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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미중관계의 기원과 영향 (2)

by 중은우시 2023. 5. 2.

글: 모해건(茅海建)

 

3. 유미학동(留美學童)과 배화법안(排華法案)

 

1844년 미중간에 <망하조약>이 체결될 때, 중국의 인구는 이미 4억에 이르렀고, 해외상업활동과 이민이 일찌감치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로 동남아였다. 미국상선은 서해안에서 중국으로 오는데 항해시간이 50여일이 걸렸다. 두 나라국민은 서로를 잘 알지 못했다.

 

십년후인 1854년, 용굉(容閎)이 미국예일대학을 졸업하고 학사학위(B.A.)를 받는다. 용굉은 마카오와 홍콩에서 서양식교육을 받았고, 미국에서 7년간 공부했다. 최초로 미국대학을 졸업한 이 중국인이 귀국했을 때, 그의 미국에서 배운 지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내심 고독을 느낀다. 그는 여러가지 성공적이지 못한 직업을 전전한 후에, 청나라를 도와 미국에서 물품을 수입하는 업무를 도와주다가 하급관직을 맡게 된다. 용굉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는 당시 권세있던 지방관리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을 설득하여 미국으로 유학생을 보내게 한 것이다. 

 

유미학동계획은 1872년부터 실행된다. 제1차로 30명을 보낸다. 그후 1875년까지 모두 4차례 합계 120명을 보낸다. 이 계획에 따르면, 이들의 평균연령은 12세를 조금 넘으며, 미국가정에서 영어를 배우고, 그후 미국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문과, 이과, 공과, 군사학과등의 대학을 졸업한다. 이는 당시의 아시아에서 중대하면서도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계획이었다. 만일 이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이들 학동의 전문지식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미국에 대한 인식도 당시의 중국에서 큰 쓸모가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미국에 대한 인식을 아마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 계획이 진행된지 9년째 되는 해인 1881년, 이들 학동들은 청나라조정에 의해 모조리 귀국당한다. 많은 학동들은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당시 이들을 불러들인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이들 학동들이 이미 미국화되었다. 집권자들은 그들이 장래 중국의 정치 및 전통문화와 부딛칠 것을 우려했다. 둘째, 미국은 당시 그들이 육군학교, 해군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불허했다. 그리고 미국군사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셋째, 미국의 <배화법안>으로 인하여 미중관계가 긴장되었다.

 

병이 들어 미리 귀국하거나, 귀국을 거부한 자를 빼고 유미학동중 모두 97명이 귀국했다. 그들이 상해로 돌아왔을 때 꽃다발을 받는 성대한 환영행사는 당연히 없었고, 오히려 아주 무서운 대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의 중국은 이들의 유학경력을 전혀 중시하지 않았다. 아무도 미국의 지식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옛날 용굉의 처지를 그대로 반복하게 된다. 비록 이들 학동들이 20여년후에 대부분 중국의 정치, 외교, 공정, 광업, 군사등 분야에서 중요인물이 되지만, 역사의 각도에서 관찰해보면, 이는 그저 그들 개인의 성공일 뿐이지, 전체 국가의 성공은 아니다. 국가의 운명은 이들 유미학동의 귀국으로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 인민도 그들로 인하여 미국에 대한 지식을 대량으로 획득하지 못했다. 그들이 귀국한 초기 10년동안 마치 사라진 것처럼 조용했다. 물을 모래에 부운 것처럼.

 

용굉과 유미학동의 운명은 당시 중국내부의 정치와 사회적인 여러 요소때문이었다.

 

이와 동시에, 미국내부의 정치와 사회적인 요소로 인하여 <배화법안>이 나오게 된다.

 

비록 <망하조약>등 조약을 기초로 미중의 양국관계는 일종의 불평등관계였지만, 미국의 대중정책은 당시의 영국, 프랑스, 러시아등의 국가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1867년, 미국의 주중공사 Anson Burlingame(중국명 蒲安臣)은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다. 여러 요소로 인하여 아주 재미있게도, 퇴임한 이 미국외교관은 청나라에서 최초로 세계각국에 정식으로 파견하는 외교사절이 된다. Burlingame은 청나라정부대표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한다. 그후 유럽을 방문한다. 2년의 기간동안. 마지막으로 그 본인은 1870년 2월 러시아에서 사망한다. 1868년 7월, 이 청나라정부의 대표이자 전 미국의 주중공사인 Burlingame은 그의 예전 상사인 미국의 국무장관 Willhan Seward(중국명 西華德)과 하나의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나중에 <Burlingame Treaty(蒲安臣條約)>으로 불리게 되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규정되어 있었다: 중국인은 자유롭게 미국을 출입할 수 있다. 미국에서 미국이 다른 기타 외국인을 대우하는 최혜국대우를 누릴 수 있다. 미국인은 일찌감치 중국에서 이러한 대우를 누리고 있었다.

