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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유화 <나의 전남편(我的前夫)>의 감추어진 비밀

by 중은우시 2022. 9. 19.

글: 관우당주(觀雨堂主)

유화 <나의 전남편>

2007년 유화 <나의 전남편>이 세상에 나왔고, 문혁때 청춘을 망쳐버린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이 유화의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알려진 바로는 이 유화의 원제목은 <청춘의 노래(靑春之歌)>였는데, 나중에 <나의 전남편>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렇게 제목을 고치자, 전체 그림의 의미가 풍부해진다. 이를 보면 한 그림의 성공은 화면의 세세한 처리에만 완전히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술가는 자신의 사상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예술품의 사회적 반응은 마치 평론가의 감상과 소개를 벗어날 수 없는 것같다. 그러나, 평론가의 감상은 예술의 정(情)과 리(理)를 잘 알아야 할 뿐아니라, 반드시 화면이 전달하는 내용이 처한 역사적 환경도 이해해야 한다. 만일 평론가가 그 역살르 모르고 단지 "그림"만 보고서 생각한다면, 그가 보게 되는 것은 단지 화면에 나오는 신부의 굴욕적이지만 어쩌지 못하고, 근심이 가득한 것만 보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당연히 이렇게 추론할 것이다. 이 신부의 부모는 문혁때 아마도 박해를 당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가산몰수당하고, 가두행진당하고, 비투(批鬪, 비판투쟁) 당하고....심지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하여 여러가지 값싼 동정을 속속 화면에 나오는 유약하고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신부에게 보낼 것이다. 

 

미안하지만 솔직히 말하겠다. 그렇게 부광약영(浮光掠影)하는 평론은 황당무계하고, 무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전남편>에 숨겨진 진실한 사정은 처음부터 사람들이 보지 못했다. 이 진실한 사정은 아마도 화가가 창조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감추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림을 감상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이 진실한 사정은 점점 잊혀져 버렸다. 사람들이 이 그림을 감상할 때,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바로 "지청(知靑, 지식청년의 약칭)"일 것이다. 그렇다. 화면성의 여주인공은 바로 일찌기 극권주의 호소에 호응하여 농촌으로 "삽대낙호(揷隊落戶)"한 지식청년이다. 문혁때, 도시의 만은 지식청년들이 농촌으로 가는 붐이 일었다. 발단은 1969년이다. 그 원인은 1968년 12월 22일 모택동이 내린 '최고지시'이다: "지식청년은 농촌으로 가서, 빈하중농으로부터 재교육을 받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 두 달 전에 주은래는 <인민일보>에 발표한 강연을 통해 이미 "대규모 상산하항(上山下鄕)"의 국책을 제기했다.

 

모택동은 왜 1968년이 끝나갈 때를 잡아 지식청년에게 농촌으로 가라고 호소했을까? 그리고 영구적으로 '삽대낙호'하도록 요구했을까? 이것이 바로 <나의 전남편>에 숨겨진 진상이다. 원래 소위 "지청"은 바로 1966년 "5.16"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급속히 발전하게 된 혁명조반조직 "홍위병(紅衛兵)"이다. 문혁전기 홍위병은 3종류로 구분된다. 

 

첫째 유형은 진소로(陳小魯), 송빈빈(宋彬彬), 등남(鄧楠), 하붕비(賀鵬飛), 담립부(譚立夫).....등 중고등학생을 우두머리로 하는 북경태자당홍위병이다. 이들 홍위병은 자신의 조직이 있었다. 먼저 서성구규찰대(西城區糾察隊), 나중에 연합행동사령부(聯合行動司令部). 그들은 미친 듯이 "홍색공포만세"를 외치며 폭력과 형사범죄를 무법무천(無法無天)으로 저지른다. 짧은 "홍팔월"에 베이징 한 곳에서만 맞아죽은 사람이 1,772명에 이른다. 박해받아 자살한 사람의 숫자는 부지기수이다. 그들은 모택동의 "조반유리(造反有理)"의 의미를 이해했고, 그들의 행위는 그들 부친대의 "투지주(鬪地主), 분전지(分田地)"행위의 연속이었다. 

 

둘째 유형은 섭원재(聶元梓), 괴대부(蒯大富)등 학생지도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북경대학생홍위병(수도삼사)이다. 나아가 국내 각 대학 전문학교 홍위병까지 연장된다. 이들이 홍위병의 주체부분이다. 형사범죄를 저지른 것은 비교적 적다. 그러나 모택동, 강청과 중앙문혁이 통제하는 도구가 된다. 이들 홍위병은 금방 충분히 영향을 받아 운동을 시작하여, 전후로 성도(成都)에서 팽덕회(彭德懷)를 비투하고, 팽진(彭眞)의 납치를 기획하고, 팽진, 나서경(羅瑞卿), 육정일(陸定一), 양상곤(楊尙昆)에 대한 비투를 모의한다. 나아가 함정을 파서 왕광미(王光美, 유소기의 부인)를 납치하여 청화대학으로 데려가 모욕하고, 나아가 중남해로 쳐들어가서 유소기를 둘러싸고 구타한다....그들은 모택동과 강청이 하고 싶었으나 직접 손쓰지 못했던 일들을 완성한다.

