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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북양육진(北洋六鎭)의 연혁과 최후

by 중은우시 2023. 1. 25.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갑오년 청일전쟁이후인 1895년, 청나라정부는 광서안찰서(廣西按察使) 호율분(胡燏棻)이 천진에서 신군(新軍)을 편성훈련시킨다. 11월에는 조선에서 돌아오고 같은 회군계(淮軍係, 이홍장계열)인 원세개(袁世凱)가 호율분을 대체한다. 1897년 원세개는 직예안찰사(直隸按察使)로 승진하고, 신군은 무위우군공위경사(武衛右軍拱衛京師)로 개편된다; 1899년 겨울 무위군은 원세개가 산동순무(山東巡撫)로 가면서 따라간다. 1901년 11월 원세개는 이홍장의 뒤를 이어 서리직예총독(署理直隸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이 된다.

 

1904년 원세개는 왕영해(王英楷), 오장순(吳長純), 단기서(段祺瑞)의 3진(鎭)을 북양상비군(北洋常備軍)으로 건립하고, 무위우군은 제4진, 제5진으로 확대개편한다.

 

그리고, 1905년 5월 북양육진(北洋六鎭)이 정식으로 건립된다. 진은 현대군대로 말하자면 사단에 해당한다.

 

북양육군제일진(北洋陸軍第一鎭)

 

북양육군 제1진의 전신은 경기상비군(京旗常備軍)이다. 이 군대가 건립된 시기는 북양상비군이 성립된 시기보다 늦다. 경기상비군은 팔기자제(八旗子弟)를 주요 병원(兵源)으로 하며, 북양상비군의 장정을 본받아 건립되었다. 1905년 4월 정식으로 군대로 성립되었고, 마지막 '기군(旗軍)'이라고 불린다.

 

1902년 11월 북양상비군이 성립될 때, 청나라조정은 팔기자제중 병사 약 만명을 뽑아서, 괴빈(魁斌), 부륜(溥倫), 계춘(桂春), 철량(鐵良), 강계제(姜桂題)등이 이 만명중에서 3,000명을 선발하여, 원세개에게 주어 경기상비군으로 훈련시킨다. 그리하여 이 군대는 청나라말기 신식육군중의 "어림군(御林軍)"이라 할 수 있다.

 

1903년 12월, 원세개, 철량은 경기상비군에 대하여 인원확충을 실시한다. 차례로 2개대대의 보병, 1개대대의 마병(馬隊), 1개대대의 육로포대와 1개의 공정대를 건립한다. 1905년초, 원세개, 철량은 다시 경기상비군을 확대개편하여 1개대대의 마병, 1개영의 육로포대와 1개의 공정대 및 1개의 치중대(수송대)를 추가한다. 이 군대는 1개 진(鎭)의 편제를 갖추게 된다.

 

같은 해 5월, 청나라정부는 북양상비군을 육군으로 개칭한다. 경기상비군은 북양육군의 제1진으로 개편되고, 최초의 통제관은 봉산(鳳山)이며 북경 북원(北苑) 앙산와(仰山洼)에 주둔한다.

 

사실상, 원세개가 가장 장악할 수 없었던 부대가 바로 북양제일진이다. 청나라조정은 원세개에게 신군을 넘겨주면서도, 제1진은 만주인 자신들이 장악한 것이다. 

 

만주인들 중에서 병법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봉산은 괜찮은 편이었다. 아쉽게도 나중에 광주장군(廣州將軍)으로 나갔다가 혁명당에게 폭사당한다. 사후 봉산은 태자소보(太子少保)에 봉해지고, 원세개와 비견되었다. 봉산은 또한 장서가로 그의 집에는 많은 진귀한 서적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봉산이후, 북양제일진의 통제관은 원세계의 적계(嫡係)인 하종련(何宗蓮)으로 바뀐다. 원세개가 대총통에 취임한 후, 하종련은 시종무관(侍從武官)으로 발탁된다. 원세개 사후, 하종련은 재물과 5만대양을 가지고 산동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정치에 발을 담그지 않는다. 그는 시무(時務)를 잘 알았다고 할 수 있다.

