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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당10

동림당(東林黨)은 대명왕조를 어떻게 망가뜨렸는가? 글: 요풍휘(姚豊輝) 명나라말기에는 유학자들로 구성된 동림당인들이 중용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유학자들의 글을 보면 이들 동림당인들은 '정인군자(正人君子)'였다. 그러나, 그들의 '당수'는 명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역사상의 '망국지신(亡國之臣)'임이 확실하다. 동림당의 핵심구성원들은 강남사대부를 위주로 하는 관료집단이다. 숭정제는 즉위후 동림당인들에 의지하여 새로운 내각을 구성한다. 그들이 관직을 일단 차지하자, 말만 번지르르한 고상한 뜻을 펼치고자 했다. 고대 성인들의 이상적인 통치를 하고자 한 것이다. 관모를 쓰고 관복을 입자 이들은 득의양양하게 즉시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이것을 고쳐야 한다 저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변법혁신을 주장한다. 소위 "혁제조야적폐(革除朝野積弊), 반대탐종왕법(反對貪縱枉法)"(.. 2023. 3. 21.
동림당(東林黨) 분석: 그들은 왜 실패했는가? 글: 고금지모(古今智謀) 황제가 조정대권을 과감하게 환관에게 넘겨주는데 대하여 가장 불만이 컸던 것은 문관집단이다. 문관집단의 이런 생각은 좋게 보면 그들의 모두 성현의 책을 읽은 사람들이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인생이상을 지니고 있으며, '군주를 요순으로 만들겠다'는 .. 2019. 1. 13.
완대성(阮大鋮): '통재(通才)'와 '간신(奸臣)'을 겸한 소인(小人)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추사여방초(秋思如芳草) 춘래일일생(春來日日生) 이것은 어렸을 때 외웠던 몇 개의 시중 하나이다. 당시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여겨져서 아주 좋아했었다. 그러나 이 시의 작자를 얘기하려면 약간 쑥스러워진다. 그는 완대성이라는 사람인데, 역사상 유명한 간신.. 2018. 12. 28.
태감 위충현(魏忠賢)의 개인숭배운동 글: 위득승(魏得勝) 가난한 집안 출신인 위충현은 스스로 거세를 한 후 관계를 통해 궁으로 들어가 영광스럽게도 도분공(掏糞工)이 될 수 있었다. 십여년후, 그는 바닥을 벗어나 한 재인(才人)의 음식관리업무를 맡는다. 1620년, 위충현이 입궁한지 딱 30년이 되었고, 나이는 이미 52세였다. .. 2018. 10. 27.
위충현의 엄당(閹黨)을 키워준 것은 동림당이다. 글: 정만군(程萬軍) 위충현과 동림당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하나는 극단적 현실주의자이고, 하나는 극단적 이상주의자이다. 대다수의 세숙인들에게 있어서 어디가 더욱 흡인력을 가질까? 위충현과 동림당의 투쟁을 이야기하자면, 연원이 있다. 일찌기, 위충현이 아직 세력을 키우지 못했.. 2018. 3. 7.
중국 '첨신(諂臣)'의 아첨술 글: 포강객(浦江客) 아부아첨을 하는 자는 역대 관료사회에 많이 있었다. 고인들은 그들을 "첨신"이라고 불렀다. 소위 "첨신"은 "첨미(諂媚)"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이다. 즉, 윗사람의 뜻을 받들어 비위를 맞추거나, 아부하는 관리를 가리킨다. <관자(管子)>에는 관리를 8종류.. 2015. 3. 26.
명말당쟁의 시비곡직 글: 양청균(楊淸筠) 동림당과 엄당의 투쟁은 천계제때 엄당의 승리로 끝난다. 비록 동림당이 천계제의 즉위에 거대한 공을 세웠지만, '삼대안(三大案)'을 통해서 기회를 만들어 주었지만, 천계제는 확실히 이들 재야에서 성장한 선비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충현이 이끄는 엄당을.. 2014. 12. 12.
숭정제는 어떻게 위충현을 제거했는가? 글: 두문자(杜文子) 위충현은 명나라 말기의 환관이며, 그는 명희종의 총애를 받아서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고, '구천구백세(九千九百歲)'로 불리웠으니 그의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명희종 주유교가 죽은 후, 동생 주유검(숭정제)가 즉위한다. 주유검은 자신이 황제에 오르리.. 2014. 8. 27.
명나라는 지나친 언론자유로 멸망했는가? 글: 주가웅(朱家雄) 청나라는 100년이상에 걸치는 잔혹한 문자옥(文字獄)정책을 썼다. 명나라때 살았던 사람들이 누린 언론의 자유라는 행복은 청나라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상, 명나라 통치자들의 언론자유에 대한 포용력은 대단했다. 역대왕조와 비교하더라도 첫손에 꼽힐 정도.. 2010. 11. 22.
동림당과 엄당(閹黨) 명나라의 천계제가 들어서면서 그를 황제로 올리는데 공을 세운 동림당 사람들이 중용되기 시작한다. 이미 은퇴하였던 섭향고는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서 내각수보를 맡는다. 한광과 유일경은 내각대학사가 된다. 그리고 조남성은 이부상서를 맡고, 손신행은 예부상서를 추원표는 좌도어사를 맡는다... 2006. 10.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