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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위충현)

위충현의 엄당(閹黨)을 키워준 것은 동림당이다.

by 중은우시 2018. 3. 7.

글: 정만군(程萬軍)


위충현과 동림당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하나는 극단적 현실주의자이고, 하나는 극단적 이상주의자이다. 대다수의 세숙인들에게 있어서 어디가 더욱 흡인력을 가질까?


위충현과 동림당의 투쟁을 이야기하자면, 연원이 있다.


일찌기, 위충현이 아직 세력을 키우지 못했을 때, 동림당과 정면으로 싸운 적이 있다.


바로 이궁안이다. '태자빼앗기'사건에서, 이선시의 근시태감으로, 위충현은 동림당인에게 태자를 빼앗기고 만다. 그와 그의 주인인 이선시는 모두 동림당의 수하패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궁안을 통하여 동림당은 완승을 거두었고, 조정은 온통 동림당 일색이었다. 이때의 동림당은 비록 엄당의 위협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마음 속으로 위충현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위충현이 비록 황제의 심복이기는 하지만, 동림당은 쟁국본, 정격안, 홍환안, 이궁안까지 4번의 전투에서 모두 이겼고,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사람은 변한다. 적수도 마찬가지이다. 삽십년하동이면 삼십년하서이다. 이궁안이 끝난 후, 동림인의 세력은 유례없이 커진다. 위충현도 조용히 세력을 키운다. 위충현을 우두머리로 하는 동림당에 충분히 대항할만한 정치집단이 나타난 것이다. 엄당이 탄생한 것이다.


엄당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 단어의 뜻 그대로 내시의 조합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엄당의 주요인물은 태감이 아니라 대신이다. 위충현의 심복은 대다수가 조정대신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어떤 사람들인가 왜 동림당에 붙지 않고 위충현에게 붙었을까?


주요 다음과 같은 세 부류이다.


첫째, 동림당과 뜻이 다른 대신. 뜻이 다르면 같이 일을 도모할 수 없다.

둘째, 동림당내각에 의해 처분을 받은 인물

셋째, 동림대각에서는 영원히 승진을 바랄 수 없는 인물.


우리는 대표인물을 하나 들어보자. 최정수(崔呈秀).


그는 위의 세 가지를 모두 갖추었다.


최정수는 계주(薊州) 사람이다. 즉 오늘날의 천진시 계현이다. 만력41년에 진사가 되었다. <명사>에는 그의 사람됨에 대하여, "비오교회(卑汚狡獪), 불수사행(不修士行)"이라고 했다. 비열하고, 더럽고 교활하며, 선비의 행실을 닦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줄서는 것은 좋아한다. 말하자면 웃기지만, 처음에 최정수는 동림당의 추종자였다. 동림당이 이삼재(李三才)를 입각시키려 할 때, 그도 목소리를 높였었다. 다만, 낙화유의, 유수무정이라고, 동림당사람들은 그를 자기편으로 정식 받아들이지 않는다. 천계초기, 최정수는 어사, 순앙회양을 맡아서, 무석의 동림서원을 지날 때, 다시 한번 이곳이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데 끌려서 발을 멈추고 구경하고, 강의를 듣는다. 그래서 동림당에 들어갈 생각을 한다. 다만 동림의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동지는 될 수 없지만, 상관없다. 반드시 적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이어져 발생한 한 가지 사건으로 정말 그는 친구가 아니라 적이 되어 버린다. 최정수는 동림당과 반목하고 원수가 되는 것이다.


무슨 일인가? 사서 <명계북략>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최정수는 돈을 아주 좋아하는 관리였다. 그리고 뇌물을 받아내는데 아주 능했다. 그가 어떻게 뇌물을 받아냈는가? 원래 어사는 백관을 감찰하는 직위이다. 부정부패를 잡아내는 간부이다. 그러나 그가 오히려 부정부패를 저지른 것이다. 그가 어떻게 부정부패를 저질렀는가?


예를 들어, 이 최정수는 매번 고발장을 받을 때마다 고발당한 관리를 불러서 같이 차를 마신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연 자료를 끄집어내어 그 관리의 앞에 흔든다. 그러면서 '누군가 당신을 고발했다'고 말한다. 너의 뇌물액이 너무 크고, 재산을 어떻게 모았는지도 물명확하니, 이 일이 황상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너에게는 흉다길소(凶多吉少)할 것이다라고 말해준다. 일반적으로 고발당한 관리를 그 말만 듣고도 두려워진다. 그래서 바로 돌아가서 최정수에게 돈을 보내게 된다. 이렇게 가볍게 돈을 버는 것이다. 그래서 최정수는 이렇게 하면서 지방을 하나퀴 돌았고, 재물을 가득 거두어서 돌아온다. 그는 이렇게 재물을 모았다.


