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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7

명(明)나라 '첨단화포부대'의 복멸기(覆滅記) 글: 지구지식국(地球知識局) 명신종 만력19년(1591년)말, 명나라조정은 일본의 관백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음 해에 조선을 침입하고, 나아가 '가도벌명(假道伐明)'하려 한다는 정보를 획득한다. 양광총독 유계문(劉繼文)은 상소를 올려 마카오(澳門)의 포르투갈인을 고용하여, 직접 왜구의 소굴을 공격해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붙잡아 죽임으로써 영원히 후환을 업애도록 하자고 건의한다. 포르투갈인들은 동남해 연해에서 명군과 싸운 바 있다. 그리하여 복건, 광동의 관리들은 그들의 배와 대포가 튼튼하고 날카로우며, 살마들은 용맹하며 교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오이(澳夷, 마카오의 오랑캐)"로 하여금 왜구와 싸우게 하고, 대명은 그저 앉아서 어부지리를 노린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과감한 계획이다. 그.. 2020. 10. 22.
장안(長安)은 왜 서안(西安)으로 개명했는가? 글: 장금(張嶔) 중국고대도시발달사에서 하나의 큰 사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장안개명(長安改名)'이다. 명나라 홍무2년(1369년), 명나라의 북벌군이 관중평원을 점령한다. 그해 삼월 명태조 주원장은 정식으로 조서를 내려, 천년이상의 수도역사를 지닌 고도 장안에 지금까지 사용되는 새 이름을 부여한다: 서안. 비록 이번 '개명'에 대하여 후세에는 여러 논쟁이 있고, 심지어 어떤 아마추어역사가는 불평불만을 쏟아내며 '고도장안'의 격을 떨어뜨리게 된 것이 이번 개명으로 인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상, 반대로 이 고도가 다시 한번 화려한 변신을 이룬 것이 바로 이 개명으로 인해서이다: 파괴된 '구도(舊都)'에서 서북의 '중진(重鎭)'으로 변신한 것이다. 후세인들이 그리워하는 당나라의 장엄한 장안성은 당나라말기부터.. 2020. 7. 2.
명나라의 멸망책임: 숭정? 만력? 글: 장낙양(張洛陽) 명나라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듯이, 만력제(萬曆帝)의 게으름은 아주 유명하다. 그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는데, 그것은 바로 28년이라는 장기간동안 조회(朝會)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건 의문스럽다. 우리가 배운 역사관에 따르면 국가에 지도자가 없.. 2011. 7. 5.
'대청(大淸)' 국호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가? 글: 월초(越楚) 1636년(대명 숭정9년) 사월 십일일, 홍타이시(皇太極)는 칸(汗)의 칭호를 버리고 황제를 칭했으며,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하였고, 연호는 '숭덕(崇德)'으로 하였다. <<만문노당(滿文老檔)>>의 숭덕원년 사월 십일일조를 보면, 홍타이시가 존호를 받은 것만 기록하고 있을 뿐, 국호.. 2011. 1. 16.
명나라의 비참한 최후 글 : 오류선생(伍柳先生) 중국역사상, 황제가 목을 매어 자살한 것은 아마도 명나라때의 숭정제(崇禎帝) 주유검(朱由檢) 한 사람 뿐일 것이다. 이 황제가 죽기 전의 비감하고 처참한 역사는 만감을 교차하게 한다: 1644년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이 황성 북경을 압박했다. 277년전에도 농민반란군인 주원장.. 2007. 1. 16.
청태종이 국호를 "후금(後金)"에서 "청(淸)"으로 바꾼 이유는? 작자: 염숭년(閻崇年) 홍타이시(皇太極, 즉, 청태종)는 국호를 외 금(金)에서 청(淸)으로 바꾸었는가? 학계와 청사계(淸史界)에는 논쟁이 식지 않고 있다. 청태종은 스스로 설명한 적이 없다. 청나라때의 <<태종황제실록>>, <<만문노당>>에도 모두 해석이 없다. 그래서 후인들은 각자 알.. 2007. 1. 10.
숭정제(崇政帝) : 체면을 목숨이나 나라보다 중시했던 망국지군(亡國之君) 1627년, 평생 목수일을 하면서 놀았던 명희종(明熹宗)이 죽음을 며칠 앞두고, 다섯째 동생 주유검(朱由儉)을 불렀다. "다섯째 동생은 요순처럼 될 수 있을 거다". 그는 내우외환에 휩싸인 국가를 열입골살 된 동생에게 맡기고 세상을 떴다. 주유검이 바로 망국지군같이 같지 않은 망국지군이고, 조정과 .. 2006. 1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