북양육군제이진(北洋陸軍第二鎭)

 

북양육군제2진의 전신은 북양상비군 좌진(左鎭)이다. 청말 신식육군중 가장 먼저 군대로 편성된 일진이다.

 

1902년 1월 원세개는 100만냥의 군비를 조달하여, 무위우군 영무처(營武處)의 왕영해, 왕사진(王士珍)을 정정(正定), 대명(大名), 광평(廣平), 조주(趙州)등지로 보내 6천명을 모은다. 병력을 모집한 곳은 모두 직예의 남부이고 경자사변(庚子事變)때 의화단(義和團)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곳이다. 병력모집때 민간에는 유언비어가 퍼져나갔는데, 그 소문의 내용은 이들을 외국으로 보내, 의화단에 맞아죽은 서양인에 대한 보상으로 삼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들 6,000명은 실제로 보정(保定)으로 보내어 훈련시킨다. 그리고 1903년 7월 북양상비군 좌진으로 편성된다. 나중에 확대를 거쳐 보병12개대대, 기병4개대대, 포병2개대대, 공병1개대대와 치중1개대대, 병력합계 19,120명이 되고, 1904년 4월 북양상비군 제1진으로 개칭된다.

 

1905년 5월, 북양상비군 제1진은 북양육군제2진으로 개편되고, 최초의 통제관은 왕영해이며 천안(遷安)에 주둔한다.

 

왕영해와 장회지(張懷芝). 이 두 사람은 모두 원세개의 심복이라 할 수 있다. 그중 왕영해는 손전방(孫傳芳)의 자형(姉兄)이다. 불행히도 1908년에 요절한다. 장회지는 1934년에 병사한다.

 

북양육군제삼진(北洋陸軍第三鎭)

 

북양육군제삼진의 전신은 북양상비군제3진이다. 이 군대는 북양상비군 제1진, 제2진의 장병을 기초로 만들어졌고, 북양육진중 군대를 만든 속도가 가장 빠른 일진이다.

 

1904년 1월, 러일전쟁이 만주에서 벌어진다. 북양상비군 좌진과 우진의 주력은 보정과 마창(馬廠)의 주둔지를 떠나, 북으로 이동하여 산해관일대로 옮긴다. 그리하여 경기지구는 병력의 공백이 생긴다. 원세개는 이 기회를 틈타, 산동, 하남, 안휘의 3개성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신속히 북양상비군제3진으로 편성한다. 그리고 1904년 3월에 편제를 완료한다.

 

1905년 5월, 북양상비군제3진은 북양육군제3진으로 개편된다. 최초의 통제관은 단기서이고, 보정에 주둔했다.

 

북양육군제3진은 절대로 원세개의 주력이며 적계이다. 통제관은 전후로 단기서, 단지귀(段芝貴)와 조곤(曹錕)이다. 이 세 명은 당연히 모두 원세개의 심복이다. 그중 단기서는 원세개부하들중 가장 대단한 인물이다. 나중에 환계(皖係)군벌의 우두머리가 되고, 4차례나 민국의 총리를 맡는다.

 

단지귀는 원세개의 양자로 불리던 인물이다. 능력을 별로였지만, 사람됨은 아부를 잘하여, 호광총독과 육군총장이 된다. 조곤은 원세개의 호위장군(虎威將軍)으로 나중에 돈을 써서 대총통까지 오른다.

 

북양육군제사진(北洋陸軍第四鎭)

 

북양육군제4진의 전신은 북양상비군 우진(右鎭)이다. 즉 최초의 북양삼진(北洋三鎭)중 하나이다.

 

1903년초, 원세개는 북양상비군우진을 건립하고자 기획한다. 그는 보양마대(保陽馬隊)의 각 대대를 재편하고 병합하여 4개대대로 편성하여 마창으로 보내 훈련시킨다. 1904년 2월, 원세개는 다시 회군(淮軍) 숙의친군(肅毅親軍), 원자마보(元字馬步)등 대대를 뽑아내어 편성훈련시킨다. 나중에 계속하여 직예, 하남등지에서 보병1협(協), 포대1표(標, 여단), 공정대1영(營, 대대)과 치중대 1영을 편성훈련시킨다. 

