한다. 당시 운남혁명당인은 활동이 빈번했고, 심지어 혁명당인 채악(蔡鍔)이 경제적 곤란을 겪자, 그가 주머니를 털어 500은원을 보태주었다. 운남신군이 의거를 일으킬 때, 이경희를 붙잡아 그에게 '반정(反正)'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조정이 관리로서 어찌 이하범상(以下犯上)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혁명당인의 요구에 따라, 운남몽자총병에게 서신을 보내 투항을 권유하기도 했다.


나중에 이경희는 혁명당인에 의하여 "예송출결(禮送出境)"된다. 안전하게 외지로 내보내 진 것이다. 그러나 도중에 호시(滬市)기차역을 지날 때는 혁명군에 의해 강제로 변발이 잘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