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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완대성(阮大鋮): '통재(通才)'와 '간신(奸臣)'을 겸한 소인(小人)

by 중은우시 2018. 12. 28.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추사여방초(秋思如芳草)

춘래일일생(春來日日生)


이것은 어렸을 때 외웠던 몇 개의 시중 하나이다. 당시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여겨져서 아주 좋아했었다. 그러나 이 시의 작자를 얘기하려면 약간 쑥스러워진다. 그는 완대성이라는 사람인데, 역사상 유명한 간신이기 때문이다.


만일, 간신이라는 악명을 얻지 않았다면, 이 완대성은 문학사상 상당한 지위를 차지했을 것이다. 국학대사 진인각(陳寅恪)은 그의 시에 대하여, "명나라 일대의 시에서 교교자(佼佼者)이다" 호선숙(胡先驌)은 심지어 그가 "명나라때의 유일한 시인"이라고까지 하였다.


완대성, 자는 집지(集之), 호는 원해(圓海), 안휘(安徽) 안경(安慶) 사람이다. 명나라말기의 희곡작가, 시인이며, 만력제때의 진사이다. 그는 환관 위충헌에게 빌붙었고, 위충현의 엄당이 타도되자 파직당하여 고향으로 간다.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이 안휘로 들어오자 그는 남경으로 도망치고, 유협들을 모아서, 담병논검(談兵論劍)하며 조정에서 불러주기를 기다렸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들어온 후, 마사영(馬士英)은 남경에서 복왕(福王)을 옹립하고, 완대성은 병부우시랑에 기용된다. 얼마 후 다시 병부상서, 우부도어사등의 직을 겸하게 된다. 청나라병사들이 남경을 함락시키자, 그는 절강으로 도망쳤고, 나중에 청나라에 투항한다. 청나라군대를 따라 선하관(仙霞關)을 공격할 때 돌 위에 쓰러져 죽는다.


필자는 그가 일찌감치 왕단봉(王丹鳳)의 <도화선(桃花扇)>을 보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역사에서는 마완(馬阮)을 나란히 칭하는데, 마는 바로 홍광조의 권신 마사영이다. 비록 같은 간신이기는 하지만, 인품과 절개로 보면 두 사람은 같은 수준이 아니다. 마사영은 끝까지 청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항청의 최전선에 섰다. 그러나 완대성은 무릎을 꿇고 적에게 투항하여, 후세인들에게 부끄럼도 모르는 자라는 욕을 먹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마사영은 소인중의 군자이며, 완대성은 소인중의 소인이라고까지 말한다.


명나라말기에 당쟁이 치열했는데, 각종 붕당이 마지막에는 동림당과 엄당의 둘로 모아진다. 이 둘은 물과 기름같아서 서로를 용납하지 못했다. 쌍방은 "적이 반대하는 것은 내가 반드시 옹호하고, 적이 옹호하는 것이면, 나는 죽어라 반대한다"는 것이 유일한 방침이었다. 완전히 국가안위는 고려에 없었고, 기분대로 행동ㅎㅆ으며, 국가대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다.


완대성은 정종(正宗) 동림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원래 동림당의 원로인 고반룡(高攀龍)의 문생(門生)이다. 또한 동림당의 맹장 위대중(魏大中)과는 동년(同年, 같은 해에 진사에 합격한 동료)이다. '군망(郡望)'으로 따지자면, 동림의 주장(主將) 좌광두(左光斗)과 동향(同鄕)이다. 이런 신분이라면 당연히 동림당내에서 잘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개인의 전도를 위하여 엄당에 투신하고, 위충현을 양부로 모신다. 옛날의 맹우들을 박해하는 것으로 자신의 승진의 발판으로 삼는다. 그의 수단은 비열하여 인품과 명성은 완전히 도외시했다. 그리하여 동림당인들이 모두 원한을 품는 지경에 이른다.


