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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등소평)

임표(林彪)와 등소평(鄧小平)의 은원(恩怨)

by 중은우시 2022. 11. 24.

글: 조대부(趙大夫)

 

임표, 등소평은 모택동의 득의문생(得意門生)으로 일찌기 모두 모택동의 후계자 반열에 올랐다. 한명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헌법에 이름을 넣었던 모택동의 후계자이고, 다른 한명은 모택동의 사후 사실상의 최고지도자에 올랐다. 그렇다면, 등소평과 임표는 도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미묘했다. 제1대영도집단의 핵심구성원으로서 어느 정도 유량(瑜亮, 주유와 제갈량)심리도 있었다. 그들은 일찌기 상하급관계였기도 했고, 일찌기 밀접한 협력관계이기도 했고, 또한 심각한 대립관계이기도 했다.

 

등소평과 임표는 일생동안 교류가 거의 없었다. 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등소평의 딸 모모(毛毛)가 등소평을 회고하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엄격하게 말해서, 등소평과 임표는 개인적인 교류가 없었다." 부고의(傅高義)도 그의 저작 <등소평시대>에서 이런 말을 한다: "십대원수중, 임표는 등소평이 유일하게 교류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1. 임표의 부하 등소평

 

1935년 6월 장정때, 등소평은 홍1군단 정치부 선전부장으로 간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상하급관계 및 합작관계가 시작된다. 1936년 등소평은 나영환(羅榮桓)의 뒤를 이어 홍1군단 정치부 부주임이 된다; 1937년 1월, 홍1군단 정치부 주임이 된다. 이때 임표가 등소평을 배척하거나 공격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둘 사이의 협력은 괜찮았던 것으로 보인다.

 

등소평과 임표가 함께 찍은 사진하나는 두 사람의 당시 진실한 관계를 보여준다. 사진에서 군복을 입은 등소평은 탁자의 뒤에 서서 강연을 하고 있다. 임표는 곁의 한 등받이없는 의자 위에 앉아서 정신을 집중하여 듣고 있다. 임표의 뒤에는 한 무리의 관병이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으며, 고개를 숙이고 진지하게 받아적고 있다.

비록 이것이 표준적인 의미에서 함께찍은 사진이라 할 수는 없지만, 등호평과 임표가 주체인 사진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유일한 사진이다.

 

2. 임표의 동료 등소평

 

등소평은 1949년 9월 10일 연명으로 전보를 초안한다. 전보에는 2야(野, 제2야전군)의 3, 5 두 병단(兵團)의 행진시간, 노선을 통보한 후, 4야(野) 임표등에게 화중작전상황에 근거하여 두 야전군이 서로 협력하는 문제를 통보하며 3,5병단에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전진하는 과정에서 "붐비거나 교차하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작전협력을 위하여 전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건의한다: "2야가 화중지구를 통과하는 작전건에 대하여 4야의 수장의 지휘를 받아 행동을 일치시킨다" 이는 2야가 서남으로 전진하는 과정에서 4야와 밀접하게 협력했다는 것을 말해주며, 실제로는 군사상의 전략배치이다. 모택동은 등소평의 건의를 승인했고, 그렇게 4야는 대거 남하하고, 2야의 서진은 중단된다. 그후에 서남으로 순조롭게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경력으로 임표는 등소평을 괄목상대하게 된다.

 

또 다른 등소평과 임표가 같이 찍은 사진이 있는데, 이 사진에는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1949년 유백승(劉伯承), 등소평이 한구(漢口)를 지날 때, 4야의 수장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것이다.  

