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금지모(古今智謀)
황제가 조정대권을 과감하게 환관에게 넘겨주는데 대하여 가장 불만이 컸던 것은 문관집단이다. 문관집단의 이런 생각은 좋게 보면 그들의 모두 성현의 책을 읽은 사람들이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인생이상을 지니고 있으며, '군주를 요순으로 만들겠다'는 사명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쁘게 보면, 권력은 이익이고, 치우친 분배방식에 대하여는 누구든 불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명나라는 내각이 형성된 때부터, 내각은 문관집단이 권력쟁탈전을 벌이는 첨병이 된다. 쟁탈대상은 어떤 때는 황제이고, 어떤 때는 환관이다. 황제와 싸우는 것은 나눠주는 권력을 좀더 늘여달라는 것이다. 환관들과 싸우는 것은 황제에게서 나눠온 권력을 자신이 좀더 차지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각은 황제와 죽어라 싸웠고, 환관과 죽어라 싸웠다. 이 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러나, 만력제 중반에 상황은 크게 변한다. 만력제가 혼용(昏庸)했는지 여부는 불문으로 하고, 그가 집권했을 때 그는 내정과 외교에서 큰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이 황제는 인색했다; 그는 손안에 쥔 권력을 자신도 쓰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지도 않았다. 환관이건 내각이건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제2의 풍보(馮保)도 나오지 않았고, 제2의 장거정(張居正)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수십년을 끌자 문관들도 분명히 알게 된다. 내각(內閣) 혹은 수보(首輔)가 자신들을 위하여 권력을 빼앗아 오는 것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차라리 모두 힘을 합쳐서 파트너쉽회사를 만들어 '개인기업'이나 동업업체의 것들을 집어삼키는 것이 낫겠다고 여긴다. 만력제 후기의 '당쟁'은 '회사경영'의 모습이 보인다. 천계제는 만력제와는 달랐다. 그렇게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리들이 '당쟁'을 벌일 거리가 커진다. 이윤이 낮은 장사는 하려는 사람이 원래 적은 법이다.
천계재때의 당쟁은 상당히 장관이었다. 첩보전, 육박전, 납거전(拉鋸戰, 시소게임)이 연이어 벌어진다. 이번 대결전의 기간은 개략 8년정도이다. 만력48년부터 숭정원년까지(1620-1628). 관리들은 원래의 직무를 내려놓고 모조리 검투사로 변신한다. 기회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관료들의 대결은 이 8년에 집중되었다. 왜냐하면 황제만도 4명이 바뀌었다. 최고지도자가 계속 바뛰다보니 환경에 적응하기도 어려운데,무슨 여유가 있어서 구체적인 일까지 하면서, 모두가 힘을 모아 근정, 염정을 하고, 안정, 발전을 꾀할 수 있겠는가?
만력48년, 양련(楊漣), 좌광두(左光斗)등 동림당의 우수한 당원들은 만력제 주익균(朱翊鈞)이 불행히 붕어한 틈을 타서, 힘을 모아 태창제(泰昌帝) 주상락(朱常洛)을 황제의 자리에 앉히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불과 1달도 안되어, 주상락이 불행히 사망한다. 동림당과 엄당은 힘을 합쳐서 다시 천계제(天啓帝) 주유교(朱由校)를 황제에 앉힌다. 주상락, 주유교는 후세인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국가지도자로서의 수준을 차치하고, 그들은 전체적으로 후덕한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이 죽고, 두번의 공을 세우면서, 논공행상은 이루어져야 했다. 그리고 전체 당원들은 모두 이익을 취한다. 그것도 적지 않게.
주목할 것이 있다. 이 두번의 정치사건에서 동림당은 엄당(아직 위충현당은 아니다)과 우당(友黨)이었다. 둘이 협력하는 과정에서 윈윈하고 둘 다 이익을 얻는다. 그런데 왜 싸우겠는가? 그들은 누구도 정의와 사악으로 몰고 가지 않았다. 같이 놀았다. 그래서 서로를 치켜세워주는 상황이었다.
내외신의 평화와 화해는 얻기 힘든 일이다. 그리고 일시적인 것이다. 이런 국면이 무너지는 것은 위충현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위충현에게 부족한 것은 정치경험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황제에 대한 충성뿐이다. 황제가 그에게 하라고 시킨 일은 그가 혼자서 해냈다. 정치적 지혜가 결핍되어 있다보니 그는 풍보에게서 배워서 장거정같은 사람을 찾아서 같이 하지를 못했다. 그렇게 했다면 일을 더욱 잘 처리했을 것이다. '이윤율'도 균형을 맞출 수 있었을 것이다. 서로 이익을 다투면서 안면을 바꾸는 국면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천계3년, 동림당은 전쟁을 결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타격대상은 위충현을 우두머리로 하는 환관이 아니라, 자신의 동류(同類)였다. 제당(齊黨), 절당(浙黨), 초당(楚黨)등의 당이었다. 그들은 모두 집권당이므로 하나를 없애면 분자는 바뀌지 않지만, 분모가 줄어들기 때문에 얻은 몫은 더 커진다. 동림당의 철학은 바로 이런 초등수학이었다.
