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원재 7

유화 <나의 전남편(我的前夫)>의 감추어진 비밀

글: 관우당주(觀雨堂主) 2007년 유화 이 세상에 나왔고, 문혁때 청춘을 망쳐버린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이 유화의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알려진 바로는 이 유화의 원제목은 였는데, 나중에 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렇게 제목을 고치자, 전체 그림의 의미가 풍부해진다. 이를 보면 한 그림의 성공은 화면의 세세한 처리에만 완전히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술가는 자신의 사상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예술품의 사회적 반응은 마치 평론가의 감상과 소개를 벗어날 수 없는 것같다. 그러나, 평론가의 감상은 예술의 정(情)과 리(理)를 잘 알아야 할 뿐아니라, 반드시 화면이 전달하는 내용이 처한 역사적 환경도 이해해야 한다. 만일 평론가가 그 역살르 모르고 단지 "그림"만 보고서..

홍위병(紅衛兵) 현상에 관한 반성

글: 관우당주(觀雨堂主) 1 홍위병운동은 지난세기 문혁에서 빠트릴 수 없는 일종의 현상이다. 세계의 범위에서 말하자면, 더더욱 아주 독특한 현상이다. 이 현상은 비록 잠시 나타났지만, 영향은 아주 크고 깊었다. 중공의 독재통치와 불가분이며, 후세에 남긴 사고의 공간은 아주 광활하다. 국내외의 학자들이 문혁을 연구하려면, 홍위병운동이라는 이 기본현상을 피해갈 수 없다. 사실상, 홍위병운동에 대한 연구는 서방지식계의 문혁에 대한 연구보다 뒤쳐졌고, 국내의 대기근에 대한 연구보다 뒤쳐졌으며, 중공의 정풍반우(整風反右)에 대한 연구보다 뒤쳐졌다. 이는 당연히 중국이 국내에서 홍위병에 대한 연구를 금기시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외에 한가지 현저한 제약조건은 당시 홍위병운동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인물들이 지금도 ..

리광만(李光滿)의 대자보는 문혁2.0의 전주곡인가?

글: 건원(乾元) 최근 들어 이름없는 한 극좌파 논객이 쓴 살기등등한 시평 라는 글을 중국의 각 대형매체에서 속속 전재하고 있어, 국내외의 중국미래에 관심을 가진 대소매체, 개인방송들에 의해 이는 문혁2.0으로 향하는 전주곡이 아닌지 주목을 끌고 있다. 그리고 리광만의 이 글을 문혁직전에 요문원(姚文元)이 발표한 는 글이나 혹은 북경대학의 섭원재(聶元梓)의 그 문혁 최초의 대자보에 비유하면서, 산우욕래풍만루(山雨欲來風滿樓)라 할 수 있으며, 사람들은 살벌한 기운을 느끼고 있고, 중국의 미래에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있다. 리광만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앞에서 언급한 요문원이나 섭원재는 어찌 되었건 중국체제내에서 어느 정도 이름이 있던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 리광만은 기실 아마추어 우마오(五毛)이다. 인..

왕홍문(王洪文)은 어떻게 후계자의 자리에 올랐는가?

글: 김산(金汕) 1972년 9월, 중앙정부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왕홍문을 북경으로 불러들인다. 제10기 1중전회에서 왕홍문은 당의 부주석에 오른다. 그의 서열은 모택동, 주은래의 바로 다음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모택동의 '후계자'로 떠오른다. 그 당시 주은래는 이미 불치의 암을 앓고 있었으며, 얼마..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어디서 왔는가?

작자: 미상 문화대혁명시기의 사람들의 광적인 광경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 의문에 휩싸일 것이다: 하나의 국가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광적으로 정치운동에 빠져들었는가?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유제의 존재이다. 공유제체..

섭원재(聂元梓) : 난세광녀

섭원재(Nie Yuan Zi)는 하남성 북부의 활현이라는 농촌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4년 13세인 섭원재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개봉시의 북창여자중학에 입학한다. 1937년 7월 태원시의 국민사범대학에서 "희맹회"에서 주최한 군사훈련에 참가하면서 혁명의 길로 들어선다. 1938년 산서성 진성에 도착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