최정수의 행위는 동료들마저도 불만스러워하고, 분노한다. 어떤 사람은 부러워하고, 어떤 사람은 의분을 가지고 도저히 참아넘기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최정수도 고발당한다. 당시 주관관리가 바로 동림당 원로로 이부상서인 조남성(趙南星)이었다. 조남성은 일처리를 바르게 했고, 최정수와 같이 부정부패를 막아야할 관리가 오히려 부정부패를 저지른 것에 분노한다. 그래서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조사를 시작한다. 


최정수는 관직을 잃고나자 분명히 알았다. 자신은 동림당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바로 방향을 바꾸어, 위충현이 집으로 달려간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위충현이 발을 붙잡고 의부로 모신다. 위충현은 마침 사람이 필요할 때였으므로 바로 최정수를 받아들인다. 이 의자(義子)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후에 천계제의 앞에서 최정수를 위하여 몇 마디 변명을 해준다. 원래 최정수는 청렴한데, 그는 무고를 당한 것이라고. 그리하여 최정수는 관직을 회복하게 된다. 그후에 오히려 발탁되어 승진까지 한다. 병부상서라는 고위직까지 올라간다. 이때부터 최정수는 죽기살기로 위충현의 편에서 일을 한다. 위충현의 심복이자 막료가 된다. 위충현의 문신 "오호(五虎)"를 꼽을 때 그 우두머리로 꼽힐 정도이다. 나중에 위충현과 동림당의 투쟁에서 엄당두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동림당이 위충현에게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거의 모든 동림당인은 이 위충현의 능력을 저평가했다. 동림당은 몰랐다. 위충현의 뒷심이 얼마나 센지. 천계2년, 사례감병필태감으로 승진한 것을 표지로, 위충현은 자신의 당을 조직한다. 엄당. 이미 그는 그의 말만 듣는  나라안의 나라를 만든 것이다. 


이 나라안의 나라, 독립왕국에는 태감만 운집한 것이 아니라, 많은 그가 부르지도 않았지만 스스로 찾아온 괸리들까지 포함되었다.  그 중에는 내각과 육부의 고관도 많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이들 내각과 육부의 고관들이 위충현의 편에 서려고 했을까, 동림당의 편에 서지를 않고?


필자가 위에서 마한 세 가지 원인 이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용인책략(用人策略)이다. 동림당의 용인책략은 무엇인가? 사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동림당의 기세가 막 흥성할 때, 천하의 청류(淸流)를 다 끌어 모았다. 그들이 청류라고 여기면 그들과 같이 갈 수 있고, 만일 그들이 정한 청류의 기준에 적합하지 않으면 동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동림당은 인품을 조사해서 동림의 기준에 맞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경중을 구분했다. 이런 용인관을 보면 동림당의 용인관은 전통적인 유가의 용인관이다: 군자입사(君子入仕). 즉 군자만이 정치를 하고 관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가치관이다.


실사구시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비과학적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세계는 군자와 소인을 제외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속인이다. 즉, 속인(俗人)이다. 속인은 군자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소인에 속하지도 않는다. 흑도 백도 아닌 사람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을 일률적으로 흑백으로 나누고 군자와 소인으로 구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동림당인은 용인방면에서 전과를 매우 따졌다. 즉 그의 역사문제를 많이 따졌다. 예를 들어, 천계2년, 동림당인이 가장 흥성했을 때, 당연히 관리들이 대동단결해서 같이 대사를 도모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추후산장(秋後算賬)을 한다. 동림당의 한 간장, 정격안의 관건인물인 형부주사 왕지채(王之寀)는 이때 이미 형부우시랑의 지위에 있었는데, <복구소(復仇疏>를 올린다. 그 내용은 개략 이러하다:


