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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정여창(丁汝昌): 태평천국의 장수에서 북양수군의 제독까지...

by 중은우시 2023. 2. 2.

글: 김왜취담(金娃趣談)

 

1861년 이월, 정여창은 정학계(程學啓)를 따라 안경성(安慶城)을 오랫동안 포위공격하고 있던 상군(湘軍)에 투항한다. 이로써 그는 7년간에 걸친 태평군의 생애를 마감하고, 증국번(曾國藩)이 조직한 상군의 일원이 된다.

 

이때, 정여창은 겨우 25,6세의 나이였고, 정학계가 이끄는 여러 심복장수들 중에서 그다지 두드러진 인물도 아니었다. 아무도 그가 나중에 중요한 직위인 북양수군의 제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정여창과 비교하자면, 정학계야말로 증국번형제가 가장 회유하고 싶어했던 태평군의 지휘관이었다. 상군이 안경을 포위공격할 때, 정학계가 군대를 이끌고 분전하며 저항하였기 때문에 공성전은 계속 실패했다. 오랫동안 싸우면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여 증국번 형제는 고민이 컸다.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증국번형제는 할 수 없이 전략을 바꾼다. 이전의 강공전략에서 회유전략으로 바꾼 것이다.

 

적을 회유하려면 먼저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내야 한다. 정학계는 비록 전투에서 용맹하였지만, 그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양모에게 효성스럽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생모가 죽고, 정학계는 친족인 정유동(程惟棟)의 모친 손에 자란다. 그리하여 정유동 모친의 양육은혜에 댛여 정학계는 계속하여 마음 속에 깊이 새기고 있었다.

 

증국번형제는 정유동모친을 찾아가서, 그녀의 친아들인 정유동의 생명을 볼모로 협박하여 그녀로 하여금 정학계의 군영으로 들어가서 정학계로 하여금 상군에 투항하도록 설득하게 한다.

 

정학계는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수하 여러 심복을 이끌고 상군에 투항한다.

 

증국변 형제로서는 강적 한명이 줄어들고, 장병이 적지 않게 늘었으니, 책반계(策反計)는 그들의 기대대로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정학계등에 있어서 항복하는 것은 쉬웠지만, 그 이후가 어려웠다. 상군의 군영으로 온 후 그들은 상당히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1. 신뢰를 얻는데 어려웠던 기간

 

정학계는 이전에 태평군의 유명한 장수였고, 양군의 교전때 그는 자주 전선에 나와 지휘했기 때문에, 그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부상을 입은 상군 장병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증국번형제부터 상군장병들까지 모두 정학계에 대하여는 원한도 있고, 두려움도 있었다. 그가 투항한 후 증국번형제로부터 완전한 신임을 얻지 못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수시로 피살당할 위험에 놓이게 된다.

 

이 점에 대하여 정학계를 직접 지휘하는 증국전(曾國荃)은 입장이 분명했다. 매번 전투때마다, 그는 반드시 정학계로 하여금 병사를 데리고 최전선에 나서게 한다. 이를 통해 그의 충성심을 시험해본 것이다. 증국번도 여러번 증국전에게 당부한다. 정학계를 항상 잘 감시하고, 무슨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잘 막으라고.

 

정학계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다. 그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저 수하를 이끌고 실제행동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상군에 투항한 날로부터, 정학계와 정여창등은 증국전부대의 선봉대가 되어, 항상 상군의 최전선을 지켰다. 그리고 이전의 상사, 동료, 심지어 예전에 함께 생사를 넘나들던 전우와 직접 싸워야 했다. 

 

반년간의 대치, 싸움을 거쳐, 안경성이 함락되고, 성안의 1만여명의 태평군장병은 모조리 전사한다.

 

이런 피(血)와 불(火)의 시험을 거쳐, 정학계, 정여창등은 마침내 증국번, 증국전으로부터 완전한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얼마후, 정학계는 삼품유격(遊擊)의 계급을 부여받고, 화령(花翎)을 달 수 있게 된다; 정여창은 천총(千總)으로 승진한다.

