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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위충현)

태감 위충현(魏忠賢)의 개인숭배운동

by 중은우시 2018. 10. 27.

글: 위득승(魏得勝)


가난한 집안 출신인 위충현은 스스로 거세를 한 후 관계를 통해 궁으로 들어가 영광스럽게도 도분공(掏糞工)이 될 수 있었다. 십여년후, 그는 바닥을 벗어나 한 재인(才人)의 음식관리업무를 맡는다. 1620년, 위충현이 입궁한지 딱 30년이 되었고, 나이는 이미 52세였다. 머리카락도 점점 흰색이 드러났다. 일하는 것은 원래와 다를 바 없이 조용했다. 그러나 이 해의 어느 날 위충현의 운명에 생각지도 못했던 역전이 벌어진다. 먼저 이해 칠월, 만력제 주익균이 사망하고, 태자 주상락이 즉위한다. 주상락은 장남이고 바로 위충현이 모시는 그 왕재인(王才人)이 낳은 황자이다. 자연스럽게, 그 재인의 거소는 준동궁(準東宮)이 되어, 거기서 일하는 노소들은 모두 기뻐해 마지 않았고, 기세가 점점 커진다. 위충현의 지위도 급격히 올라간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주상락이 등극한지 1개월만에, 종욕과도(縱慾過渡)하여 죽고 만다. 순식간에, 어제까지 궁안에서 콧물을 사방에 흘리며 뛰어다니던 황장자 주유교(朱由校)가 황제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 변화는 너무 빨랐다. 모든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위충현은 특히 더 그러했다. 주유교는 아직 어린아이이고, 놀기를 좋아하는 성격을 타고났다. 그래서 공문서나 보고서같은 것은 그가 위충현에게 대신 보라고 시켰다. 이런 행운이 위충현에게 떨어진 것이다. 입궁하기 전에 위충현은 위사(魏四)라고 불렸다. 입궁후에 왕재인이 그의 이름을 위진충(魏進忠)으로 바꿔준다. 공문서에 회신하는 대권이 그의 손에 떨어질 때 그는 스스로의 이름을 위충현이라 다시 개명한다. 이 때무터, 이 세 글자는 명사(明史)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일부분이 되어 버린다.


비록 위충현이 하룻밤만에 비교할 수 없는 큰 권력을 갖게 되었지만, 모든 일이 그의 마음대로 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동림당(東林黨, 거점은 강소 무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림서원에서 강학하는 기회를 잡아 자주 시정을 공격했다. 그들은 비록 황제에 대하여 공격을 하지는 못했지만, 대학사들에 대하여는 맹공을 펼친다. 나중에 금방 중앙정부에서 일종의 대치하는 세력이 되어 버린다. 즉 동림당과 반동림당의 두 파이다. 반동림당은 긴밀하게 위충현의 주위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동림당으로부터 엄당(閹黨, 엄은 내시를 뜻함)이라는 멸칭(蔑稱)을 얻는다. 이 당쟁은 거의 절대다수의 관리들이 연루된다. 최종적으로 엄당이 대승을 거둔다. 엄당일파는 소황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수완과 역량을 지닌 핵심조직원 "오호(五虎)"(병부상사 최정수를 우두머리로 함), 오표(五彪, 금의위도독 전이경을 우두머리로 함)가 있었다.


4년을 1기로 하는 현대의 계산법으로 하자면 위충현은 2기에 걸쳐 정부영도자였다. 감정적으로 태감이 중국의 영도자가 된 것을 인정할 수 없을지 몰라도, 사실상 그는 그러했다. 그리고, 그의 통치수단은 전통적이며, 역대 독재정권과 마찬가지였다. 잔폭(殘暴)과 혈성(血腥). 뭐 새로운 것은 없었다. 한 가지는 우리에게 좀 의외였다. 그것은 바로 가공송덕(歌功頌德)의 방면이다. 1626년, 절강순무 반여정은 앞장서서 위충현의 생사(生祠)를 세운다. 그리하여 위충현의 조상을 모시고 향을 사르고 절을 한다. 이런 행동은 전국을 한바탕 뒤흔들어 놓는다. 자연히 위충현에게는 찬사를 받는다.