엄당이 세를 잃으면서, 완대성도 상가지구(喪家之狗)가 된다. 숭정제가 "완대성은 전후반복(前後反復), 음양섬삭(陰陽閃爍)하니 착관대(着冠帶), 한주거(閑住去)하라"고 성지를 내린 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는 고향인 안경에서도 편안히 지내지 못했다. 어쨌든 북경에서의 비열한 행적으로 고향에서도 그의 명성은 너무 나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남경으로 가서 지내면서, 다시 기용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남경에서 십여년간 '칩거'했는데, 하루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새로 조정에 들어갈 날만을 오매불망했다. 그는 사방으로 그를 써줄만한 사람은 모두 찾아다닌다. 현재이건 장리이건, 선물이건 현물이건 모조리 구매한 셈이다. 비록 계속 벽에 부딛쳤고, 연전연패했지만, 연패연전하였다. 마침내 그는 자신을 위해 말해줄 사람을 찾았는데, 그 중에는 순무 마사영이 있었다.


마사영이 봉양총독에 기용되어, 동남지역의 실권파인물이 되고, 그 후 복왕을 성공적으로 옹립하여 홍광조정을 구성하자, 즉시 <모죄특거지병지신완대성공지시간소(冒罪特擧知兵之臣阮大鋮共濟時艱疏)>를 올려 완대성을 추천한다. 


이 상소문의 명칭은 음미할 만하다. 첫째, 완대성은 선황인 숭정제가 친히 정죄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일단 기용한다면 그것은 원래 사건을 뒤집는 것이고, 선황에 대한 불공이다. 둘째, 이 문인인 완대성이 언제부터인지 병법을 아는 사람으로 변신해 있었다. 셋째는 그가 조정에 들어오도록 추천하여 함께 위기를 넘기자고 했는데, 이는 완대성이 대충신이라는 것이고, 조정이 이 위기의 시기를 넘길 수 있도록 도와줄 좋은 장수라는 것이다.


마사영은 권신으로서, 홍광조때 그가 마음먹으면 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완대성은 다시 조정에 기용되어 병부상서가 된다. 그러나, 그는 지상담병(紙上談兵)조차 할 만한 인물이 못되었다. 당시의 상황하에서 그의 지휘를 받는 장수는 한 명도 없었다.


그때의 전황은 기실 아주 희극적이다. 청군은 병력부족으로 직접 남하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의 대적은 이자성(李自成)이었다. 그리하여 오삼계를 우두머리로 하는 청군의 주력은 계속 서쪽으로 진군하며 이자성의 군대를 추격했다. 좌량옥(左良玉)은 이자성이 패배한 것을 기화로 호북등지의 본거지를 수복했고, 이자성군은 다시 남으로 좌량옥을 공격했다; 다만 좌량옥은 다시 청군측(淸君側)을 핑계로 격문을 돌려 마사영을 토벌한다고 하면서 군대를 이끌고 동진한다. 그리하여 놀란 남경의 홍광조는 급히 군대를 보내어 막았다. 이렇게 서로 돌아가며 정신없이 싸우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청군이 대거 남하하여 직접 양주로 향했다. 하루만에 양주성이 함락되고, 남경의 전겸익(錢謙益)등은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마사영, 완대성 두 살마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완대성은 금화(金華)로 도망쳤는데, 명성이 너무 나쁘다보니 바로 쫓겨난다. 그는 이에 원한을 품고, '몰래 청나라에 항서를 보낸다" 그리고 새로운 주인에게 극력 아부한다. 머리를 잘라서 변발을 하고, 호복을 입었다. 자신이 병든 몸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공을 세우고 싶어했다. 청나라사람들은 그를 복건순무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했고,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남정에 나선다. 그러나 도중에 병이 도져서 선하관에서 돌 위에 쓰러져 죽는다. 당시 나이 60살이었다.