"군주와 부친의 원수는 불공대천이다. 명광종은 일생동안 여러 어려움을 겪고, 한을 품고 죽었다. 이가작은 홍환을 바쳤고, 최문승은 설사약을  바쳤는데, 누가 배후에서 조종했는가? 장차는 몽둥이를 들고 동궁에 쳐들어갔는데, 안위가 호흡지간이었다. 그가 궁으로 쳐들어간 것은 분명 안에서 호응해주고 밖에서 지원해주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외척 정국태(정귀비의 동생)는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이는 확실히 지난 일을 다시 들추어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뜻이다. 조정의 대신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따져서 삼궁안때 어떻게 했는지 오점은 없는지를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동림당의 편에 섰는지 정의의 편에 섰는지를. 결과적으로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않게 된다. 많은 대신들을 핍박하다보니 그들이 모두 위충현에게로 간다. 동림당과는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든 조그마한 잘못이 없겠는가. 누구에게 약점이 없겠는가. 사람이 완벽할 수 있는가. 필자의 생각으로 세상에서 오직 두 종류의 사람만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하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사람이다. 동림당의 결벽증을 다른 사람들이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위충현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용인관은 무엇인가? 오는 자는 막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네가 재주만 있으면 나를 따르라는 것이다. 그러면 관직도 주고 작위도 주겠다는 것이다. 이런 용인관은 동림당과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하나는 극단적인 이상주의, 하나는 극단적인 현실주의이다. 비록 양자는 모두 극단적이지만, 대다수의 속인에 있어서 그래도 현실주의가 더 끌리는 법이다.


이것은 청관(淸關)을 따를 것인가. 탐관(貪官)을 따를 것인가의 문제이다. 청관을 따르려면 문턱도 높고, 콩고물도 남는게 없다. 탐관을 따르면, 문턱도 낮고, 혜택도 있다. 그래서 동림당의 이런 용인관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위충현에게 빌붙게 만들고, 엄당이 커지도록 만들었다.


역량의 대비는 조용히 바뀌고 있었다. 천게4년, 동림당이 휘황하고 전성기에 도달했을 때, 엄당의 세력도 중천에 뜬 해와 같았다. 위충현이 만든 정치집단은 사상 최강의 엄당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신에는 "오호"가 있고, 무신에는 "오표(五彪)"가 있으며, 타수(打手)로 '십구(十狗)'가 있고, 마자(馬仔)로 '십해아(十孩兒), 사십손(四十孫)'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호'는 바로 조정의 5명 문관막료이다. 병부상서 최정수, 공부상서 오순부(吳淳夫), 대상소경 전길(田吉), 태상경 예문환(倪文煥), 좌부도어서 이기룡(李夔龍).


최정수는 우리가 앞에서 이미 소개했다. 최정수를 제외하고, 오호중 나머지 사호는 최정수의 상황과 대동소이했다.


이호 오순부는 복건 천주 사람이다. 만력38년에 진사가 되었고, 천계초기에 섬서첨사를 지낸다. <명사.오순부>에 따르면, 그는 독직으로 '경찰'에서 파직당하고 천주로 돌아간다. 동림내각에 의하여 경찰에서 독직으로 판단되어 파직당한 것이다. 그러나 오순부는 바로 위충현의 편에 서고, 그 후에 시운이 바뀌어서 계속 승진하고, 관직이 공부상서에 이른 것이다. 


삼호 이기룡은 복건 남안 사람이다. 만력38년진사이고, 이부주사를 지냈다. 동림언관에게 탄핵당해 관직을 잃는다. 그 후에 위충현의 엄당에 들어온 후에 승진을 거듭해서 좌부도어사가 된다.


사호 예문환은 강소 양주 사람이다. 천계년에 진사가 되었고, 관직은 어사에 이른다. 성격이 포악하고 조급했으며, 싸우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위충현의 편에 서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작은 사건때문이다.


