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화/중국의 음악

중국최초의 "국가(國歌)"는?

by 중은우시 2019. 1. 10.

글: 한정우기(閑情偶記)


1997년 7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은 홍콩에 대한 주권을 회복했다. 홍콩회귀행사때, 이런 장면이 있었다. 0시이전 5분간 악단이 연주한 곡은 <말리와(茉莉花)>였다. 0시정각이 되자, 위풍당당한 <중화인민공화국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이 연주되었다.



<말리화>는 <호일타말리화(好一朵茉莉花>라고도 불린다. 이 곡은 강소민가(江蘇民歌)이고, 양주시(揚州時)의 시가(市歌)이기도 하다. 유네스코가 추천한 세계우수가곡중 하나이다. 장엄한 행사에서 왜 <말리화>가 연주되었을까?


영국이 홍콩에 대한 식민통치를 한 것은 제1차아편전쟁기간이다. 1842년, <남경조약>으로 홍콩섬이 영국에 할양된다; 1860년 <북경조약>으로 구룡반도도 할양된다; 1898년에는 <전탁홍콩계지전조>로 조차 방식으로 신계지역을 99년간 넘겨주게 된다.


1898년 6월 9일, 이홍장(李鴻章), 허응규(許應騤)는 영국공사 맥도날드와 북경에서 <전탁홍콩계지전조>를 체결한다. 국제관례에 따라, 조약체결시 양국의 국가를 연주하여야 한다. 다만 당시의 대청국은 아직 국가가 없었다. 이홍장은 사람을 시켜 중국의 유명한 곡을 고른다. 이것이 바로 <말리화>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리화>가 중국최초의 <국가>라고 알고 있다. 최소한 최초의 <대국가(代國歌)>라고 여긴다.


기실, 이건 정확하지 않다. <전탁홍콩계지전조>는 1898년에 체결되었다. 그런데, 그 이전인 1876년 9월 13일, 이홍장은 대청국을 대표하여 토마스 프랜시스 웨이드(Thomas Francis Wade)와 <중영연태조약>을 체결한다. 체결식에서 중국은 마찬가지로 <국가>가 없어서, 이홍장이 선정했던 곡은 <말리화>가 아니라 <소도희(小刀戱)>였다. 그래서 중국최초의 국가 혹은 대국가는 <소도희>라고 해야 한다.


그럼 <소도희>는 무엇인가? 왜 아는 사람이 이렇게 적은가?


<소도희>는 <소도희(小倒戱)>라고도 부르고, <도칠희(倒七戱)>라고도 부른다. 청나라말기에 안휘 회하이남, 장강이북지역에서 유행한 지방희(地方戱)이다. 곡조는 청신박실(淸新朴實), 우미동청(優美動聽)하여 군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해방후에 이 극은 "여극(廬劇)"이라고 명명된다. 


이홍장이 왜 가장 먼저 <소도희>를 대국가로 선정했을까? 기실 아주 간단하다. 이홍장의 고향은 안휘성 여주부(廬州府) 합비현(合肥縣) 동향(東鄕)이다. <소도희>는 바로 그의 고향에서 불리던 희극이다. 평상시에 이홍장은 희극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급한 상황하에서 이홍장이 먼저 떠올린 것은 바로 고향의 지방희일 것이다.


청나라때 여주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다. 합비는 더더욱 작은 현성이었다. 당시의 안휘성의 성회는 안경(安慶)이다. 그래서 이홍장때문에 전세계는 합비의 민간소조(民間小調)>를 알게 된 것이다.


다만, <소도희>라는 이름은 듣기에 그다지 편하지가 않다. 강소와 안휘는 청나라초기에 1개의 성이었다. 모두 강남성(江南省)에 속했다. 나중에 나뉘어서 두 개의 성으로 된 것이다. 그래서 이홍장은 강소민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리화>도 이홍장이 가져와서 <소도희>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중영연태조약에서 <소도희>를 사용한 후, 이홍장은 그 후에 출석한 외교행사때 <소도희>와 <말리화>를 모두 '대국가'로 쓴 바 있다.


광서22년(1896년) 이홍장이 서유럽과 러시아를 방문할 때, 환영식에서 연주한 중국국가는 여전히 <소도희>였다. 다만 가사는 왕건(王建)의 칠언절구로 바꾼다.


금전당두자각중(金殿當頭紫閣重)

선인장상옥부용(仙人掌上玉芙蓉)

태평천자조천일(太平天子朝天日)

오색운거가육룡(五色雲車駕六龍)


청나라정부는 정식으로 비준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대청국의 대국가였고, 그래서 그것을 <이중당악(李中堂樂)>이라 불린다.


정식국가가 없었으므로, 외교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다른 외교인사들이 사용한 '대국가'는 어떤 때는 <소도희> 혹은 <말리화>가 아니었다. 증국번(曾國藩)의 차남 증기택(曾紀澤)이 대청의 주영대사로 있을 때, 일찌기 <보천악(普天樂)>을 '국가'로 쓴 바 있다. 그러나, <보천악>도 대청국의 국가로 비준되지는 못한다.


선통3년 팔월 십삼일(1911년 10월 4일), 선탱제는 내각에 유지를 내려 국악(國樂)을 정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역사상 최초의 법정 국가이다. 황실구성원 부동(傅侗)이 곡을 만들고, 저명한 사상가 엄복(嚴復)이 작사한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공금구(鞏金甌), 승천주(承天幬),

민물흔부조(民物欣鳧藻)

희동포(喜同袍), 청시행조(淸時幸遭)

진희호(眞熙皞), 제국창궁보(帝國蒼穹保)

천고고(天高高), 해도도(海滔滔)





대청국의 국가 <공금구>가 반포된 후 1주일만에 무창의거가 일어난다. 그리하여 가장 단명한 국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