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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진독수(陳獨秀)는 왜 모스크바의 초청을 5번이나 거절했을까?

by 중은우시 2023. 4. 21.

글: 왕우군(王友群)

 

중국공산당과 모스크바의 연원은 10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1년 당시의 러시아공산당(이후 소련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꿈)이 장악하고 있던 코민테른(공산국제)은 러시아공산당의 이익을 위해, 대표를 상해로 파견하여 반드시 러시아공산당의 지시를 듣는 중국공산당을 성립시키고자 한다.

 

진독수는 중공의 초대 당수(黨魁)로 1921년 중공1대부터 1927년 중공5대까지, 진독수가 중공의 당수를 맡았다.

 

1927년에 이르러, 코민테른의 극동지부로서 중국공산당이 이끈 '대혁명'이 실패로 끝난다. 중공당수 진독수는 일거에 중시지적(衆矢之的)이 된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코민테른은 거듭하여 진독수에게 모스크바로 올 것을 요구하였지만, 진독수는 모두 거절했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진독수는 5차례 모스크바의 초청을 거절하다.

 

1927년 7월 8일, 코민테른은 중공중앙에 전보를 보내, 중국혁명이 실패하였는데, 그 원인은 '중공지도자가 범한 일련의 가장 엄중한 과오때문'이라고 하면서, '여러가지 방법을 취하여 중공중앙의 기회주의적 과오를 시정하고, 정치적으로 당의 지도기구를 건전하게 만들라'고 요구한다.

 

이에 따라, 중공중앙은 조직개편을 실시하여, 장국도(張國濤), 장태뢰(張太雷), 이입삼(李立三), 이유한(李維漢), 주은래(周恩來)로 임시중앙상임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때부터 진독수는 정직된다. 당시, 코민테른의 주중국대표인 미하일 보로딘(鮑羅廷)은 진독수에게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과 중국혁명문제를 포론할 것을 요구했으니, 진독수는 거절한다.

 

1927년 8월 7일, 중공은 한구(漢口)에서 "87회의"를 개최한다. 신임 코민테른 주중국대표인 비사리온 로미나제(羅明納玆)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진독수가 중공중앙총서리로서 대혁명을 영도하는 과정에서 '우경기회주의'의 과오를 범한데 대하여 비판한다.

 

중공의 창시자로서, 당시에도 여전히 중앙위원이었던 진도구는 회의에서 배제된다. 회의후, 중공중앙책임자인 구추백(瞿秋白)은 진독수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회의상황을 통보한다. 그리고 그에게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로 갈 것을 권한다. 그러나 진독수는 이를 거절한다.

 

1927년 11월, 중공중앙 임시정치국이 상해에서 확대회의를 개최한다. 각 주요 성의 대표들도 모두 참석했다. 진독수는 여전히 배제되었다. 회의기간동안, 구추백은 다시 한번 진독수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며, 진독수에게 모스크바로 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진독수에게 거절당한다.

 

1928년 6월에서 7월, 중공6대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다.회의전에 코민테른은 진독수, 팽술지(彭述之), 장국도등에게 회의에 참가하도록 요청하였으니, 진독수는 다시 한번 거절한다.

 

1930년 2월 8일, 중공정치국은 코민테른 정치서기부에서 진독수에게 보낸 전보를 그에게 전해준다. 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에게 본 정치서기부가 중공중앙이 당신의 당적을 박탈한 결정을 심의하는 회의에 참가할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회의는 "앞으로 두 달 내에 거행될 것이다" 빠른 시간내에 참가하기를 원하는지 알려달라. 진독수는 다섯번째로 모스크바로 가는 것을 거절한다.

 

진독수는 왜 다섯 번이나 모스크바로 가는 것을 거절했을까?

 

첫째, 모스크바가 '대혁명'의 실패책임을 모조리 그에게 뒤집어 씌운데 대하여 불만이었다.

 

'대혁명'은 실패했다. 소련공산당중앙총서기인 스탈린은 잘못이 모두 중공에 있고, 진독수에게 있다고 보았다. 소련공산당은 항상 옳았고, 스탈린은 항상 옳았다.