 

Burlingame Treaty를 체결할 때, 내전후의 미국은 서부개발로 인하여 대량의 노동력이 필요했었다. 미국의 동서를 관통하는 철도건설에 1만명이 넘는 중국인노동자를 모집한다. 수천의 중국이민이 미국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합법적이고 법을 지키면서 급여가 낮은 여러 업종에 종사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경제에 위기가 나타나자, 실업한 많은 유럽계 이민들(주로 이탈리아계미국인과 아일랜드계미국인들)이 중국이민이 자신들의 파이를 빼앗아간다고 여기게 된다. 근면하고 절약하는 것이 동방에서는 미덕이지만, 당시 일부 미국정치가들이 보기에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었다. 중국이민자가 미국에서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은 더욱 적은 급여로 더 많은 일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1880년, 청나라는 미국의 압력하에 새로운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미국이 새로 미국으로 오는 중국계노동자의 연한과 인원수를 규정하여 미국에 진입하는 것을 저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외에 통상, 학습, 관광등의 인사 및 이미 미국에 살고 있는 중국계노동자는 이 제한을 받지 않고, 최혜국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1882년, 미국의회는 <배화법안(The Chinese Exclusion Act)>를 통과시키고, 모든 중국계노동자의 입국을 10년간 '잠정정지'한다. 그리고 중국인의 유학, 여행에 대하여도 극히 엄격한 규정을 둔다. 미국의 여하한 주도 중국인의 국적취득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는 인종차별법안이다. 1884년, 1888년, 1892년, 1893년, 미국의회는 계속하여 새로운 <배화법안>을 통과시킨다. 중국계노동자뿐아니라, 거의 모든 중국인들이 미국에 입국하는데 더욱 엄격한 제한을 받게 된다. 1880년 미중조약규정은 이미 완전히 파괴되었다. 1898년 미국은 하와이를 병합하고, 배화법안은 하와이에까지 적용된다. 1902년, 미국은 배화법안을 무기한 연장한다.

 

이 기간동안, 미국의 화교들은 미국인종주의자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는다. 폭력사건도 빈발했다. 1885년 미국 와이오밍주 Rock Spring의 백인광산노동자들이 급여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한다. 현지 중국계노동자들은 파업참여를 거부한다. 일부 백인광산노동자들은 중국계노동자들의 거주지역을 습격했고, 중국계노동자들은 28명이 사망하고, 15명이 중상을 입으며 재산손실이 약 15만달러에 이르렀다. 사건발생후 체포되었던 혐의자들은 모두 풀려난다. 이유는 "어떤 백인도 당시 명확하게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각지역의 폭력사건외에, 미국에 들어온 중국인들도 각각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 감금된 조건하에서 '감별'을 진행한다. 이 '감별'업무는 수개월에 달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국가인데, 이 국가에서 중국인들은 인종차별을 받았다. 이런 배경하에서, 중국인이 어떻게 느꼈을 것인지는 충분히 예상이 간다. 한편으로 미국의 성취에 찬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1905년, 미국의 배화폭력으로 인하여, 중국의 상해, 천진에서도 미국제품불매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194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미국은 배화법안을 폐지한다.

 

4. 대항과정에서의 상호이용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국은 이미 서방세계의 최강국이 된다. 1921년-1922년 워싱턴회의에서, 미국등 국가는 일본의 확장을 어느 정도 억제한다. 중국은 일본의 강압하에서 숨쉴 공간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미국이 아시아에서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했다. 많은 미국유학생들은 이때 중국으로 돌아오고, 이들은 중국의 문화교육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발휘한다. 그리하여 중국의 지식계에서는 미국에 대해 특히 호감을 가졌다. 다만 당시의 중국정부는 아주 부패했고, 사회문제가 많아서, 미국의 지식계에서는 중국에 대하여 호감이 없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미중양국의 관계는 첫번째 "밀월기"로 진입한다. 미국은 일본의 공격을 받았지만, 미국의 작전주요역량은 유럽에 있었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은 오랫동안 비교적 피동적인 입장이었다. 미국은 중국이라는 동방국가가 계속 일본에 저항함으로써, 자신들이 받는 압력을 감경시켜주기를 바랐다. 미국은 군사장비등 방면에서 중화민국의 장개석정권을 지지했고, 장개석정부가 일본과 단독으로 의화(議和)하는 것을 방지했다. 중국은 미국의 원조가 필요했고, 더더욱 미군이 태평양전쟁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주는 것이 필요했다. 이를 통해 일본의 군사압력을 감경시킬 수 있는 것이다. 쌍방은 공동의 적을 가지게 되면서, 양국은 공동의 입장이 된다. 이렇게 미중양국은 동맹을 형성하게 된다.