한번은 예문환이 황성에 들어갔는데, 아마도 그는 증빙을 가져오지 않았던 것같다. 그래서 수위가 못들어가게 막았다. 화가 난 예문환은 바로 주먹을 날려서 그 수위를 팬다. 황성의 위병은 비록 일개 병사이지만 그의 신분에는 상징성이 있다. 그는 황제와 황성을 상징한다. 예문환의 행위는 당연히 국가법률에 저촉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관리가 바로 그의 죄를 탄핵하려고 준비했다. 예문환은 겁이 나서, 두려움에 떨다가 위충현에의 심복중 오호의 우두머리인 최정수를 찾아간다. 두 사람은 평소에도 왕래가 있었다. 예문환은 최정수가 자기에게 살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바란다. 당시 위충현은 조정에서 사람을 끌어모으고 있을 때였다. 최정수는 예문환을 위충현에게 추천한다. 위충현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으니, 이런 일은 쉽게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예문환이 저지른 죄를 가벼운 것으로 처리해주고 끝낸다. 예문환은 위충현의 도움에 감사하여 위충현의 의부로 모신다. 그후 이 예문환의 주요 임무는 모함이다. 전문적으로 위충현에 협력하지 앟는 조정의 정직한 관리들을 모함해서 끌어내리는 것이다. 예문환은 모함에 재주가 있었다. 그에게 모함당해서 관직을 잃고 목숨을 잃은 자가 수십명이다. 예문환이 사람을 처리하는데는 특징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직접 공격하지 않는다. 그저 낙정하석을 할 뿐이다. 먼저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목표를 공격해주기르 기다렸다가 그는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보면 곁에서 힘을 보태고, 진화타겁(趁火打劫)하고, 미친듯이 물어버리는 것이다. 대다수의 모함받은 관리는 그가 이렇게 물어제끼면 거의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오호 전길은 하북 보정 사람이다. 만력38년진사이고 초임은 지현이었다. 재물을 탐하여 명성이 아주 나빴다. 그러나 그는 관료집안 출신이고, 숙부인 전이경(田爾耕)이 위충현이 대아(大兒)였다. 그래서 이 관계를 타고, 위충현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 결과 업적이 없는 그가 오히려 강등당하지 않고 진급한다. 그래서 태상소경이 된다. 태상시는 대명왕조의 최고예의기관이다. 소경은 태상시의 행정책임자이고, 정사품의 관직이다. 예의염치도 없는 사람이, 국가의 예의를 담당하는 주요관리가 되다니, 이 국가의 도덕은 어찌 이렇게 타락했단 말인가.


이것이 '오호'의 상황이다. 그럼 '오표'는?


소위 오표는 바로 수도를 경비하는 오대무관이다. 금의위좌도독 전이경, 금의위도지휘첨사 허현순(許顯純), 금의위지휘 최응원(崔應元), 동창이형관 손운학(孫雲鶴), 금의위우도독 양환(楊寰)


전이경은 하북 임구 사람이고, 관료자제이며, 전길의 숙부이다. 전이경의 부친은 일찌기 병부상서를 지냈다. 전이경은 조상의 공에 아부를 잘한 공으로, 위충현을 의부로 모시고, 위충현의 '큰아들(大兒)'이 된다. 그후에는 비황등달한다. 군공 음서로 금의위에 관직을 얻고, 천계4년이후 금의위를 장악한다. 관직은 금의위 지휘사, 좌도독에 이른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랑탐지행(狼貪之行)'이다. 전이경 치하의 금의위는 인간지옥이다. 명사에서는 '감옥에 들어가면 죽지 않으면 나오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곳의 고문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곳이다.


허현순은 하북 정흥 사람이고, 무과거인출신이다. 사서에는 그의 성격이 극단적으로 잔혹하다고 적었다. 살인을 하고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세내력은 깜짝 놀랄 정도이다. 조상은 토비가 아니라 귀족이다. 그의 조부인 허종성(許從誠)은 부마도위이다. 즉 가정제 명세종 주후총의 다섯째 딸인 가선공주의 남편이다. 그래서 그는 가정제의 외조카손자가 된다. 황실의 인척이다. 다만, 황제의 외조카손자보다 권력자의 의자(義子)가 더 그의 성격에 맞았다. 그는 위충현의 문하로 들어갔고, 위충현의 '의자'가 된다. 위충현은 그를 가장 빠른 살인도로 보았고, 그를 금의위 지휘첨사로 임명한다. 천계4년에는 진무사장관이 된다. 즉 황실감옥의 감옥장이다.


오표의 나머지 세 사람 최응원, 손운학, 양환은 모두 시정무뢰배이다. 모두 아부를 잘하고, 악독했다. 그래서 창위의 중급관리로 성장한다.


소위 '십구'는 위충현을 따르는 내각의 주요관리들이다: 동각대학사 고병겸(顧秉謙), 건극전대학사 위광미(魏光微)이 있다.