기실 완대성은 아주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일생동안 잔머리를 굴렸고, 진정으로 조정에서 관직에 있었던 것은 2년여에 불과하다. 이렇게 관직에 있기 위하여 그는 자신의 명성이 엉망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 역사에 후안무치한 소인이라는 이름을 남긴다. 실로 그에게 그럴만한 가치는 없어 보인다. '온갖 머리를 굴렸지만, 결국은 자신의 목숨을 해쳤다"는 격이 된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은 모두 완대성의 나쁜 점들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를 높이 해주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문학창작분야에서만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명나라때 재능으로만 따지자면 그에게 비견할만한 인물이 없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를 "중국의 다빈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일 그가 정력을 관직에 나가는데 쏟지 않고, 문학창작에 쏟았더라면, 중국의 문학사상에 현란한 꽃을 피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희곡창작에 있어서, 완대성은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집안에 극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악기연주하고 노래부르는 사람 생단정축(生旦淨丑)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완대성은 극작가이며 무대감독으로 그들을 세심하게 가르친다. 그리고 이 극단에는 한 가지 특색이 있었는데, 바로 완대성의 작품만을 공연한다는 것이다. 저명한 문학가 장대(張垈)는 일찌기 완대성이 모든 내용을 일일이 가르쳐서 '심미부진(尋味不盡)'이라고 평한 바 있다. 완대성의 극단은 남경에서 아주 유명했고, 완대성 자신도 친히 나서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완대성은 인품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 중에서는 그의 희곡에 대하여도 크게 질책하는 경우가 있다. 그의 동기가 불순하다는 것이다. 목적은 이를 통해 여러 며사들과 사귀고 나중에 조정에 나가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기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저 희곡을 좋아한 것이다. 만일 이것까지 그의 죄로 얘기한다면, 실로 너무 억지스럽다. 그 '대만민주국'의 총통인 당경숭(唐景崧)이 내도해서 파직당한 후 희국연구에 전념하여 "계극(桂劇)"을 만들었는데, 이것도 나중애 동산재기하기 위한 준비라고 폄하할 것인가? 관한경(關漢卿)이 그렇게 많은 잡극을 창작했는데, 이것도 고관대작들과 통하여 나중에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한 준비였다고 말할 것인가?


완대성이 창작한 희곡은 아주 많다. <춘등미(春燈謎)>, <연자전(燕子箋)>, <모니합(牟尼合)>등 10여종이다. 특히 <연자전>이 가장 유명하고,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평가했다: "본본출색(本本出色), 각각출색(脚脚出色), 출출출색(出出出色), 구구출색(句句出色), 자자출색(字字出色)" 아주 인기를 끌어 여러 곳에서 공연한다. 당시 '진회팔염'중 하나인 고미(顧媚)가 가장 잘하던 극목이 바로 <연자전>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녀의 공연은 아주 뛰어나서 온 나라사람들이 그녀의 공연에 빠졌다고 한다.


완대성의 시가는 도연명과 이백을 배웠다. 장태염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완대성의 시는 왕유, 맹호연의 의취(意趣)가 있고, 다시 사령운의 정련(精練)이 있다고, 당대메 모순문학상을 받은 이국문 선생도 완대성의 시에 대하여는 높이 평가한다. "득만당사인삼매(得晩唐詞人三昧) 유오대화간여운(有五代花間餘韻)".


그의 시작중에서 다음과 같은 시는 은연중에 종남지기가 보여지고, 확실히 시가의 삼매를 얻은 것같다:


불수행령귀거래(拂手行呤歸去來), 초당원학막상시(草堂猿鶴莫相猜)

운소자괴무수핵(雲霄自愧無修翮), 우로수위기불재(雨露誰爲棄不材)


아쉬운 것은 완대성의 작품이 당시에 널리 알려졌지만, 곧이어 변란이 일어나고 전쟁중에 불이 타서 전해지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상당수가 소실되었다. 기실 진정한 원인은 이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의 이름이 엄당에 올라 오랫동안 청류들이 멸시해오던 자이므로 남명이 무너진 후, 다시 청에 투신하고 선하령에서 죽었으니, 그의 시집은 모두 모아서 불태워버리는 것이 속시원했다.


역대 문인들 중 소인이 적지 않다. 역대 문신들 중에서도 간신이 적지 않다. 당나라때 송지문, 송나라때 채경, 명나라때 엄숭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소인이면서, 문장이 출중한 경우는 드물다. 우리는 그저 하늘이 왜 이렇게 비열한 성격과 재주를 같이 완대성이라는 한 사람에게 주었는지를 원망스러울 뿐이다.


<명사>에서는 완대성에 대하여, "기민활적(機敏猾賊), 유재조(有才藻)"라고 했는데, 이 몇 글자는 상당히 정확하게 그를 표현하고 있다. 그는 비록 사람들에게 멸시받았지만, 그렇다고 퇴폐하지는 않았다. 한편으로 계속 인욕부중하면서 재기할 날을 기다리며, 한편으로 붓을 갈아 멋질 글을 계속 썼다. 그는 스스로 소인이라고 인정하는 소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사람들에게 소인의 수준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소인이 어떻게 세상에서 성공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그가 신경쓴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