 

이 점에 관하여 임건수(任建樹)가 쓴 <진독수대전>에 명확히 얘기하고 있다: "코민테른이 대혁명실패에 대하여 책임을 지느냐 아니냐의 문제에 관하여, 스탈린은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중국혁명의 광주시기와 장개석의 혁명배반이후, 코민테른의 지도는 '완전히 정확했다.' 무한시기에 이르러, '반대파는 혁명의 잠시 실패는 코민테른의 정책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신하는 사람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혁명실패는 중공중앙이 '일련의 아주 큰 과오를 범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코민테른의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버린 사람이라는 것이다. 스탈린은 이처럼 모든 책임을 중공중앙에 떠넘겼고, 중공이 총서기를 5번이나 연임한 진독수가 당연히 가장 큰 책임을 져야하게 되는 것이다.

 

1990년대 소련해체후 기밀해제된 소련공산당자료를 보면,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소련공산당 중앙정치국회의는 중국혁명문제에 관하여 112번이나 논의했고, 738건의 결정을 내렸다. 장개석이 국민당의 대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언제 누구를 보내어 장개석과 얘기할 것인지, 얘기에서 어떤 점을 주의해야할 것인지 등을 모두 명확하게 지시했다.

 

중공은 코민테른의 조종하에 건립된 것이고, 코민테른의 일개 지부였다. 당시 대혁명을 '지도'하는 노선, 방침, 정책은 모두 모스크바에서 나왔고, 모스크바에서 중국에 파견한 대표, 고문이 집행했다. 그저 아주 작은 부분만 모스크바대표의 엄밀한 감독하에 진독수를 우두머리로 하는 중공중앙이 집행했던 것이다. 

 

진독수는 대혁명실패의 주요 책임은 코민테른에 있고, 스탈린에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 모스크바가 그에게 '막수유(莫須有)'의 죄명을 뒤집어 씌운데 불만이었다.

 

대혁명실패후, 스탈린은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고, '우경기회주의' '우경투항주의' 중국공산당의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확실한 기회주의대표' '트로츠키주의자' '반혁명' '신공적(新工賊)', '반변혁명(叛變革命)'등의 막수유의 죄를 진독수에게 뒤집어 씌운다.

 

이처럼 사실이 아닌 모함에 가까운 것을 진독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들은 나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하는데, 도대체 잘못이 무엇이라는 것인가? 어떻게 반성하라는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그들은 왜 스탈린에게 반성하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그의 훈령을 집행했을 뿐이다. 그가 반성하면 나도 반성하겠다. 나를 속죄양으로 삼는다면 정리에도 맞지 않는다."

 

진독수는 이런 말도 했다: "너희는 내가 우경기회주의라고 하는데, 또 어떤 사람은 내가 반변혁명했다고 하는데, 이런 상황하에서 나를 모스크바로 불러서 무슨 동방부장을 시킨다는데 그게 놀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나는 관직을 원치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코가 꿰어서 끌려가는 소가 되고 싶지는 않다. 너희들의 호의는 고맙지만 받을 수가 없다."

 

셋째, 모스크바가 그의 다른 의견을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는데 불만이 있었다.

 

중공건당이래, 모스크바에서 오는 어떤 지시에 대하여 진독수는 여러번 이견이나 반대의견을 제시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일찌기 코민테른 대표 마린(馬林, 본명 헹크 스넷플리엣, 네덜란드인)이 제안한 중국공산당원을 국민당에 가입시키고, 국공양당이 당내합작을 실행하자는 건의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의 반대는 소용이 없었다; 그는 4차례에 걸쳐 공산당원은 국민당을 탈당하자고 제안했지만, 계속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일찌기 코민테른 대표 미하일 보로딘이 "우리와는 한번도 협의하지 않는다. 마치 중국에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는 것같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하여 코민테른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반대로 중공중앙은 반드시 미하일 보로딘과 잘 협조하여야 한다고 지시한다.

 

넷째, 모스크바가 불법적인 수단으로 그를 배제한 것에 불만이었다.

 

1927년 8월 4일, 코민테른 대표 비사리온 로미나제가 장사로 달려와,마원령(麻園嶺) 러시아영사관에서 호남성위대리서기 이예용(易禮容)등을 소집하여 회의를 연다. 그들에게 '진독수타도'에 찬성한다는 서명을 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예용이 거절한다. 진독수타도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예용은 그해 11월에 면직된다.