고병겸은 강소 곤산 사람이다. 역사에서는 그를 "용진무치(庸塵無恥)"라 했다. 그는 매우 용속되고 부끄럼을 모른다는 것이다. 만력23년진사가 되었고, 서길사, 편수를 지냈으며, 예부우시랑까지 지낸다. 천계원년에는 예부상서, 장첨사부사로 승진한다. 천계2년 위충현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는 앞다투어 위충현에 빌붙는다. "위충현을 모시는 것이, 노비가 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위충현의 앞에서 노비처럼 행동했다. 천계3년, 고병겸은 내각에 들어가서 동각대학사가 되어 주요국가업무를 처리한다. 천계5년 정월에는 소부(少傅), 태자태사(太子太師), 이부상서로 승진한다.구월에는 소사(少師)가 된다. 그는 뜻이 다른 인물을 배척하고 잔혹하게 박해하는데 능했다. 그리하여 억울한 사건을 많이 만든다. 비록 한림출신이어서 학식은 뛰어났지만, 부끄럼을 모르는 것도 남달랐다. 그는 위충현이 찾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갈 정도로 부끄럼을 몰랐다. 천계초기, 이미 상서라는 고위직에 있는 고병겸은 나이가 71가 되어서 곧 은퇴할 나이인데도, 거기서 더욱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대신들은 그를 멸시했다. 그러자 그는 아예 위충현에 빌붙어 '재상의 꿈'을 실현한다.


위광미의 상황은 비교적 복잡하다. 그는 명문의 후손이다. 위광미의 부친인 위윤정(魏允貞)은 유명한 철면어사이고, 권력귀족을 탄핵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수보 장거정조차도 그에게 탄핵을 당했을 정도이다. 위윤정은 동림당의 중요인물인 조남성과는 막역한 친구사이이다.


만력32년, 위광미는 동생 위윤중(魏允中), 위윤부(魏允孚)와 함께 진사가 되고 사람들은 '삼봉(三鳳)'이라고 불렀다. 이치대로라면 부친대의 관계도 있으니, 위광미는 동림진영에 가담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림의 적군의 편에 선다. 얘기하자면 이것도 그의 품성문제이고, 동림의 전략상 실수이다. 동림당은 위광미를 소인으로 보았다. 성격이 교활하고 기개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남경예부시랑으로 있을 때, 그를 정리대상에 넣는다. 그래서 그는 위충현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위광미는 위충현이 끌어주어 내각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으로 동림당과 대적하고 싶지 않았다. 세번에 걸쳐 조남성을 찾아가지만, 조남성은 그를 무시하고, 만나주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는 자기의 막역한 친구인 위윤정에게는 그런 아들이 없다고까지 말한다. 할 수없이 위광미는 위충현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위충현과 안팎에서 조정을 장악한다. 그리하여 그의 별명은 "외위공(外魏公)"이 된다. 그는 계속 승진하여 태자태부, 이부상서, 건극전대학사, 태자태사에 이른다.


소위 '십해아' '사십손'은 위충현의 가족이나 친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대부분은 진사출신의 문인사대부들이다. 위충현을 의부, 의조부로 삼은 의자, 의손들이다. '십해아'중에는 좌첨도어사 이로생, 어사 이번, 어사 석삼외등이 있고, '사십손'중에는 동각대학사 고병겸의 아들, 건극전대학사 위광미의 아들, 광주염주지부 위치(魏豸)의 아들....


이상의 호구해손을 제외하고, 위충현의 태감진영에도 두 명의 중요한 파트너가 있었다. 한 명은 사례감장인태감 왕체건(王體乾)이고, 다른 한명은 사례병군태감 도문보(塗文輔)이다.


왕체건은 북경 창평사람으로, 원래는 상선태감이다. 위로 올라가기 위하여, 고심해서 줄을 찾았다. 먼저 찾은 사람은 왕안(王安)이다. 나중에 왕안이 총애를 잃는 것을 보고는 다시 위충현의 줄을 잡아, 위충현의 사당(死黨)이 되어 견마지로를 다한다. 위충현과 객씨가 왕안을 제거하는 것을 돕고, 자신이 명목상 태감의 우두머리인 사례감장인태감에 오른다. 그러나 그는 누가 보스인지 잘 알았다. 항상 위충현이 시키는대로 했다. 그는 위충현의 우산을 직접 들었다. 위충현은 내정에서 일마평천으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도문보는 하북 보정 사람으로 사서 <작중지>에 따르면 "자용수아(姿容修雅)"하다고 했다. 용모가 당당했다. 그리고 그는 문리를 잘 알았고, 심계가 깊었다. 그리고 금을 타는 것과 활을 쏘기를 좋아했다. 위충현과는 취미가 잘 맞았다.


