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북대와 청화

북대(北大)와 문혁(文革)

중은우시 2012. 7. 9. 00:09

글: 임휘(林輝)

 

 

 

중공고위층 강생(康生)의 지시를 받아, 1966년 5월 25일, 북경대학 철학과 당지부서기인 섭원재(聶元梓)가 앞장서서 '전국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를 붙였다. 그 후, 이 대자보는 모택동의 지지를 받게 되고, 문혁이 북대, 북경 및 전국에서 기세등등하게 전개된다. 그리고 극히 참혹한 악영항을 조성한다. 북대의 교수, 교사 및 행정지도자들도 거기에 포함되어 최초의 피해자들이 된다.

 

당시 북경시위 제1서기를 맡고 있던 이설봉(李雪峰)의 회고에 따르면, "1966년 6월 18일 오전 9시, 북경대학 전체공작대 대원은 모두 교학구로 가서 회의를 개최한다. 학생들은 독자적으로 학생기숙사에서 학습하고 회의를 개최했다. 화학과, 생물학과, 동어과, 서어과, 중문과, 무선전기과의 학생은 공작조가 없는 기간을 이용하여, 학생기숙사에서 40여명의 같이 공부하던 교사, 당원간부 및 2명의 학생간부를 비투(批鬪)했다. 1,2학년 학생이 위주가 되어, 39동에 '투귀대(鬪鬼臺)'를 설치하고, 잉크를 피투인의 얼굴에 쏟고, 화장실의 쓰레기통을 모자로 만들어 피두인의 머리에 씌웠다. 무릎을 꿇리고, 소수인들은 피투자를 때리기도 했다."

 

또 다른 북대졸업생인 왕우금(王友琴)의 글에 따르면, "6.18"사건에서 맞은 사람은 60여명이었고, 거기에는 생물학과 당총지부 부서기, 강사 호수문(胡壽文)이 있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밧줄로 목이 매어져서 땅바닥에 쓰러져 끌려다녔다. 호수문은 거의 질식해서 죽을 뻔한다. 그는 두 손으로 밧줄을 힘껏 잡고 있어서 겨우 목졸려 죽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문과의 총지부서기 정현책(程賢策), 교수인 왕력(王力), 오조상(吳組湘), 왕요(王瑤)등도 있었다.

 

비록 이후 "6.18"사건은 유소기 등에 의하여 부정되어, 문혁이 한 때 침체기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모택동의 진실한 의도에 따라, "유소기를 포격하라"는 일파가 드러나고, 공개적으로 모택동이 홍위병을 접견하면서 그들의 혁명을 부추기자, 문혁은 다시 한번 요원의 불길처럼 전개되었다. 북대라는 문혁의 발원지는 각지 홍위병들이 찾는 성지가 된다. 매일 7.8만 심지어 10만명이 찾아왔다.

 

북대는 문혁때 '휘황'한 전적을 많이 남긴다. 예를 들어, 전국집단구타의 기풍을 열고, 대학 무투(武鬪)의 선하(先河)를 열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그들이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은 소위 "자산계급반동권위"인 교수들과 어떻게 투쟁하고, 괴롭혔느냐는 것이다. 목패를 걸게 하고, '노동개조대'를 만들고, '우붕(牛棚)'에 가두고, 이것들은 모두 북대학생들이 만들어낸 걸작들이다.

 

소위 '목패를 걸게' 하는 것은 십여근, 심지어 수십근짜리의 '반동학술권위XXX"라는 류의 글이 쓰여진 목패를 찰사로 피해자의 목에 거는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로 하여금 허리를 굽히게 하여, 목패의 중량 전부가 철사의 작용으로 목에 걸려있게 하는 것이다. 사용한 철사가 가늘면 가늘수록 살에 잘 파고들었다고 한다.

 

소위 '노동개조대'는 이들 비판받은 교수들을 집중시켜, 학교내 혹은 학교외에서 '노동개조'를 하는 것이다.

 

소위 '우붕'은 실제로 불법감옥이다. 바로 지금의 새클러(Arther M. Sackler, 賽克勒)고고박물관의 소재지이다. 이곳에서 낮에는 일을 하고, '우귀사신(牛鬼蛇神)'들은 새벽훈련, 저녁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항상 '최고지시'를 외워야 했고, 수시로 관리인원의 욕과 구타를 당해야 했다. 당시 북대학생들이 이런 악독한 방법으로 자신의 스승을 괴롭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왕우금이 쓴 글에 따르면, 적지 않은 유명한 교수들이 이런 괴롭힘을 당했다. 예를 들면, 미학교수 주광잠(朱光潛), 동어과교수 계선림(季羨林), 서어과 교수 오흥화(吳興華),등등이다. 45세인 오흥화는 '노동개조'때 괴롭힘을 당해서 죽는다. 계선림은 나중에 <우붕잡억>이라는 글을 써서 이 차마 되돌아보기 힘든 시절을 상세히 묘사했다.

 

비판받고, 괴롭힘을 당한 많은 교수, 교사들은 사상유례없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횄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문혁기간동안 북대에서는 최소한 71명이 자살하거나 비정상사망을 했다.

 

처음 자살한 사람은 역사학과 교수인 왕전(汪籛)이다. 그는 1966년 6월 11일 살출제 DDT를 먹고 자살한다. 그후 자살한 사람에는 수학과 강사 동회윤(董懷允), 영문과 교수 유대인(兪大絪), 중문과 중공총지부서기 정현책, 철학과 심리학교수 심내장(沈乃章), 화학과 부주임, 부교수 노석곤(盧錫錕), 생물학과 교수 진동도(陳同度), 북대교무장 최웅곤(崔雄昆), 물리학의 저명한 노교수 요육태(饒毓泰), 러시아어계 교수 공유태(龔維泰), 수학역학과 교수 동철보(董鐵寶)와 교사 진영화(陳永和), 역사학교수, 부총장 전백찬(翦伯贊) 부부....

 

그들은 혹은 음독을 선택하고 혹은 목을 매고, 혹은 미명호에 몸을 던지거나, 혹은 건물에서 몸을 던졌다...그들이 이렇게 죽음을 선택한 것은 세상에 대하여 더 이상 미련이 없기 때문이었다.

 

많은 학자들의 비정상적 사망은 북대의 역사에 수치스러운 한 페이지를 남겼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의 북대에서 일찌기 발생한 일에 대한 반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데도 일찌감치 잊혀진 것이다. 북대의 역사에서 가볍게 스쳐지나가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