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사상

류통팡(劉同舫):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몇 가지 의문

중은우시 2023. 4. 5. 16:14

[작년(2022년) 12월 21일, 저장대학(浙江大學) 마르크스주의학원 원장 류통팡(劉同舫) 교수는 학원의 교수 학생들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기치인가?"라는 제목의 학술보고를 하였다. 류통팡 교수는 교육부 대학사상정치이론과목 교학지도위원회 위원이며, 저장성 대학마르크스주의이론교육연구회 부회장, 저장성 중국특색사회주의이론체계연구기지 책임자 겸 수석전문가이다. 아래는 류통팡 교수가 보고한 내용의 적요(摘要)이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하여 심신(深信)에서 회의(懷疑)로 바뀌었는데,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이론의 연구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 깊이 믿은 것(深信)은 중국의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양보일간(兩報一刊, <인민일보>, <해방군보>와 <홍기>를 가리킴)'에서 읽은 것이다. 해외로 나간 후 처음 읽은 막스 베버의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을 읽고서 깜짝 놀랐다. 원래 마르크스주의도 비판할 수 있는 것이구나. 그리하여,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나의 회의는 주로 현실에 대한 반성에서 왔다.

 

1. 왜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국가들은 항상 은혜를 원수로 갚는가(恩將仇報)?

 

코민테른의 전성기에 수십개 국가가 있었다. 이들 국가는 모두 소련의 도움으로 건립되었다. "2차대전"기간동안, 소련홍군은 수백만의 생명을 희생하면서 동유럽의 여러 소국을 나치의 말발굽아래에서 해방시켜주었다. 그리하여 동유럽의 소국들은 코민테른의 형제국가가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동유럽의 소국들은 계속하여 소련공산당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쟁하였고, 결국 무력충돌까지 벌어지게 된다. 소련공산당은 강력한 무력으로 통제를 유지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동유럽 소국들은 거의 모두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나토로 넘어간다. 이는 소련인들이 보기에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의 보응이 중국에서도 일어난다. 중국은 전력을 다해서 베트남을 도와 미제를 쫓아내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베트남공산당은 미국을 쫓아내자마자 반목성구하여, 총구를 중국으로 향한다. 중국인이 보내준 총기탄약으로 중국인을 공격했다. 그리하여 중국인은 베트남인들이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고 욕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의 결말도 비슷하다. 만일 중국이 매년 식량과 돈을 보내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일찌감치 안면을 바꾸었을 것이고, 조금만 적게 주면 국경에서 총을 쏘아댄다.

 

나토의 민주진영을 보면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데, 미국에 패배한 국가들 예를 들어 독일과 일본은 오히려 미국의 가장 굳건한 동맹이 되었다. 이는 중국인이 보기에 독일인과 일본인은 인적작부(認賊作父, 도적을 부친으로 인정한다)로 보인다. 한쪽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데, 다른 한쪽은 적을 부친으로 여긴다. 이런 강렬한 차이는 무엇을 설명하는가?

 

2. 왜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정당의 내부에서는 항상 잔혹한 투쟁을 피하지 못하는가?

 

무릇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정당의 내부에서는 항상 죽기살기식의 투쟁이 벌어진다. 소련이 해체된 후, 소련공산당 내부의 비밀자료가 차례로 공개된다. 스탈린이 통치하던 기간동안, "2차대전"에서 남은 중앙위원, 정치위원중 2/3가 처형되거나 숙청되었다. 중국의 내부투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무릇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정당은 크건 작건, 큰 경우는 소련공산당, 작은 경우는 크메르루주까지 모두 잔혹한 숙청을 피하지 못했다. 모든 당의 역사는 피비린내나는 잔살(殘殺)의 역사이다.

 

반대로 세계에서 민주를 신봉하는 정당을 보면, 정당과 정당간이건, 정당 내부이건 비록 투쟁은 있지만, 거의 폭력행위가 없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당은 오고 가는 것도 자유롭고, 흩어졌다가 모이고, 모이다가 흩어지는 것이 정상적인 행위이다. 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당은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정당은 피비린내나는 내부투쟁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들은 자신의 동지들에 대하여도 이렇게 잔혹한데, 다른 당의 사람들에 대하여는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3. 왜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정당은 모두 간시(乾屍)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가?