도문보의 성공은 객씨(客氏)때문이다. 그는 원래 태감이 아니라 서당선생이었다. 객씨가 입궁하여 유모가 된 후, 아들 후흥국(侯興國)이 아직 어리자, 누군가 그를 가르칠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도문보에게 그 일을 맡기게 된다. 나중에 객씨가 궁중에서 성공하고, 객씨를 따르기 위하여 도문보는 천계원년 내시가 되어 입궁한다. 이를 보면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악독할지 알 수가 있다. 입궁후에 그는 금방 누구를 잡아야하는지 알게 된다. 그래서 위충현의 줄을 잡고, 그의 말을 따른다. 객씨와 위충현의 줄을 잡고 그는 관고내시(管庫內侍)가 된다. 2년후, 다시 건청궁관사로 승진하여 직접 황상을 모신다. 하루종일 천계제가 목공일을 즐기도록 유도한다. 그의 몸에는 세 가지 정치적 자원이 다 모여 있었다: 천계, 객씨, 위충현. 그래서 승진이 빨랐다. 금방 수당태감겸 어마감장인이 되고, 총제독사위영이 된다. 동시에 태창은고와 절신고의 제독이 된다. 그리하여 엄당의 재무책임자가 된다.


명나라제도에 따르면, 태창은고와 호부는 하나의 계통이다. 절신고는 공부와 하나의 계통이다. 당연히 분리하여 관리하는 것이 맞다. 그때는 그 한 명이 총괄했다. 이는 실로 제도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를 보면 그가 얼마나 총애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도 마음껏 활보했다. 황친인 이승은(李承恩)이 집을 강제로 사버리고, 문앞의 편액에는 "호공총부(戶工總部)"라는 편액을 내건다. "총부"라는 단어는 원래 명나라초기 이부의 아래에설치한 속부의 이름이다. 나중에는 폐지하고 쓰지 않았다. 도문보가 자기의 개인집을 이전의 관청아문명칭을 쓰다니 얼마나 기세등등했는지 알 수 있다.


도문보는 호부,공부를 다니며 일했다. 부안의 주사는 모두 그에게 속하로서 예를 표한다. 그가 타고 다니는 여덟명이 드는 가마는 기도가 비범했다. 장안도를 활보하며 다녔고, 뒤따르는 노복이 백명이 넘었다. 고대의 고관이 출타할 때, 노비중에는 소리를 질러 길을 너주는 '도자(道子)'가 있는데, 가는 길에 큰 소리로 외친다: "교자가 온다. 앞의 차량은 비켜라. 비켜라!' 도문보의 대오가 나오면 "각신의 도자보다 훨씬 우아했다. 그 목소리는 가늘고 길어서 마치 황상의 가마같았다." 내외관리들이 모두 길을 비켰다.


입궁한 때로부터 도문보는 4년만에. 병필태감의 위치에 오른다. 그의 기세는 위충현의 신변에 있는 그 어느 태감보다 대단했다. 위충현의 심복으로 그는 일찌기 이렇게 자랑한 바 있다: "안에는 도문보가 있고, 밖에는 풍진로(馮振鷺, 馮銓)가 있다!" 그와 엄당의 외정 2호인물인 풍전을 나란히 말한 것이다. 이미 내정에서 위충현의 다음가고, 왕체건보다는 위인 인물이 된 것이다.


이상의 엄당의 진용을 보면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중앙정부, 궁정내외, 각지총독순무가 모조리 위충현의 일당이다. 내각육부에서 지방독무에 이르기까지, 위충현이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각각 다르고, 전국각지에 펼쳐져 있으며, 병강마장(兵强馬壯)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세력은 동림당에 비하여 전혀 약하지 않다. 심지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후인 숭정초기에 '위당역안(魏黨逆案)"을 조사할 결과, 모두 공모자 6인, 교결근시 19인, 교결근시차등 11인, 역얼군범 35인, 함부용대군범 15인, 교결근시우차등 128인, 사송 44인, 합계 158명이다. 만일 '누망(漏網)' 57인까지 합하면 315명이다. 이를 보면 위당의 성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그 수는 일백팔장인 동림의 3배가 된다.


당연히 이들 엄당의 구성원들은 모두 한마음은 아니었다. 이전의 동림당과의 관계로 분류한 것과 비슷하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사당류(死黨類)이다. 객씨,위충현을 우두머리로 하는 병부상서 최정수, 태상소경 이기룡, 공부상서 오순부, 병부상서 전길, 죄도독 전이경등을 대표로 하는 엄당의 최고위층이다. 공동의 이익으로 그들은 하나로 묶였다.


