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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장97

중국은 전랑외교로 한국을 다시 잃었다. 글: 황포강봉(黃浦江封) 국제사회가 블링컨의 방중을 주목하고 있을 때, 한중관계는 사상유례없이 긴장되며, 외교전이 양국간에 전개되고 있어서, 마치 1895년이전의 한반도의 국면의 재연되는 것같다. 중국은 한국을 잃는 외교적 실패에 직면했을 뿐아니라, 이 실패는 아마도 청일전쟁과 같은 시스템적인 실패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중국의 옛날 대조선외교의 실패는 1882년 조선의 임오군란때부터 시작한다. 이홍장(李鴻章)의 심복인 마건충(馬建忠)은 임오군란후에 조선에 사신으로 간다. 주요목적은 조선과 일본의 결맹을 막는 것이었다. 다만, 설사 그가 친일적인 대원군을 성공적으로 납치하고, 친중의 민비를 내세웠으며, 원세개(袁世凱)가 1885년 한성에 주둔하며, 이홍장이 영국, 러시아, 미국등의 세력을 빌어 일본을 막.. 2023. 6. 19.
미중관계의 기원과 영향 (2) 글: 모해건(茅海建) 3. 유미학동(留美學童)과 배화법안(排華法案) 1844년 미중간에 이 체결될 때, 중국의 인구는 이미 4억에 이르렀고, 해외상업활동과 이민이 일찌감치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로 동남아였다. 미국상선은 서해안에서 중국으로 오는데 항해시간이 50여일이 걸렸다. 두 나라국민은 서로를 잘 알지 못했다. 십년후인 1854년, 용굉(容閎)이 미국예일대학을 졸업하고 학사학위(B.A.)를 받는다. 용굉은 마카오와 홍콩에서 서양식교육을 받았고, 미국에서 7년간 공부했다. 최초로 미국대학을 졸업한 이 중국인이 귀국했을 때, 그의 미국에서 배운 지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내심 고독을 느낀다. 그는 여러가지 성공적이지 못한 직업을 전전한 후에, 청나라를 도와 미국에서 물품을 수입.. 2023. 5. 2.
정여창(丁汝昌): 태평천국의 장수에서 북양수군의 제독까지... 글: 김왜취담(金娃趣談) 1861년 이월, 정여창은 정학계(程學啓)를 따라 안경성(安慶城)을 오랫동안 포위공격하고 있던 상군(湘軍)에 투항한다. 이로써 그는 7년간에 걸친 태평군의 생애를 마감하고, 증국번(曾國藩)이 조직한 상군의 일원이 된다. 이때, 정여창은 겨우 25,6세의 나이였고, 정학계가 이끄는 여러 심복장수들 중에서 그다지 두드러진 인물도 아니었다. 아무도 그가 나중에 중요한 직위인 북양수군의 제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정여창과 비교하자면, 정학계야말로 증국번형제가 가장 회유하고 싶어했던 태평군의 지휘관이었다. 상군이 안경을 포위공격할 때, 정학계가 군대를 이끌고 분전하며 저항하였기 때문에 공성전은 계속 실패했다. 오랫동안 싸우면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여 증국번 형제는 고민이 컸다... 2023. 2. 2.
이홍장(李鴻章)의 부모 이야기: 오누이간의 결혼 글: 동감역사(動鑒歷史) 청나라말기, 안휘(安徽) 합비(合肥)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현지에 수재(秀才, 과거시험을 공부하는 학생의 통칭)가 있는데, 이름이 이전제(李殿弟)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고, 과거에 합격하여 공명을 세울 뜻을 가졌다. 그러나, 시운이 맞지 않아서인지 여러 해동안 준비했지만, 두번이나 모두 낙방하고 만다. 그러자, 이전제는 스스로 맹세를 한다: 이번 생에 절대로 다시는 과거시험을 치지 않겠다. 시험장에 들어가지 않겠다. 그때부터 이전제는 집에서 농사일에 전념하고, 아이들의 공부에 신경을 쓴다. 하루는 이전제가 밭에서 일을 할 때, 온몸에 붉은 반점이 난 여자아이를 발견하게 된다. 이때 이전제는 자신이 이전에 읽은 의학서적의 지식을 가지고 판단해보니, 이 여자아이는 분명 천.. 2023. 1. 26.
북양육진(北洋六鎭)의 연혁과 최후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갑오년 청일전쟁이후인 1895년, 청나라정부는 광서안찰서(廣西按察使) 호율분(胡燏棻)이 천진에서 신군(新軍)을 편성훈련시킨다. 11월에는 조선에서 돌아오고 같은 회군계(淮軍係, 이홍장계열)인 원세개(袁世凱)가 호율분을 대체한다. 1897년 원세개는 직예안찰사(直隸按察使)로 승진하고, 신군은 무위우군공위경사(武衛右軍拱衛京師)로 개편된다; 1899년 겨울 무위군은 원세개가 산동순무(山東巡撫)로 가면서 따라간다. 1901년 11월 원세개는 이홍장의 뒤를 이어 서리직예총독(署理直隸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이 된다. 1904년 원세개는 왕영해(王英楷), 오장순(吳長純), 단기서(段祺瑞)의 3진(鎭)을 북양상비군(北洋常備軍)으로 건립하고, 무위우군은 제4진, 제5진으로 확대개.. 2023. 1. 25.