 

1904년 3월, 원세개는 이들을 합병하여 북양상비군 우진으로 만든다. 그리고 마창과 소참(小站)에 주둔시킨다. 다음 달, 북양상비군 우진은 다시 북양상비군 제2진으로 개칭된다.

 

1905년 5월, 북양상비군 제2진은 북양육군제4진으로 개편된다. 최초의 통제관은 오봉령(吳鳳嶺)이고, 마창에 주둔한다.

 

북양육군제사진의 통제관 오봉령은 어려서부터 원세개의 집안에서 자랐다. 나중에 계속 원세개를 따라다녔고, 원세개의 호위를 맡았다. 그는 절대적으로 원세개의 적계이다. 아쉽게도 1912년 그는 원세개보다 먼저 죽는다.

 

북양육군제오진(北洋陸軍第五鎭)

 

북양육군제5진을 만들 때, 마침 청나라정부는 상비군을 육군으로 개편하고 있을 때였다. 이 진은 직접 북양육군제오진으로 편성된다.

 

1905년 4월, 서리산동순무 양사양(楊士驤)은 무위우군의 선봉대에서 12개대대를 뽑고, 다시 마창의 북양상비군제이진에서 보병4개대대, 기병1개대대, 포병1개대대를 뽑고, 다시 청주(靑州), 덕주(德州), 창주(滄州), 밀운(密雲)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기병(旗兵)을 추가하여 병력을 일진의 편제로 맞춘다. 모두 보병12개대대, 기병3개대대, 포병3개대대 및 공정대와 치중대 각 1개대대를 갖춘다.

 

1905년 5월, 북양육군제오진의 편성이 완성되고, 최초의 통제관은 오장순(吳長純)이 맡는다. 산동 제남과 유현(濰縣)일대에 주둔한다.

 

북양육군제오진의 통제관 오장순은 원세개의 옛상사인 오장경(吳長慶)의 당제(堂弟)이다. 그는 잊혀진 항일명장이다. 청일전쟁때 오장순은 여순(旅順)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일본군과 60여일간 혈전을 벌이면서, 말을 타고 총탄을 맞았지만, 그는 전혀 두려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북양육군제육진(北洋陸軍第六鎭)

 

북양육군제6진의 전신은 북양상비군제4진이며, 북양군중 유명한 '흉진(凶鎭)'이다.

 

1905년 원세개는 무위우군의 7,000명을 뽑고, 남양자강군(南洋自强軍) 260여명 및 북양상비군 제삼진의 보병대대의 각표 제2영을 뽑아서 편성훈련시킨다. 그렇게 합쳐서 북양상비군제4진이 된다. 무위우군은 이전에 여러번 궁궐을 숙위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북양상비군제4진이 만들어진 후 남원(南苑), 해전(海澱)등지에 주둔하며 궁문의 숙위를 맡았다.

 

1905년 6월, 북양상비군제4진은 북양육군제6진으로 개편되고, 최초의 통제관은 왕사진(王士珍)이 맡고, 북경 남원, 해전등지에 주둔한다.

 

북양육군제6진의 통제관 왕사진은 북양삼걸(北洋三傑)의 으뜸이다. 왕사진은 나중에 육군총장과 민국총리를 맡는다. 그 다음 통제관은 조국현(趙國賢)이다. 그는 하남 항성 사람으로 원세개와 같은 고향사람이다. 절대적으로 원세개의 사람이다. 조국현은 1911년 혁명군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북양육진의 최후

 

원세개 사후, 북양군벌내부에서는 분열이 발생한다. 풍국장(馮國璋)의 직계(直係)와 단기서의 환계가 대립하는 국면이 형성된다.

 

환계의 우두머리인 단기서는 제2, 제3, 제6진의 통제관을 맡은 적이 있다. 다만 이들 부대는 모조리 직계의 군대가 된다. 풍국장은 한번도 북양육진의 통제관을 맡은 적이 없다. 다만 직계는 오히려 북양육진중 대부분의 부대를 거둔다. 그 원인을 찾아보자면, 단기서의 성격이 강하고, 명령을 내리기 좋아하고, 또한 중앙을 중시하여 항상 다른 파벌이나 지방세력을 희생시켜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북양군벌내부에서 이반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풍국장은 청나라말기에 군사교육을 책임졌기 때문에, 북양의 군관은 대부분 그의 제자였다. 그리고 북양의 여러 대소군벌들과 이익이 비교적 일치했다. 다만 풍국장이 북경으로 가서 대통총이 된 후, 단기서의 올가미에 빠져 포부를 시전하기 어려웠고, 계속하여 밀리다가 결국은 쫓겨나게 된다.