둘째는 조아류(爪牙類)이다. 사례감장인태감 왕체건, 금의위도지휘첨사 허현순, 병부상서 곽유화등을 대표로 하는 환관집단이다. 위충현에게 충성을 다하고, 엄당에서 기른 사람들이다.


셋째는 반수류(反水類)이다. 이 부분은 엄당의 외정 구성원이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내각대학사 위광미등을 대표로 한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완전히 엄당에 동조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동림당과 엄당의 사이에서 줄을 설 때, 동림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게다가 자신의 절실한 이익추구가 있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위충현에 줄을 섰다.


이중 셋째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위광미를 제외하고 또 한 명의 중요인물이 있다. 그는 이 셋째유형의 전형적인 대표자이다. 그는 바로 만명사상 오명을 떨친 완대성(阮大鋮)이다.


완대성은 안휘 동성 사람이다. 좌광두와 같은 고향 사람이다. 동림당과 엄당의 사이를 교차하는 이중적 인물이다. 만력44년 진사가 되어 급사중이 된다. 완대성은 일찌기 동림에 이름을 올리고, 고반룡(高攀龍)의 제자가 된다. 같은 고향사람인 좌광두는 동림당 동성파(桐城派)의 영수이다. 또한 완대성이 의지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절당(浙黨) 방종철(方從哲)과의 투쟁에서 완대성은 큰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동림의 골간으로 이름을 날린다. <동림점장록>에서의 별명은 "몰차란(沒遮攔)"이다. 


천계4년 봄 이부도급사중의 자리가 빈다. 좌광두는 완대성에게 경성으로 와서 그 자리를 맡으라고 통지한다. 그런데 조남성, 고반룡, 양련등이 완대성의 인품을 가지고 '재주는 있으나 덕이 없다'는 이유로 좌광두가 동향인물을 발탁하는데 반대한다. 그리하여, 고반룡의 또 다른 제자로 품성이 고상한 위대중(魏大中)에게 그 자리를 맡긴다.


완대성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자리는 이미 없었다. 원래 경력으로 본다면 당연히 완대성이 승진해서 앉아야 했다. 그러나 맡지 못한 것이다. 완대성은 분노를 참지 못한다.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고 여긴 것이다. 이때 위충현이 나타나서 손을 벌린다. 빈 자리를 완대성에게 주어서 그의 바램을 이루어지게 해준다. 다만 완대성이 부임한지 1달만에 동림대신의 탄핵이 이어지고, 그는 놀라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도망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위충현이 부른다. 경성에 돌아와서 태상소경이 된다. 동림당은 완대성을 계속 버리고, 위충현은 반복하여 완대성을 기용했다. 그래서 완대성은 위충현의 지우지은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 이때부터 그는 동림출신으로 동림의 반대편에 선 대표인물이 된다.


그리고, 동림내각에 의해 쫓겨난 서대화(徐大化)가 있다.


천계4년 여름, 그는 계해경찰에서 크게 다친다. 그러자 바로 위충현의 문하로 들어간다. 나중에는 동림가 원한이 있는 사람들을 위충현에게 데리고 와서 인원을 확충한다. 예를 들어 이전에 동림 이삼재를 공격했던 소보충(邵輔忠)등이 모두 위충현의 편에 선다. 나중에 역안에 이름을 올린 엄당의 문관관료중에서, 동림당인의 배척을 받아 원래의 '사당(邪黨)'분자와 손을 잡은 사람이 근 50명에 이른다. 이들은 대부분 위충현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으나, 동림의 공동적이라는 입장에서 쉽게 이쪽 편에 서게 된 것이다. 하물며 이들은 원래 절개가 있는 인물이 아니었고, 조정의 국면이 변한 것을 보고는 위충현을 따르면 복수를 꾀했다. 그리고 관직도 오르니 기꺼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천계3년전에, 위충현의 주위에 몰려든 사람은 겨우 대소태감과 측근 뿐이었다. 그러나 천계4년의 '경찰' '외찰'이후에는 위충현집단이 일거에 구름처럼 많아진다. 이런 상황은 주로 동림당의 '도움'때문이다. 몰아내기 정책으로 조성된 것이다.