 

1927년 8월 7일, 중공은 한구에서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진독수의 '우경기회주의' 과오를 청산하기로 결의한다. 회의전에 누군가 진독수에게도 참가하도록 통지해야한다고 얘기했지만, 코민테른 대표 비사리온 로미나제는 단칼에 거절한다. 회의에 참가한 중공중앙위원은 반수가 되지 않아 법정정족수를 갖추지 못했다; 회의는 겨우 하루만 열리고 바로 끝낸다. 충분한 토론도 없었고, 진독수의 항변권도 박탈했다. 그러므로 회의에서 통과된 결의는 불법적이다.

 

다섯재, "무장으로 소련을 보위한다"는데 반대했다.

 

1929년 7월, 중화민국정부는 소련이 중국인민을 선동하여 중국국가사회를 파괴하려하고, 중국정부가 각종 선전과 업무에 반대하자, 중동철로의 권리의 강제로 회수하고, 불평등조약의 철저한 폐기하기로 결정한다.

 

다만, 그러나 소련은 이에 응하지 않고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무장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소련군이 승리를 거두어, 소련의 중동철로권익을 유지했을 뿐아니라, 그 기회에 중국의 흑할자도(黑轄子島)까지 점령한다.

 

중동철로는 제정러시아가 중국을 침략하고, 극동을 통제하기 위하여 중국영도에 건설한 철로이다. 러시아는 '시월혁명'이후, 소련이 여러번 성명을 발표했다: 제정러시아가 청정부를 압박하여 체결한 모든 불평등조약을 폐기하고, 중동로주권을 반환하겠다고. 그러나 모두 구두에 머물렀다.

 

중동로사건이 발생한 후, 코민테른은 즉시 강력하게 반응한다. 각국 공산당에 '소련보위' 운동을 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중공중앙도 적극적을 호응하여 속속 성명, 결의와 글을 발표했다. 심지어, '소련무장보위'라는 구호까지 내놓았다.

 

1929년 7월 28일, 진독수는 중공중앙에 서신을 보내, 중공의 '소련무장보위'선전이 너무 설교식이고 너무 군중을 넘어섰고, 너무 단조롭다고 비판했다.  "오히려 군중들로 하여금 우리를 오해하게 할 수 있다...민족이익은 돌보지 않는다고." 1주일후, 그는 다시 중공중앙에 서신을 보내, 중공이 집행하는 좌경맹동노선을 비판했다.

 

코민테른은 진독수가 반코민테른, 반당, 반변등을 했다고 판단한다. 1929년 11월 15일,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중공정치국은 진독수의 당적을 박탈하는 결의를 한다.

 

여섯째, 아마도 모스크바로 간 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우려했을 것이다.

 

1930년 2월 코민테른은 그에게 모스크바로 와서 그의 당적을 박탈한 문제를 논의하자고 한다. 그는 <코민테른답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트로츠키(소련공산당 내부에서 반대파인물)를 소련밖으로 축출한 후....너희와 정치적 의견이 다른 많은 동지들을 감금하거나 유배보냈다. 지금 다시 중국에서 나를 모스크바로 부른 것은 겉으로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속으로 너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다."

 

이상의 여러가지를 보면 진독수는 아마도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모스크바로 가면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심지어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결론

 

중국공산당은 중국의 '적대세력'인 러시아공산당이 중국의 합법정권을 전복하기 위하여, 최대한도로 소련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건립한 당이다.

 

만일 러시아공산당(나중의 소련공산당)을 '노자당(老子黨, 아버지당)'에 비유한다면 중공은 '아자당(兒子黨, 아들당)'이다. '아들'은 반드시 '아버지'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역무도한 것이고, '잔혹한 투쟁, 무정한 타격'이 뒤따를 것이다.

 

1921년부터 1927년까지, 러시아공산당(소련공산당)은 중국공산당을 조종했고, 중국에서 공산주의를 선전했고 도처에서 국가정권전복활동을 벌였다. 심지어 공개적으로 무장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여, 사회안정을 해치고, 중화민족의 이익을 ㅎ해쳤다.

 

중공당수로서 진독수는 비록 대항해 보았지만, 부득이 계속하여 굴종해야 했다. 그 결과 대혁명실패후, 소련공산당은 책임을 모조리 그에게 뒤집어 씌운다. 그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다행히, 진독수는 약간의 중국전통문인의 풍골이 남아 있었다. 타격을 받은 후, 소련공산당의 강권과 패도에 대하여 확실하게 인식했고, 다섯번이나 모스크바로 오라는 요청을 거부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