왼쪽부터 등소평, 유백승, 임표, 등자회(鄧子恢), 담정(譚政), 이설봉(李雪峰)

3. 임표의 적수 등소평

 

등소평이 권력을 잡은 후, 가장 주요한 3가지 사건은 철저하게 명예회복시켜주거나 잘못을 시정해주지 않았다. 첫째는 고요사건(高饒事件)이고, 둘째는 속유(粟裕)가 비판받은 건이고, 셋째는 임표사건이다. 그중 두 건은 임표와 관련이 크다. 두 사람의 협력에서 철저한 결렬까지 반세기가 걸렸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특히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한다. 이는 모택동으로 하여금 자신의 후계자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만든다. 모택동은 일찌기 등소평과 임표를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했다. 일찍 모택동은 등소평을 후계자로 삼는 것에 더욱 기울어져 있었다. 비록 1959년 9월 임표가 팽덕회의 뒤를 이어 국방부 부장이 되어 군사위원회의 일상업무를 주재하게 되고, 1959년 거행된 중공 8기 7중전회에서 모택동은 업무방법에 대한 강화를 하면서 권력은 중앙정치국상위와 중앙서기처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유머스럽고 의미심장하게 이런 말을 한다: "나의 이름은 모택동이다. 내가 총사령관이고, 대원수이다. 등소평은 부총사령관, 부원수이다. 우리 두 사람은 한명이 정(正), 한명이 부(副)이다." 그는 또한 등소평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총서기잖아. 등소평, 네가 총사령관이 되어 언젠가 권력을 잡으면 명령을 내려야 한다. 네가 할 수 있겠는가. 너는 서기처의 총서기이고, 너는 또한 상위의 총서기이고, 너는 정치국의 총서기이고, 너는 중앙위원회의 총서기이다."

 

1955년 4월, 중공 7기 5중전회가 베이징에서 개최된다. 이번 회의는 중앙의 인사안배에 대해 하나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즉 임표와 등소평을 중앙정치국위원으로 보선한 것이다. 그리고 등소평은 중공8기 1중전회에서 정치국상위, 중앙총서기가 된다. 임표는 1958년 5월의 중공 8기 5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부주석, 중앙정치국상위로 추가임명된다.두 사람의 승진은 모택동이 후계자를 고르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957년 11월, 모택동이 소련을 방문한다. 방소기간동안 모택동은 소련공산당지도자 후르시쵸프에게 그가 주석을 맡지 않게 되는 문제를 얘기한다. 후르시쵸프는 그에게 묻는다: "누가 후계자인가. 그런 사람이 있는가?" 모주석은 명확하게 대답한다: "있다. 우리 당내에 여러 동지들이 후계자가 되는데 충분하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한명 한명 거명한다. "첫째는 유소기이다. 둘째는 등소평이다." 모택동의 말은 중공당내에서 이미 '후계자'문제를 명확히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유소기가 첫째, 등소평이 둘째"라는 후계자의 순서에 컨센서스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모택동이 이미 등소평을 후계자서열에 넣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후 중소분쟁에서 모택동은 등소평은 자기의 사상이 있는 후계자라고 여기게 된다. 이것은 모택동의 눈에 등소평이 임표와 구분되는 점이다.

 

등소평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택동이 1966년 그를 불러서 그와 임표가 만나서, 임표와 함께 일을 하라고 했다. 등소평은 동의하고 임표를 만나러 간다. 그러나 얘기를 나누지 못하고,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된다.

 

1966년, 임표가 소집한 정치국상위확대회의에서 등소평의 문제를 적아모순(敵我矛盾)이라고 말한다. 이후의 여러 회의에서 임표는 계속하여 등소평을 비판한다. 10월 9일부터 28일까지, 모택동이 중앙공작회의를 소집하여 다시 한번 "유소기, 등소평을 대표로 하는 자산계급반동노선을 비판한다. 바로 이 회의에서 등소평은 임표, 사부치(謝富治)의 맹렬한 공격을 받는다. 이는 임표사건이 나중에 번복되지 못하고, 사부치가 편시(鞭屍)당하게 되는 주요 이유이다.

 

등소평은 그가 곤란에 처해진 것이 주로 임표때문이라고 여겼다. 마음 속으로 임표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알 수 있다. 등소평이 강서에서 임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즉시 술을 거나하게 먹으면서 속이 풀린다는 듯이 말했다: "임표가 죽지 않으면 하늘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표사건을 뒤집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