 

셋째유형은 전국 각 중고등학교 홍위병이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들은 오합지졸이었다. 이들 홍위병의 또 다른 명칭은 "노삼계(老三屆, 중학교 고등학교 66년, 67년, 68년입학생을 포함함)"이다. 그들은 모택동의 말에 현혹되어, "혁명은 손님을 불러서 식사하는 것이 아니다"를 믿고, 북경홍위병을 모방한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파사구(破四舊,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을 타파하자는 것), 입사신(立四新, 신사상, 신문화,신풍속, 신습관을 세우자는 것)"을 소리높여 외치며, 문화유산을 미친듯이 파괴했다. 그들은 도처에서 가산을 몰수하고, '우귀사신(牛鬼蛇神, 타도대상으로 범위가 넓다. 흑오류에 주자파등을 합친 의미임)'과 '사류분자(四類分子, 지주분자, 부농분자, 반혁명분자, 괴분자(壞分子, 나쁜놈이라는 뜻)를 가리킴)'를 구타하고 짓밟았다. 그들로 인하여 무수한 교사들과 문화명사들은 간담을 조려야 했다. '노삼계'홍위병의 대표적인 모습은 낡은 군복에 병사용의 군용가방을 맨 것이다. 당연히 팔에는 홍위병완장을 찼다.

 

1968년 9월에 이르러, 전국의 마지막 두 곳(티벳, 신장)에 혁명위원회가 설립된다.모택동이 유소기와 그의 잔당을 제거하려는 계획은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홍위병의 이용가치도 이제는 없어진 것이다. 태자당홍위병은 후계자로서 준비해야 했고, 대학생홍위병은 도구로서의 의미가 상존했다. 사회취업압력이 계속 거세지자 '노삼계'홍위병은 그저 버림을 받을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리하여 12월 홍위병에게 '농촌에 삽대낙호'하여,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도록' 최고지시를 하달하게 된 것이다. <나의 전남편>에 나오는 가련한 지청 신부는 바로 이런 배경하에 부모를 떠나, 오랫동안 생활해온 도시를 떠나 극도로 척박하고 가난한 황토고원에서 '재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1966년의 홍위병현상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했다. 이제 다시 <나의 전남편> 유화로 돌아가보면, 이것이야말로 그림에서 완전히 감추어둔 진상이다. 그림속의 지청신부를 보면 얼굴에는 미래에 대한 실망으로 가득하고, 억울해하면서 분명하게 초조한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그가 입은 옷은 진실한 정보를 완전히 감출 수가 없었다. 지청신부가 입고 있는 것이 바로 퇴색한 옛군복, 어깨에는 군용가방을 매고 있으며, 가슴에는 모택동상장을 달고 있다. 더 이상 해석할 필요가 없이 유화 <나의 전남편>에 나오는 지청신부가 바로 이전의 "홍위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셋째유형의 홍위병인 것이다. 이 지청신부의 또 다른 명칭은 바로 "노삼계"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런 말을 했다: "하나의 비극적인 사실은 가장 사악한 일이 바로 마음 속에서 선한 일을 할지 악한 일을 할지 확정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노삼계'홍위병으로서 화면상의 그녀는 일찌기 얼마나 기세등등하고, 격정에 넘치면서, 아무 것도 뒤돌아보지 않고 '혁명행동'을 했었던가. 일찌기 미친듯이 '파사구, 입사신'을 하고, 폭력적으로 '우귀사신을 모조리 쓸어버리지' 않았던가. 일찌기 '모주석의 혁명노선을 죽음으로 보위하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노삼계' 홍위병으로서, 그녀는 얼마나 많이 주먹을 휘두르며 가산을 몰수했을까? 얼마나 많이 교사 혹은 우귀사신, 사류분자들에게 폭력을 가했을까? 아마도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도저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황토고원의 가난뱅이 사내와 어쩔 수 없이 '부부'가 되어 토요동(土窑洞) 앞의 긴 의자에 앉아있게 된 것이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니, 그녀는 일찌감치 도시로 돌아갈 희망을 잃었다. 슬픈 것은 그녀의 퇴색한 옛군복과 군용가방 그리고 모택동상장까지, 비록 팔에 둘렀던 홍위병완장은 빠졌지만, 여전히 1년여전에 '혁명무죄, 조반유리'를 외치던 때와 똑같다는 것이다.

 

헤아려보면, 이 지청신부, 혹은 이 '노삼계'홍위병은 현재 나이가 70세가량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지금 70세가량의 노인은 바로 그 죄악의 역사를 직접 겪고 목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이미 그들에게 이중신분을 부여했다: 먼저 지청으로서, 그들은 동정받아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육받을 권리를 일찌감치 무정하게 박탈당했고, 그들의 청춘은 완전히 매장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지어 부득이 자신의 육체를 지킬 권리도 포기해야 했었다; 다음으로, '노삼계' 홍위병으로서 그들은 일찌기 '파사구, 입사신'의 혁명소장으로 일찌기 '우귀사신을 쓸어버렸고' '지부반괴(地富反壞, 지주 부농, 반혁명, 괴분자)'와 '흑오류(黑五類)'들이 말만 들어도 얼굴색이 변하게 만들었던 용사들이다. 또한 일찌기 학교교사 심지어 가족까지 구타하고 상해했던 '혁명사업의 계승자'들이다. 얼마나 많은 문화명사들이 그들의 괴롭힘에 자살을 선택해야했을까....

 

유화 <나의 전남편>에서 가려진 진상이 수면위로 드러날 때, 사람들은 이 착품을 보면서 혹은 단순하게 동정하던 것이 더욱 복잡한 감정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아마도 계속 물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런 효과는 바로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신성한 사명이다. 그림의 지청신부 내지 당년에 풍운을 질타했던 '노삼계'홍위병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더 이상 '평용의 악'에 깊이 빠져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지 말고 자신이 받은 상해를 가지고 자신의 예전 죄악을 가리려 하지 말라. 너희가 살아있는 동안에 너희가 해야할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각성, 둘은 참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