 

신임을 받은 정학계는 "개자영(開字營)"을 단독으로 건립하여, 개자영의 영관(營官)이 되고, 정여창은 개자영의 초관(哨官)이 된다.

 

정여창의 승진의 길은 여기서부터 전면적으로 열리게 된다.

 

2. 유명전(劉銘傳)으로 인하여 얻고, 유명전으로 인하여 잃다.

 

1862년,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웠기 때문에, 정여창은 유명전으로부터 높이 평가를 받아 영관으로 승진하고 참장(參將)의 계급을 받아. 본영의 군무를 관리하게 된다.

 

1864년, 정여창은 부장(副將)으로 승진한다. 1868년, 정여창은 총병(總兵)이 되고, 제독(提督)의 계급을 받으며, "협용바투루(協勇巴圖魯)"라는 칭호를 얻는다. 정학계와 마찬가지로, 정여창은 당시 이런 칭호를 받은 보기 드문 한인중 한명이 된다.

 

그러나, 길이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정쳐창은 금방 최대의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1874년 유명전이 조정의 '재군절향(裁軍節餉, 군인을 줄이고, 군량을 줄인다)'의 명령을 받고, 정여창이 있던 마대(馬隊, 기병) 삼영(三營)을 해산하려 한다. 그러나, 명령이 전달되자 정여창은 집행을 거절한다. 유명전은 대노하여 군법으로 정여창을 처결하려 한다.

 

정여창은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자 고향으로 도망친다. 이후로 유명전과는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정여창은 그저 집안의 몇무도 되지 않는 밭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지낸다. 비록 먹고사는데 지장은 없었지만, 그런 생활은 군인으로서 영광을 누렸던 정여창에게 있어서 마음에 들지는 않는 것이었다.

 

3. 다시 시작하다.

 

바로 이 시기에, 청나라조정은 해상방어를 위한 준비를 한다. 직예총독 겸 북양통상대신 이홍장이 명을 받아 업무를 집행한다.

 

정여창은 이전에 이홍장의 부하로 있었다. 그는 이홍장이 북양수군을 책임진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간다.

 

이홍장은 정여창을 잘 알았지만, 유명전과의 관계때문에 직접 정여창을 임용하지는 못했다. 그는 정여창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와 유명전간에 문제가 있었으니, 지금 내가 너를 바로 쓸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유명전이 분명 기분나빠할 것이다. 차라리 우리 이렇게 처리하기로 하자!"

 

그리하여, 이홍장은 조정에 상소를 올려 직접 정여창을 임명하지는 않고, 그를 영국에 보내 군함을 구매하도록 하고, 동시에 해군에서 학습하게 한다. 그렇게 하여 점진적으로 그를 북양수군의 창건과 이후 지휘에 참가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정여창은 다시 군인의 길로 돌아올 수 있게 되고, 게다가 외국으로 나가서 공부할 기회까지도 얻을 수 있었다. 영국, 독일등 나라로 가서 군함의 설계, 건조 및 해군의 발전상황도 공부할 수 있었다.

 

귀국후, 정여창은 명을 받아 북양수군을 이끈다. 1883년, 정여창은 천진진총병(天津鎭總兵)이 된다. 이홍장은 특별히 조정에 상소를 올려, 정여창의 재능과 위명을 극력 칭찬한다. 그리하여 조정은 정여창에게 황마괘(黃馬褂)를 내린다.

 

그 시대에 황마괘를 받아서 입는 것은 특별한 영광이었다. 이홍장의 추천으로 정여창은 그런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정여창이 중용받고, 조정의 상사를 받는데에는 그 자신의 재능이 출중한 점도 있지만, 이홍장이 적극적으로 추천해주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홍장이 이끌어 주면서, 정여창은 북양수군제독이 되고, 상서(尙書)의 직위도 추가받는다. 그리하여 그는 북양수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된다. 그는 명을 받아 위해, 산해관등지에 학당을 설립하여 북양수군에서 조종, 지휘등을 맡을 인재를 배양했다.