 

베트남전쟁후기, 미중양국관계는 제2차 "밀월기"에 진입한다.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이 계속 대항하는 것이 필요했다. 동시에 미국군대를 베트남에서 안전하게 철수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그런 점을 도와주기를 희망했다. 중화인민공화국도 미국이 대중적대입장을 바꾸어야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통해 소련이 군사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타격할 때, 미국이 소련을 지지하고 소련과 동맹을 맺지 못하도록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쌍방의 공동적국은 소련이 된 것이다.

 

이 두번의 '밀월'은 모두 정치적인 '정략결혼'이었다. 그 기초는 공동의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서로 만나고 서로 알아가고 서로 사랑하는 연애과정과 크게 달랐다. 일단 공동의 적이 사라지면, 쌍방의 '정략결혼'의 기초는 동시에 사라진다. 쉽게 서로 반목할 수 있다. 각국의 역사학자들은 장개석, 모택동에 대하여 서로 다른 심지어 완전히 대립되는 평가를 내린다. 다만 1940년대의 장개석, 1970년대의 모택동은 같은 점이 있다. 모두 그들 개인의 정치생활에서 비교적 부정적인 시기이다. 미국은 이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미국의 국익에서 출발하였지, 미국의 가치관념에서 출발하지는 않았다. 중국도 미국의 가치관념을 중국이 배우고 본받을 만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중국은 시종 중국자신의 독특한 가치관념을 견지했다. 그리하여, 상방은 설사 '밀월기'가 있었지만, 각자의 생각은 서로 달랐던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과 미국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망하조약>에서 시작하여, 이미 159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만 양국간에는 현재도 여전히 그다지 융합되지 못하고, 심지어 어떤 방면에서는 적대적인 상태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미중양국의 관계가 불안정한 가장 주요한 요소는 쌍방이 비록 159년간 교류하여 왔지만, 아직 서로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라고 본다. 만일 쌍방의 인민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면, 설사 논쟁이 있더라고, 적대적이지는 않게 될 것이다. 마치 미국과 프랑스가 이라크문제로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직 양국인민이 상호이해하는 기초 위에서, 양국정부의 정책은 안정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북경대학 도서관에는 미국을 연구한 많은 중문저작이 있다. 그러나 내가 살펴보니, 보통백성들이 읽을 수 있는 미국헌법, 정치제도, 사회, 교육, 민중생활등을 알 수 있는 일반적인 도서의 수량은 아주 적었다. 나는 들은 바 있다. 미국에는 더 많은 중국을 연구한 저작이 있다고. 다만 보통백성이 중국의 헌법, 정치제도, 사회, 교육, 민중생활을 알 수 있는 일반적인 도서의 수량은 아주 적다고. 쌍방의 언론계에서의 보도도 모두 부족한 점이 있다. 미국의 언론계의 중화인민공화국에 관한 보도는 중국청화대학 신문학과 교수인 리시광(李希光)의 말에 따르면 "요마화(妖魔化)"라고 한다. 양국의 비교적 진실한 지식은 수만에 이르는 중국의 미국유학생, 미국의 방중인사들이 조용하게 민간에서 전파하고 있다. 이런 전파수단은 상대적으로 현대사회에서는 이미 원시적이다. "중국붕괴론" "중국위협론"같은 전혀 상반되는 관점이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본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동아시아에서 여전히 개발도상국이다.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조건은 양국인민의 상호이해를 강화하고, 오해를 제거하여, 언젠가 서로 신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두 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하나는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한 것이다. 당시 중국의 신문 <참고소식>은 이렇게 썼다: 닉슨 대통령과 "퍼스트레이디"가 북경에 도착했다. 나는 당시 해군에서 병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연대내에서 서안통신공정학원을 졸업한 엔지니어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닉슨은 마누라가 몇명이나 되길래 이번에 데려온 것이 '첫째부인'이란 말인가? 다른 하나는 나의 매형이 1993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집트의 카이로로 가는데, 옆자리에 미국인이 앉았다. 그 미국인은 매형이 중국에서 온 것을 알고는 그런 나라를 들어본 적이 있다. 아마 아시아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의 위치는 잘 몰랐다. 그래서 그 미국인은 매형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중국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혹시 중국의 주변에 무슨 큰 나라가 있으면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느냐" 나의 매형은 당시에 '베트남'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