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숭정제)

명나라의 비참한 최후

by 중은우시 2007. 1. 16.

글 : 오류선생(伍柳先生)

 

중국역사상, 황제가 목을 매어 자살한 것은 아마도 명나라때의 숭정제(崇禎帝) 주유검(朱由檢) 한 사람 뿐일 것이다. 이 황제가 죽기 전의 비감하고 처참한 역사는 만감을 교차하게 한다:

 

1644년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이 황성 북경을 압박했다. 277년전에도 농민반란군인 주원장이 세웠던 명나라는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3월중순 북경은 더 이상 지키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3월 18일의 이날, 만조의 문무백관은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고, 숭정황제의 곁에는 겨우 몇몇 태감(太監, 환관 즉 내시)들만이 오가고 있었다.

 

이날 밤. 반란군의 공성소리는 이미 황궁까지 전해졌다. 숭정제가 불러도 어느 왕공대신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장탄식을 여러번 했다. 그리고는 친히 어전전의 종을 울려 문무백관을 조회에 불렀다. 바깥에는 불꽃이 하늘을 찔렀다. 이 종소리는 쓸쓸하게 장례의 종소리처럼 텅빈 황궁안을 맴돌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순간, 어떤 태감이 놀라서 다가왔다. 그는 아주 놀란 목소리로 황제에게 말했다. "내성이 이미 함락되었습니다. 황상께서는 속히 떠나시지요"

 

숭정제는 급히 물었다: "대영병은 어디에 있는가?"

 

태감이 답했다: "대영병은 이미 흩어졌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태감도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때 숭정황제는 마음 속으로 느꼈다. 대명왕조는 끝났다. 그는 후사를 처리해야 했다. 그래서, 자기의 황후비빈태자공주를 모두 모았다. 먼저 몇몇 후비들이 스스로 정리하도록 시켰다(몇몇 여인은 울면서 절하고, 허리띠를 풀어 자진하였다). 가장 비참한 것은 15세의 공주였다. 우는 와중에 놀라서 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숭정제도 비통함을 금할 수 없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딸에게 말하였다: "너는 어쩐 일로 우리 집안에 태어났느냐?" 말을 마치자 왼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른손으로 칼을 휘둘러 15세의 어린 공주를 죽였다.

 

숭정제는 다시 몇몇의 아직 숨이 남아 있는 비빈을 내려쳤다. 선혈은 이미 황제의 몸에 가득했다.

 

이후 그는 자기의 손가락을 깨물어, 자기의 피로 최후의 유조(遺詔)를 써내려갔다.

 

"짐은 덕이 부족하여 하늘의 허물을 입어, 역적이 경사를 핍박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여러 신하들이 짐을 잘못 이끈 탓이다. 심은 죽어서도 지하에서 조종을 뵐 면목이 없다. 스스로 황관을 벗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덮어, 도적이 짐의 시신을 마음대로 갈기갈기 찢어도 좋으니, 백성들은 한 사람도 상하게 하지 말라"

 

이 글을 써서 가슴에 넣고는 궁을 나섰다. 매산(지금의 경산)에 올랐다. 그를 따라 산에 오른 것은 태감 왕승은 하나였다. 산언덕에서 약간 구부러진 나무를 발견하고 두 사람은 같이 목을 매어 자결했다.

 

숭정황제의 죽음과 더불어, 277년의 대명왕조는 와해되었다. 이자성은 북경에 들어온 후에 다시 물러났다. 만청이 북경에 들어왔다...이런 뒷 얘기는 여기서 하지 않기로 한다.

 

숭정황제는 17년간 재위에 있었는데, 비교적 열심히 정사를 하는 편이었다. 태감을 총애한 것을 빼면, 그는 그의 이전 황제들보다 아주 나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기 전에 여전히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였다. 비록 이러했지만, 형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고, 대명왕조의 지금까지 쌓여온 모순과 부패는 이미 그의 힘으로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명왕조의 이러한 결과는 마치 필연인 것처럼 보인다. 역대 집정자들은 이 역사를 보면 반드시 조심해야 할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굽는 것과 같다" 나쁜 짓을 서슴지 않는 집정자들은 망하는 것도 금방이다. 이것이 철칙이다.

 

대명왕조는 폭력으로 강산을 얻었고, 역시 폭력으로 강산을 빼앗겼다. 수천년동안 중국역사상의 왕조교체는 피와 불을 불러왔고, 항상 피냄새가 났다. 황조가 바뀌는 경우에 칼을 동원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근대에도 이러했다.

 

숭정이 죽는 이 해인 1644년(음력 갑신년)에 중화천지에는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황제를 칭한 사람도 세명이다(숭정, 순치, 이자성), 사람들은 계속 죽어갔다.

 

시간이 흘러 300년이 지났다. 1944년 3월 19일, 곽말약선생은 중경의 <<신화일보>>에 유명한 <<갑신삼백년제>>라는 글을 발표했다. 곽말약선생은 전쟁이 끊이지 않는 시기에 다시 "갑신년" 즉, 1644년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1844년을 전후하여 대청은 아편전쟁, 팔국연합군의 북경점령, 태평천국, 의화단....

 

1944년을 전후하여, 일본의 침입, 만주국, 왕정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