살아있는 사람을 위하여 사당을 세우다니, 가히 대명제국의 혁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전국각지의 정부관리는 속속 참관하고 본받는다. 돌아와서는 다시 벌떼처럼 충성경쟁을 벌인다. 이릿에 수백 곳에 위충현의 생사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계료총독 염명태는 위충현의 생사 7곳을 지었고, 독향상서 황운태는 위충현의 생사 2곳을 지었다. 황운태의 더욱 특이했던 점은 이렇다. 그는 위충현의 상에 3번 고두(머리를 숙이는 절)를 한다. 그리고 문무관리를 이끌고 계단 아래로 내려가서 예를 행한다. 예를 마치고는 상의 앞으로 가서 이렇게 아뢴다: "황운태등은 구천세(九千歲)의 배양으로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머리를 숙여 감사인사를 한다. 인사를 마친 다음 다시 계단 아래로 내려가서 줄을 맞춘 다음 관리들을 이끌고 오배삼고(五拜三叩)의 예를 한다. 추태백출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각지에 만들어지는 생사들은 서로 화려함을 겨루었다. 한 사당의 건축비용이 수십만냥에 달한다. 위충현의 조상은 침향목으로 만들었고, 정교하게 조각했으며, 손과 발을 살아있는 사람처럼 움직일 수 있게 했다. 배안의 내장은 모조리 금은보화로 만들었고, 의복과 모자신발에도 보석으로 장식한다. 머리의 상투에는 구멍을 내서 사계절 향기가 나는 꽃을 꽂아 두었다. 위충현 사당은 마치 레닌등 독제자의 시신처럼 사병을 보내어 밤낮으로 보호했다. 대학생 육만령(陸萬齡)은 위충현을 공자와 나란히 거론하면서, 서교(書校)의 간부들에게 위충현의 사당을 공자묘와 나란히 둘 것을 건의했다. 부교장 주지준(朱之俊)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목패를 길가에 세워서 위충현의 공덕을 칭송한다. 대우(大禹)보다는 조금 작게, 맹자(孟子)보다는 훨씬 크게 만들었으니, 후안무치의 극을 달린다고 할 수 있다.


1627년, 23세의 주유교가 병사한다. 그는 자식을 두지 못해서, 동생 주유검(朱由儉)이 즉위한다. 위충현은 봉양으로 가서 죽은 황제릉을 치키게 했고, 그는 도중에 목을 매어 자살한다. 그때 그의 나이 60세였다. 주유교는 임종때 동생 주유검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위충현은 "각근충정(恪謹忠貞)하니 대사를 같이 도모할 수 있다"고. 그러나, 형은 형이고, 동생은 동생이다. 개조환대하면, 위충현에게는 죽는 길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17년후, 이자성이 북경성을 함락시키기 전날, 주유검은 밀지를 내려, 위충현의 유해를 향산(香山) 벽운사(碧雲寺)에 거두어 매장해준 것이다. 이것은 위충현이 생전에 바라던 바였다.


위충현이 대명제국을 주재할 때, 내부는 안정되고 외부도 조용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사실이다. 위충현이 권력을 장악했던 8년간, 비록 그는 권력이 최고조에 달했지만, 그는 수시로 자신을 낮추었다. 당시는 문무백관들이 거의 모두 그의 발 아래 무릎꿇고 절을 했다. 심지어 위충현보다 나이가 많은  많은 고위관리들도 앞다투어 그의 양자가 되었다. 이때 누군가 진언을 올려 그에게 황제를 대신하여 스스로 황제에 오를 것을 권한다. 당연히 이때의 위충현은 그럴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경황실색하며, 말조심하라고 질책한다. 이것은 주유교의 임종시 그에 대한 평가와 칠치한다.


독재정권에서 위충현은 원래 그저 내시였다. 그러나 홍운(鴻運)이 그에게 내려왔고, 그는 일거에 일국지존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충후한 사람이라도, 그에게 최고의 권력을 쥐어주면, 그는 사람에서 악마로 변하게 된다. 독재권력은 모든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고, 사람이 아니게 바꾼다. 이것은 그가 내시인가 아닌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필연적인 연결도 없다. 위충현의 이전 지위가 어떠했든지 간에, 결국 그가 실질적인 국가의 제일인자가 도기 전에, 그는 정인군자들이 멸시하는 내시였다. 그런데 그가 하룻만에 일국지존에 올랐다. 그는 더 이상 무슨 내시가 아니다. 누구든지 올려다보고, 누구든지 경위하는 그런 인물이 된 것이다. 즉 국가영도자인 것이다. 중국인의 시비관은 이처럼 형편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