제당, 절당, 초당은 비록 소규모당이지만, 약한 당은 아니었다. 그저 대오의 기세가 조금 약할 뿐이었다. 절당은 수보 심일관(沈一貫)이 만들었고, 이 당은 정치 주진지를 점거했다. 후계자인 방종철(方從哲)도 수보에 오른다. 제당, 초당 두 당은 비록 혁혁한 고관이 없었지만, 관료사회에서 그래도 당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래도 뭔가 믿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그들의 우세는 바로 언관(言官)이 많다는 것이다. 국가의 선전, 여론을 조작할 수 있다. 남이 돈을 벌지 못하게 만들거나, 남이 머리아프게 하는 것은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삼당은 동림당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건 확실했다. 동림당의 삼거두인 고헌성(顧憲成), 추원표(鄒元標), 조남성(趙南星)은 하나같이 대단한 인물들이다. 고헌성은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풍성우성독서성성성입이(風聲雨聲讀書聲聲聲入耳)
가사국사천하사사사관심(家事國事天下事事事關心)
추원표는 감히 장거정과 맞섰던 인물이다. 조남성은 몰라도 상관없다. 그는 이부상서이고 조직인사를 담당하는 인물이다. 그를 모른다면 그건 단지 관료사회에서 너무 낮게 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고, 잠시 그에게 훈계를 들을 자격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실 한 당내의 3명의 우두머리가 모두 대단한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일언구정(一言九鼎)이 되지 않고, 삼언이십칠정(三言二十七鼎)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통일하고 행동을 통일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천계2년이 되어, 형세가 변한다. 고헌성이 죽고, 추원표는 영광스럽게 물러난다. 이제 남은 것은 조남성이다. 그는 당내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누리며 조정을 장악한다.
조남성은 민감하게 유리한 전기를 파악한다. 바로 천계3년이다. 이 해는 관료를 교체하는 시기이다. 즉 6년에 1번씩 있는 "경찰(京察)"이 있는 해이다.
조남성은 인사교체업무를 주재한다. 간부를 조정하고, 안배하기 전에, 장엄하게 사전고찰을 시행한다. 고찰해서 결과가 나오자, 먼저 4명을 관직에서 제명한다.
어떤 4명인가? 기시교(亓詩敎), 조흥방(趙興邦), 관응진(官應震), 오사량(吳嗣亮)이다. 기시교는 제당의 우두머리이고, 관응진, 오사량은 초당의 우두머리이며, 조흥방은 절당의 중견이다. 이들 네명을 처리한 것은 두 당의 '일인자'를 없애고, 한 당의 '최고위원'을 없앤 것이다. 조남성의 이 조치는 평범하지 않다. 그렇게 되니 나머지 세 당은 내부회의를 하는데 주재할사람이 문제가 된 것이다.
조남성이 남긴 이미지는 아주 풍부하다. 엄숙할 뿐아니라 활발하다. 그는 일지기 <소찬(笑贊)>을 저술했다. 이는 풍몽룡의 <소부(笑府)>, 석성금의 <소득호(笑得好)>와 유희주인의 <소림광기(笑林廣記)>와 더불어 중국고대 "소림사서(笑林四書)"로 불린다. 그러나 실제업무때의 조남성은 전혀 유머스럽지 않았다. 그가 이번에 칼을 뽑아들자 3개당은 저의 모두 잠잠해 진다.
동림당이 대거 반대파를 제거하자, 위충현의 안녕도 일시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사건을 일으킨 것은 문진맹(文震孟)이다. 그는 천계2년의 장원(壯元)이다. 출근한지 몇달만에 그는 <근정강학소(勤政講學疏)>르 올린다: "황상이 아침 일찍 조정에 나오고 춥거나 더울 때도 거르지 않으니 정무에 근면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정의 실질은 보이지 않는다. 홍로경이 주청을 할 때 무릎을 꿇고 절하고 일어나니, 마치 괴뢰의 등장과 같고, 생기가 없다."
문진맹의 이 글을 보면 그가 관료사회의 초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황제가 제 시간에 조회에 나오고 한번도 늦게 나오거나 일찍 들어간 적이 없어, 출근에 힘을 다하고 있으며, 이는 관료사회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면 다 알고 있는 일이다. 황제가 국사에 관여하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천계제의 할아버지인 만력제는 오랫동안 조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뛰어난 조종수단때문에 사람들은 수중에 권력을 갖지 못해서 매일 지내기 어렵지 않았던가?