 

무릇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정당은 항상 자신의 지도자의 시신을 보존하는 것을 좋아한다. 소련공산당의 큰형님이 시신방부처리의 선례를 남겼고, 시신방부처리는 유행하게 된다. 이 세계에는 많은 미이라가 나타나게 되는데, 미이라로 만드는 것은 5천년전에 파라오가 했던 일이다. 그건 2 천여년전에 진시황이 했던 일이다. 그건 봉건미신의 무당들이 했던 일이다. 공산당은 자칭 인류의 가장 선진적인 사상을 대표한다고 하면서, 가장 선진적인 과학기술을 미이라를 만드는데 쓰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당을 보면, 지도자들은 맨몸으로 와서 맨몸으로 간다. 거의 대다수는 정력이 왕성할 때 정게에서 은퇴하여 평민신분으로 돌아간다. 공산당의 지도자는 살아서는 활신(活神)으로 죽아서는 사신(死神)으로 남는다. 살아서는 평생 특권을 향유하고, 죽고나서도 특권을 누린다. 매년 납세자들은 수백만의 돈을 들여서 미이라를 보존한다. 도대체 누가 더욱 인류문명의 사상에 부합하는가?

 

4. 왜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국가는 모두 장벽을 구축하는가?

 

동독공산당은 베를린장벽을 만들어서 인민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막았다. 베를린장벽은 유형의 담장이다. 이런 유형적인 담장외에 더욱 잔혹한 것은 무형의 담장이다. 인민을 외부와 격리시키고, 인민을 외부에서 정보를 얻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모든 국가는 인민이 외부의 정보를 전해듣는 것을 겁낸다. 그리하여 엄격히 외부의 소식을 봉쇄한다. 

 

반대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국가를 보면, 사람들은 출입국이 자유롭고, 출판도 자유롭고, 언론도 자유롭고, 신문도 자유롭다. 집권당이건 야당이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고, 누구든지 욕할 수 있다.

 

5. 왜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정당은 빈곤하거나 부패하는가?

 

마르크스주의는 수십개 국가에서 1세기간 실천되었다. 얻어낸 결과는 가난 아니면 부패이다. 무릇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국가는 거의 모조리 세계3류국가로 전락했다. 무릇 세계1류국가는 모두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지 않는 국가들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럽에서 탄생되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동유럽에서 만연되었고, 동유럽 소국은 가난한 국가로 전락한다.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마르크스주의가 만연되는 것을 막아냈고, 서유럽제국은 모두 세계1류국가가 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대비는 동독과 서독, 북한과 남한이다. 같은 국토, 같은 민족인데, 빙화양중천(氷火兩重天)이다.

 

6. 왜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국가는 갈수록 줄어드는가?

 

코민테른의 전성기에 수십개 국가가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다. 소련공산당이 해체되면서 도미노효과가 나타나서, 동유럽의 나라들이 속속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민주정치를 취한다. 지금, 진정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국가는 겨우 몇 개밖에 남지 않았다. 남은 몇개 국가는 북한의 삼대세습, 쿠바는 동생이 정권을 넘겨받았고, 베트남은 양두구육이다. 기실, 이게 필연적인 추세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앞의 몇가지 의문은 바로 마르크스주의는 포기될 운명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나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회의는 모조리 사회실천결과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이론에 대한 연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실상, 역사가 지금까지 발전하면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도대체 어떠해야 하는지는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마르크스주의는 1세기의 사회실천을 거쳐, 역사와 현실에서 이미 아주 명확한 답안이 나와 있는 것이다. 인류는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참혹한 댓가를 치렀다. 얻은 결과는 비록 뜻은 강력했지만, 무릇 마르크스주의를 장기간 실천한 국가는 최종적으로 모두 새로 시작해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많은 마르크스주의 선행자들이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이 말은 어느 정도 절대적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사물의 발전의 보편성에 부합한다. 만일 하나의 사상이 막 출현했다면, 논리적으로 논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1세기간 실천했다면, 다시 되돌아가서 논리적으로 논증하는 것은 단지 학술연구의 의의만 있을 뿐이고, 현실적인 의미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