동림내각은 천계4년 봄에 간부를 고찰하여 일거에 중앙지방요원 338명을 처분한다. 이 300여명이 쫓겨난 것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부분은 다시 줄을 잡았다. 위충현에게 돈을 보내고, 명함을 보냈다. 새로 관직에 오를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바로 사람이 필요한 위충현은 오는 자를 막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이익을 쫗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다. 이상과 신앙은 더 높은 단계의 정신적 추구이다. 위충현의 엄당은 속인이 많았다. 다만 동림당ㅇ 비하여 사람의 본능적인 욕구는 더 잘 채워주었다. 그래서 그들의 진용은 사람수에서 동림의 3배에 이르게 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위충현이 조정의 관리들의 추종을 받게 된 것은 한 사람이 역할을 해준 것과 관련이 있다.


위충현이 궁중에는 선생이 한 명있었는데,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바로 심관(沈灌)이다.


심관은 절강 사람으로, 만력년간의 진사이다. 태창년간에 내각대학사로 승진한다. 내각에서 가장 먼저 위충현과 우의를 맺은 관리이고, 전략적합작파트너이다. 그는 원래 절당의 골간이었는데, 사대부로서 환관들과의 인연이 아주 깊었다.


심관이 처음 관료사회에 발을 디뎠을 때는 한림원에 들어가서 내서당에서 가르친다. 소위 내서당(內書堂)은 바로 명나라 환관의 교육기관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명나라가 건립된 초기에, 명태조 주원장은 태감의 정치간여를 막기 위하여, 환관에게 글을 읽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다만 명나라중후기에 이르러, 주원장의 자손들의 집권능력이 떨어지면서, 반드시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환관들이 중용되기 시작한다. 황제를 대신하여 문건을 정리하고 처리하게 하기 위하여, 학문이 없으면 곤란했다. 그래서 궁중에 이런 학당을 세운 것이다. 내시로 10세가량인 자들 2,3백명을 모아서 교육시키는 것이다. 한림원의 관리중에서 선생을 뽑았다.


심관은 바로 이런 선생의 역할을 하면서 환관들에게 수업을 한다. 그는 환관의 스승이다. 그가 가르친 환관들은 그를 스승으로 모신다. 처음에 입궁한 위충현은 비록 나이가 적지 않았지만, 자유롭게 내서당을 드나들 수 있었고, 수시로 강의를 들었다. 심관은 그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위충현도 심관의 제자라 할 수 있다. 태창제가 즉위한 후, 절당의 우두머리인 방종철이 내각을 만드는데, 심관이 중용된다. 그는 내각에 들어가 대학사가 되어 국가주요업무에 관여한다. 입각후, 심관은 위충현과 연락했다. 자금성의 "내조(內操)"는 바로 그의 아이디어이다. 이 아이디어로 위충현은 어림군을 장악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자신의 무장세력을 배양한다. 위가군(魏家軍). 심관의 기획하에, 위충현은 집행한다. 궁중에서 신체건장한 태감을 모아서 금군을 만든다. 그리고 병부에서 대량의 화기를 받아와서 태감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리고 금의관에게 병사수천명을 모으게 하고, 자신의 심복을 군내에 심는다. 그들이 군중에서 요직을 맡도록 한다. 대오의 지휘부는 오문성루위에 설치했다. 위충현은 자주 이들을 대리고 자검성내에서 훈련을 했다. 이를 '내조'라 한다. 매번 '내조'때마다 위충현은 갑옷을 입고, 큰 말을 타고 군대를 순시했다. 마치 국가최고사령관 병마대원수같았다. 그의 명령하에 엄군은 훈련을 시작했고, 이들이 훈련하는 소리는 궁안을 진동했다.


내조부대의 인원수는 가장 많을 때 만명이었고, 출입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외에 위충현은 "오표"의 우두머리인 전이경으로 하여금 금의위를 장악하게 한다. "이표" 허현순은 진무이형을 맡아, 조정내외의 동정을 감시하고, 이상이 발견되면 즉시 진압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천계제의 칼은 이미 기본적으로 위충현의 손에 쥐어졌다고. 천계제는 이를 신경쓰지 않았다. 반대로 '내조'등등을 재미있어 했다. 노비들이 자기를 위하여 위풍을 세우는 것으로 보았고, 심지어 한번은 '내조'때 태감 한명이 화기를 잘못 다루어 하마터면 구경하던 황제를 다치게 할 뻔했는데도, 어린 황제는 위험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동림당쪽에서는 '입으로 떠드는' 것에 익숙하여 진정한 화기의 살상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입을 열더라도 손을 쓰지 않는다'는 그들은 즉시 무뢰배가 검은 손을 쓸 때 얼마나 쓴맛을 볼 수 있는지를 느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