 

이때의 정여창은 피땀을 쏟으면서 전심전력으로 일했다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그 시대배경하에서 그의 이런 노력은 어느 정도 비정적인 색채를 띌 수밖에 없었다.

 

4. 해상의 악전고투

 

1894년 7월 25일, 일본군이 돌연 한반도에 정박해있던 청나라의 제원호(濟遠號)와 광을호(廣乙號) 전함을 기습했다. 제원호는 수십명의 사상자를 냈고, 광을호도 크게 파괴되어 배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배를 불질러버린다. 청군이 빌려와서 사병운송에 사용하던 영국상선도 격침된다.

 

일본군의 기습은 오래 전부터 기획된 것이었고, 북양수군은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북양수군의 제독으로서, 정여창이 가장 먼저 조정의 질책을 받는다. 나이젊은 광서제는 더더욱 분노했고, 흥분하여 직접 정여창을 면직시키고 조사처벌하는 명령을 내리고자 한다.

 

중요한 순간에, 역시 이홍장이 상소를 올려 정여창을 위해 변명을 해준다. 그리하여 정여창은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조정으로부터의 문책은 일단락되었지만, 바다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육상전투와달리 해상전투에서는 정여창이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그는 관직을 차례로 면직당한 후, 단지 잠정적으로 그 직위를 수행하고 있었다.

비록 정여창이 면직되기는 했지만, 상대방의 눈에도 그는 여전히 얻기 힘든 인재였다. 1894년말, 일본군함대사령관 이토 스케유키(伊東佑亨)는 여러번 정여창에게 서신을 보내 투항을 권했다.

 

정여창은 아주 확실하게 적의 투항권유를 거절한다. 이토 스케유키가 보낸 서신은 한통도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이홍장에게 보내고 이를 통해 자신은 절대로 투항할 생각이 없음을 밝혔다.

 

"내 몸은 이미 나라에 바쳤다(吾身已許國)!" 비록 이미 아무런 관직도 없어 몸은 가볍지만, 정여창은 이처럼 분명하게 가족들에게 얘기했던 것이다.

 

1895년 정월 삼십일부터, 양군은 다시 격렬한 교전을 벌인다. 중과부적으로 청군의 포대는 차례차례 함락되고, 여러 전함도 심각하게 손상되어, 전쟁형세가 악화된다.

 

이월 구일, 정여창은 임시기함(旗艦) 정원호(靖遠號)에 올라 나머지 전함을 이끌고 분전을 벌인다.

 

격전과정에 '정원호'는 두 척의 적함에 적중시킨 후 치명적인 포격을 당한다. 전함의 장병들중 사상자가 많이 나오고, 정여창과 정원호 관대(管帶) 섭조규(葉祖珪)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눈앞에는 피를 뒤집어쓰며 분전하는 전우들이 있고, 등뒤에는 계속 협상, 화의하려믄 상급관료들이 있다. 심각하게 파손된 정원호에 서서, 정여창은 비분강개하여 전함과 함께 순국하고자 한다. 그러나 부하가 그를 작은 배로 억지로 끌고가서 섭조규와 함께 곧 침몰할 전함을 벗어난다.

 

십일, 정원호가 침몰된다. 북양수군에서 이 전함은 가장 큰 정예함이다. 7년간 복역한 후 마침내 사명을 완성한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

 

십일일, 정여창은 마지막 투항권유서신을 받는다. 이때 일본측의 대표와 청나라정부의 관리는 협상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바다 위에서의 전투상황은 쌍방의 카드였다.

 

정여창은 다시 한번 투항권유를 거절한다. 그날 저녁, 그는 자결한다. 임종때, 정여창은 해군제독인의 한쪽 끝을 잘라버린다. 그의 해군제독인으로 주항파(主降派)가 의화(議和)하는데 쓸 수 없도록.

 

그렇다고 주항파의 협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십사일, <위해조약>이 체결되고, 북양함대는 전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