문진맹의 다음 문구는 그가 확실히 장원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폐하께서 여러 신하들과 어울리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만 만나고 환관이외에는 보지 않는데, 그들이 어찌 제왕의 굉원(宏遠)한 규모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문관집단의 진실한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개략적인 의미는 황제로서 우리와 한 편이 되어야 하고, 환관과 어울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황제로서의 능력이나 수준이 문제된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근정강학소>에서는 전혀 위충현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문진맹의 천계시기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이 황제의 수권대상에 대한 불만이지, 위충현 개인에 대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충현은 이 상소문을 받고,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문진맹의 '괴뢰등장'이라는 몇 마디에 위충현도 불만이고, 천계제도 불만이었다. 그래서 성지가 내려온다. 문진맹은 정장(廷杖) 팔십대를 명한다. 문진맹이 비록 신과 장원이지만, 그는 오십몇세의 사람이다. 사십대를 맞으면 아나도 죽어버릴 것이다. 문진맹은 하룻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른다는 식으로 문관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지만 내뱉지 못했던 말을 했다. 그래서 모두 나서서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차보(次輔) 한광(韓爌)이 아주 적극적이었다. 결국 문진맹은 정장을 면했지만, 좌천을 당한다.
문진맹이 앞장서자, 뒤에서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 천계3년부터 천계4년까지, 반대의 물결이 계속 일어난다. 전략은 점점 '황제와 환관'을 같이 공격하다가, 서서히 '위충현'을 맹공하는 것으로 바뀐다. 이것은 뛰어난 전략이다. 만일 이번 '참수행동'이 성공한다면 권력은 자연히 문관집단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그중 큰 몫은 당연히 동림당의 것이다.
위충현은 확실히 이런 기세를 접한 적이 없다. 그래서 자신은 분명히 충성스러운 마음 하나로 황제를 위하여 일하는데, 왜 갈수록 많은 대신들이 그를 싫어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천계제는 문관들을 원래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고 호감도 없었다. 사람들이 위충현을 공격하자, 그는 오히려 위충현에게 더욱 상을 많이 내린다. 천계제의 태도는 명확했다. 동림당은 일시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게 된다.
투쟁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은 역대 이래의 진리이다. 천계제가 즉위한 후 3년동안, 위충현의 지위는 취약했다. 조정에도 정치적 기반이 없었다. 동림당이 모두 들고 일어나 공격하니, 위충현은 비로소 '당'을 만들려는 행동을 하게 된다. 황제가 위충현을 극력 보호해주고 있으므로, 원래 동림당에 기대를 걸던 사람들은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
진정한 엄당은 동림당의 최초공격이 좌절된 후에 형성된다. 위충현의 당에 처음 들어온 것은 고병겸(高秉謙), 위광미(魏廣微)등이다. 고병겸은 예부상서이다. 그는 가연(家宴)때 위충현에게 머리를 땅에 박고 절을 하며 말했다: "원래 슬하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백발의 아들은 좋아하지 않으실 것같아서, 아들로 하여금 손자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칠십여세로 앞으로 살 나이도 얼마남지 않았는데, 아들을 데리고 함께 엄당에 들어간다. 그리고 강력한 투쟁의지를 보인다. 이는 실로 보기 드문 경우이다. 천귀총독(川貴總督) 장아속(張我續)은 고병겸을 그대로 따라하기는 뭣하니, 그의 집에 있던 여종이 마침 위충현의 집안 여자였다. 그래서 '그녀를 적처(嫡妻)보다 위로 모시고, 경성에 들어갈 때는 8명이 드는 가마를 태우고, '위태태(魏太太)'로 부렀다" 장총독은 이때부터 위씨의 고모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위광미를 얘기해야 하는데, 그에게서는 입당의 좋은 점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위충현의 배양하에 2년만에 위광미는 예부시랑(차관)에서 예부상서(장관)으로 승진하고, 다시 동각대학사(부총리급)가 되었다. 선진적인 당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따지지 않지만, 낙후된 당에서는 개인의 이익이 가장 중요하다. 입당해서 돈을 벌지 못하면 누가 오겠는가?
고병겸은 아마도 또 다른 유형의 대표라 할 수 있다. 그에 대하여 승관발재(昇官發財)나 이상신념을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후안무치한 말이다. 그 자신 조차도 후안무치하다고 느꼈다. 위충현에게 온 것은 주로 압박받던 다른 당의 당원이나, 무당파인물들이다. 그리고 잘못을 범해서 새로 주인을 찾지 못한 간부들이다. 우두머리가 있으면 생활이 편해진다. 약간의 보호비만 내면 되는 것이니 괜찮은 선택인 것이다.
