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22 "대만독립"을 누가 가장 먼저 주장했는가? 글: 안창해(顔昌海) 현재 중국대륙의 이데올로기지도에서 '대독(臺獨, 대만독립)'은 제1호적이라 할 수 있다. 미국식의 자유주의가 종국적인 의미에서는 중국대륙의 최대위협이지만, 미국은 태평양 건너편에 있고, 국내외 민주운동인사들의 반항도 대륙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오직 일의대수(一衣帶水)의 대독은 중국대륙에서 '내정'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실제로 간섭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리하여 대만이 중국대륙에 끼치는 정치적 충격이 가장 크다. 대륙에서 공식적으로는 "대독"의 최초기원을 2차대전이후라고 한다. 1946년에 창간된 "대만잡지", 1947년에 성립된 "대만재해방연맹(臺灣再解放聯盟)"의 요문의(廖文毅)를 대표인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대독'은 1920년대말에 이미 등장했다. 그렇다면 중국.. 2023. 5. 24. 진독수(陳獨秀)는 왜 모스크바의 초청을 5번이나 거절했을까? 글: 왕우군(王友群) 중국공산당과 모스크바의 연원은 10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1년 당시의 러시아공산당(이후 소련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꿈)이 장악하고 있던 코민테른(공산국제)은 러시아공산당의 이익을 위해, 대표를 상해로 파견하여 반드시 러시아공산당의 지시를 듣는 중국공산당을 성립시키고자 한다. 진독수는 중공의 초대 당수(黨魁)로 1921년 중공1대부터 1927년 중공5대까지, 진독수가 중공의 당수를 맡았다. 1927년에 이르러, 코민테른의 극동지부로서 중국공산당이 이끈 '대혁명'이 실패로 끝난다. 중공당수 진독수는 일거에 중시지적(衆矢之的)이 된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코민테른은 거듭하여 진독수에게 모스크바로 올 것을 요구하였지만, 진독수는 모두 거절했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 2023. 4. 21. 류통팡(劉同舫):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몇 가지 의문 [작년(2022년) 12월 21일, 저장대학(浙江大學) 마르크스주의학원 원장 류통팡(劉同舫) 교수는 학원의 교수 학생들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기치인가?"라는 제목의 학술보고를 하였다. 류통팡 교수는 교육부 대학사상정치이론과목 교학지도위원회 위원이며, 저장성 대학마르크스주의이론교육연구회 부회장, 저장성 중국특색사회주의이론체계연구기지 책임자 겸 수석전문가이다. 아래는 류통팡 교수가 보고한 내용의 적요(摘要)이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하여 심신(深信)에서 회의(懷疑)로 바뀌었는데,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이론의 연구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 깊이 믿은 것(深信)은 중국의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양보일간(兩報一刊, , 와 를 가리킴)'에서 읽은 것이다. 해외로 나간 후 처음 읽은 막스 베버의 을 읽고서 깜짝 .. 2023. 4. 5. 어느 사건으로 모택동이 유소기를 죽이기로 결심했을까? 글: 히요시 히데마츠(日吉秀松, 일본대학 문리학부 조교수, 중국계) 독재자는 권력과 명리에 반드시 신경을 쓴다. 유소기(劉少奇)는 모택동(毛澤東)을 믿었기 때문에 국가주석직을 물려받았고,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된다. 모택동과 유소기의 결렬은 절대로 사청(四淸)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고, 8대에서 개인숭배를 비판한 것이 발단이었다. 시모노프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그(스탈린을 가리킴)는 강연대에 올라 모든 사람들을 보면서 발언했다. 나는 나이가 들었고, 나는 수탁받은 모든 직책을 이행할 수 없다. 나는 계속하여 장관회의주석의 직무를 담당할 수 있고, 이전처럼 정치국회의를 주재하는 직책을 이행할 수 있지만, 더 이상 총서기로서 중앙서기처의 회의를 주재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나는 총서기의 직무를 면직해줄 것.. 2023. 2. 8. 임표(林彪)와 등소평(鄧小平)의 은원(恩怨) 글: 조대부(趙大夫) 임표, 등소평은 모택동의 득의문생(得意門生)으로 일찌기 모두 모택동의 후계자 반열에 올랐다. 한명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헌법에 이름을 넣었던 모택동의 후계자이고, 다른 한명은 모택동의 사후 사실상의 최고지도자에 올랐다. 그렇다면, 등소평과 임표는 도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미묘했다. 제1대영도집단의 핵심구성원으로서 어느 정도 유량(瑜亮, 주유와 제갈량)심리도 있었다. 그들은 일찌기 상하급관계였기도 했고, 일찌기 밀접한 협력관계이기도 했고, 또한 심각한 대립관계이기도 했다. 등소평과 임표는 일생동안 교류가 거의 없었다. 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등소평의 딸 모모(毛毛)가 등소평을 회고하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엄격하게 말해서, 등소평과 임표는 개인적인.. 2022. 11. 24. 러-우전쟁의 근원에 관한 정용녠(鄭永年)교수의 황당한 주장 글: 아뉴불우(阿妞不牛) 금방 저명한 '중국굴기'의 제창자인 정용녠 교수가 대만구평론(大灣區評論)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보았다. 요점은 냉전이 끝난 후, 미국과 서방은 러시아에 대하여 계속하여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으며, 러시아는 어쩔 수 없이 몰려서 자위반격을 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정용녠 교수의 학식으로 그가 모를 리는 없다. 동구국가 및 제정러시아와 스탈린에 의해 소련판도에 들어갔던 국가들이 얼마나 심하게 유린당하고 망가졌었는지. 전소련과 러시아에 대하여 얼마나 공포심을 느끼고 있는지. 소련이 해체된 후, 미국과 서방은 전소련에 대하여 마샬계획을 제공할 의무도 없고, 능력도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했고, 스스로 분투하며, 자유민주시장경제를 건립해서,.. 2022. 3. 14.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