 

 풍국장이 역사무대에서 물러난 후, 원래 직계, 환계간에 애매한 태도를 보이던 조곤이 돌연 일어나서 신직계의 '공주(共主)'로 등장한다. 조곤의 부대는 원래 북양육진내의 제3진이다. 오패부(吳佩孚)의 정돈을 거쳐, 민국시기 전력이 가장 원래 북양육진중 최강이 된다.

 

조곤, 오패부 집단의 적계간부는 대부분 제삼진에서 나왔다. 원래 북양육진중에서 제1진, 제5진이 기본적으로 직계, 환계간의 투쟁에 가담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 직계는 수중에 제2, 제3, 제6진을 가지고, 환계는 겨우 제4진만을 가졌다. 그리고, 멀리 상해 절강지역에 있어서, 단기서는 수중에 쓸만한 병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독일에 대한 선전을 틈타 참전군(參戰軍)을 편성훈련시킨다. 그러나, 단기서가 새로 편성한 군대는 직계,환계전쟁에서 백전노장으로 이루어진 직계의 부대를 당해내지 못하여 실패할 운명이었다.

 

조곤, 오패부집단이 통치하던 시기에, 직접적으로 통제하던 병력은 30만명에 달한다. 그리고 각 성의 따르는 자들을 포함하면 모두 50만명이 넘었다. 이들은 북양군벌에서 원세개이후 다시 한번 대거 확장한 것이다. 다만 조곤은 뇌물선거로 총통에 당선되어 인심을 잃는다. 손중산(孫中山), 장작림(張作霖)과 노영상(盧永祥)의 반직 삼각동맹이 결성되고, 직계정권내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마침내 제2차 직봉전쟁에서 패퇴한다. 그후 직계의 주력인 북양제3진, 제6진은 전후로 해산된다. 원래의 북양육진에서 1/3이 사라진 것이다.

 

손전방은 원래 왕점원(王占元)의 제이진을 기반으로 했다. 왕점원이 하야한 후 손전방이 조곤, 오패부의 명을 받아 부대를 이끌고 '복건으로 지원을 나간다' 3년후 전후로 복건, 절강을 통제하고, 1925년 봉군을 축출하며 '절민소환감연군(浙閩蘇皖竷聯軍)을 성립시킨다. 사람들이 말하는 "오성연군(五省聯軍)"이다. 손전방 휘하의 적계장군들은 대부분 제이진 출신이다. 손전방은 20여만명을 거느렸고, 북양육진중 남은 4개진중 제5진이 산동에 주둔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제1, 제2, 제4진도 손전방의 수중에 들어간다.

 

산동의 제5진은 오랫동안 산동에 주둔했고, 실제로 산동의 지방군대가 된다. 비록 북양육진으로 유명했지만, 실질은 그렇지 못했다. 이 부대는 1925년 장종창(張宗昌)이 산동을 장악한 후, 직로연군 제4군으로 개편된다. 1927년 4월에는 북벌군과의 전투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해, 장종창에 의해 해산된다. 

 

같은 시기 북방의 오패부, 장종창등 군벌들과 비교하여, 손전방의 군대는 전투력이 확실히 한단계 앞섰다. 그리하여 북벌하는 국민혁명군에 적지 않은 골치거리였다. 1928년 북벌전쟁이 끝난 후, 손전방의 잔여부대는 국민혁명군 육군제47사가 된다. 제1,2,4진의 북양육진에서 내려온 인원은 모조리 이 사단으로 편입된다. 제47사는 그후 내전, 항전을 거쳐 점차 중앙군으로 변신하고, 최종적으로 1949년 12월 천서(川西)전투에서 인민해방군에게 섬멸당한다.

 

이렇게 하여, 원세개가 혼자서 만든 북양신군의 육진은 모조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