"정무기황(丁戊奇荒)": 양무파(洋務派)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다. 글: 자귤(紫橘) 청나라말기 열강이 침입하면서, 중국내부에서도 자강을 도모하는 양무운동이 일어난다. 1870년대 섬서, 산서, 산동, 하남, 직예등 지역에 큰 가뭄이 발생하여, 양무운동이 전기의 백화제방(百花齊放)이 후기의 만마제암(萬馬齊暗)으로 전환하는 분수령이 된다. 조정내부의 진재파(賑災派, 재난구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파)는 양무파(洋務派, 서양을 본받아 산업을 건설해야 한다는 일파)의 경비에 눈독을 들이게 되고, 양무운동은 천재지변의 압력하에 자금상 곤란이 발생하게 되어 양무운동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정무기황을 전환점으로 하여, 양무운동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결국 갑오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귀결된다. 1. 1870년대전기: 이홍장(李鴻章)의 양무운동이 흥성했다. 양무운동은 제2차아.. 2022. 10. 27.
중국은 왜 일본보다 자체 은행설립이 20년이나 늦어졌을까? 글: 건안(建顔) 1897년, 중국근대 최초의 중국계자본은행인 통상은행(通商銀行)이 정식 설립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최초 일본계자본은행인 미쓰이은행(三井銀行)은 1876년에 일찌감치 설립되어 있었다. 중국은 일본보다 20년이 늦은 것이다. 중국최초의 중앙은행인 호부은행(戶部銀行)의 설립도 일본에 비하여 20년이 늦었다. 기실 일찌기 1885년에 이홍장(李鴻章)과 순친왕(醇親王)의 두 거물이 손을 잡고 두 차례에 걸쳐 조정에 근대은행설립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후세에 보기에 국가와 민족에 이로운 이 건의는 일군의 '애국자'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다. 설마 은행을 설립하는 것이 비애국적이란 말인가? 1. 두 거물이 관영은행의 설립을 주장하다. 1860년대, 서방의 공업문명이 동아시아로 물밀듯이 밀려.. 2022. 8. 22.
하나의 민족에게 최대의 비애는 무지(無知)가 아니라, 무지를 자랑이라 여기는 것이다. 글: 뇌이(雷頤) 역사는 사악한 선생이다. 단지 자유인에게만 진상을 말해주어서, 오직 자유인만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자격과 능력이 있다. 서방을 배우는 학습과정에서, 근대 중국인들은 시종 진정한 문제를 찾지 못했다. 소위 남원북철(南轅北轍)이다. 방향이 틀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헛일인 것이었다. 이하지방(夷夏之防) 아편전쟁때, 임칙서(林則徐)는 광동으로 가서 방어를 했다. 다만 그는 영국인을 전혀 몰랐고, 적의 상황에 대하여도 전혀 몰랐다. 당시 서양인은 무릎을 굽힐 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을 누가 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모두 그렇다고 믿었다. 그래서 임칙서도 믿었다. 일찌기 외국사신이 건륭제를 만날 때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중국인들은 그들이 무릎을 꿇기 원치 않는 것이.. 2022. 1. 8.
성은이(盛恩頤): 민국제일패가자(民國第一敗家子)는 어떻게 패가망신하였는가? 작자: 미상 청말의 최고부자는 성선회(盛宣懷)이다. 그는 청나라말기의 관료이자 수재출신으로 양무파의 대표인물이다. 저명한 정치가, 기업가이며 자선가이다. 그리하여, "중국실업의 아버지" "중국상부(中國商父)", "중국고등교육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사람들이 즐겨 얘기하는 내용은 그가 호설암(胡雪巖)과 싸워서 이긴 것이다. 기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그는 패가자를 하나 낳았다. 그것도 민국최대의 패가자를 그 패가망신한 아들의 이름은 성은이이다. 그는 당시 총리 손보기(孫寶琦)의 딸과 결혼한다. 그러나 그는 도박에 탐닉하고, 호화사치하게 살아 하룻밤에 100채의 집을 날린 바 있다. 말년에는 더더욱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소주 유원(留園)은 성선회가 아들에게 준 개인주택이었다. 청나라말기,.. 2021. 12. 25.
청일전쟁중 평양전투에서의 패배는 "탄진양절(彈盡糧絶)"때문일까? 글: 염극비(廉克飛) 좌보귀(左寶貴)는 평양에서 전사하여 역사에 영명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평양전투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가 전사한 후, 섭지초(葉志超)는 부대를 이끌고 5백리를 미친 듯이 도망쳐 중국내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섭지초는 역사에 오명을 남긴다. 백년동안 여론의 비판은 주로 그를 향했고, 섭지초가 담량이 적고 멍청하여 평양전투에서 대패하게 된 것이라고들 말한다. 필자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이 사건을 평가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필자가 쓰는 것은 무슨 예술적인 문학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인이라면 좌보귀와 섭지초를 대비하여 평가하면서 하나는 흑, 하나는 백, 하나는 용사, 하나는 겁쟁이로 그릴 것이다. 무대에 올리는 희극이나 소설이라면 그렇게 .. 2021. 7.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