다른 일부 동림당의 당원은 아예 시류의 흐름에 따라 이 날로 커져가는 위충현의 엄당에 가입한다. 결론적으로, 온 사람이 너무 많았다. 중간은 생력하겠다. 위충현당에 이름있는 당원이 '오백의손(五百義孫)'이 있다. 천팔배의 무리가 있다. 하나하나 얘기하자면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원인도 아주 복잡하다. '누구든지 오면 혜택이 있다'는 것이다.
소위 태산은 흙을 마다하지 않기 대문에 클 수가 있었고, 강과 바다는 가는 냇물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깊을 수가 있었다. 동림당 내부에서 누가 구체적인 조직업무를 담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상대방의 장점을 흡수하고, 위충현당의 선진적인 조직건설경험을 받아들였더라면, 최소한 그렇게 나쁜 결과는 얻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동림당의 주요책임자로서 조남성은 무능하지가 않다. 그의 영도하의 동림당은 성공적으로 집정한 삼당(제당, 절당, 초당)을 무너뜨렸다. 동시에 위충현당이 크고 강하게 커지는 것을 주목한다. 그러나 그는 배울 생각이 없었다. 배우지 않은 원인은 그의 지향(志向)이 원대하기 때문이다. 그의 목표는 일당독재였다. 조치는 원래의 방법이다. '새로운 상대가 나타나면 그를 친다'
위충현은 스스로에 대하여 분명하게 인식하고 잇었다. 자신의 문화수준은 너무 한계가 있었고, 명성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조화공존을 추구한다. 너는 너의 것을 가지고, 나는 나의 것을 가진다. 너는 네 밥을 먹고, 나는 내 밥을 먹는다. 남의 먹거리를 가지고 싸우지 않는다. 이 목표를 위하여 위충현은 심지어 조남성과의 만남까지 가진다.
이번 만남에서, 위충현은 아마도 좋은 결과를 예상했었던 것같다. 절강출신, 산동출신, 호북출신,동향회와 당조직은 모두 하나의 기구 두개의 간판이다. 우리 하북(북직예)의 고향사람들은 그들을 배우지 않을 것이다. 동림-위당 합작 혹은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만남의 분위기는 우호적이지 못했다. 만남에서 무슨 건설적인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조남성을 핵심으로 하는 동림당은 '정의'가 '사악'을 이겨야 한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정의'가 '사악'을 이긴다 이 말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정의'가 되려면, 전제는 네가 '사악'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겸허하게 '사악'이지만 '정의'를 이겼다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역사에 나타난 적이 없다.
이런 지도사상으로 죽기살기식의 결전은 이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천계4년 육월의 일이다. 남창사람이 동림당중견파를 향한 첫 공격을 시작한 후, 양련을 대표로 하는 동림당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새로운 전투를 시작한다. 위충현반동파를 소멸시키기 위한 공격을 개시한다.
정확히 목표를 정했다. 위충현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위충현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련의 도전서에는 위충현의 24가지 대죄를 열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련은 마치 전자오락게임에 빠진 것같고, 위충현은 마치 수퍼마리오처럼 24개의 목숨을 가지고 있는 것같다. 하나가 죽더라도 나머지 23개는 계속 앞으로 달려간다.
위충현은 어떻게 했는가? 그는 계속 관료사회의 조화공존을 추구한다. 양보한다. 동림당은 그러나 그렇게 보지 않았다. 모조리 죽이고, 일당독재를 실행하려 했다. 그래서 양련이 공격의 포성을 울리자, 모든 당원들이 전면 돌격하며, '죽이라'는 고함을 질러댄다.
국자감의 천여명의 학생들이 함께 상소를 올린다. 위충현의 입장은 난처해진다. 출근할 때도 갑옷을 입은 수백명의 환관들이 호위를 해주어야 했다. 이렇게 근 반년동안 가슴을 졸이며 살았다. 반년이 지난 후인 천계4년 십월, 위충현은 싸우지 않고도 승리한다. 동림당은 열심히 싸웠지만 패배한다.
이것은 무슨 연극의 장면이 아니다. 사실이 그러하다. 천계제의 성지가 내려온다. 그는 조남성이 결당영사(結黨營私)한다고 질책한다. 이어서 다시 지시가 내려온다. 여기서 질책받는 것은 고반룡(高攀龍), 양련, 좌광두이다. 동림당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최고지도자가 직접 거명한 조남성, 양련, 좌광두는 모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섭향고(葉向高)는 지휘책임을 추궁받지는 않았지만, 체면이 없어져서 인감을 고병겸에게 넘겨준다.
한광은 이틀간 반성하고 역시 떠난다.
불가일세의 동림당이 불가사의하게 흩어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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