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홍위병(紅衛兵) 현상에 관한 반성

by 중은우시 2022. 9. 2.

 

글: 관우당주(觀雨堂主)

 

1

 

홍위병운동은 지난세기 문혁에서 빠트릴 수 없는 일종의 현상이다. 세계의 범위에서 말하자면, 더더욱 아주 독특한 현상이다. 이 현상은 비록 잠시 나타났지만, 영향은 아주 크고 깊었다. 중공의 독재통치와 불가분이며, 후세에 남긴 사고의 공간은 아주 광활하다. 국내외의 학자들이 문혁을 연구하려면, 홍위병운동이라는 이 기본현상을 피해갈 수 없다. 사실상, 홍위병운동에 대한 연구는 서방지식계의 문혁에 대한 연구보다 뒤쳐졌고, 국내의 대기근에 대한 연구보다 뒤쳐졌으며, 중공의 정풍반우(整風反右)에 대한 연구보다 뒤쳐졌다. 이는 당연히 중국이 국내에서 홍위병에 대한 연구를 금기시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외에 한가지 현저한 제약조건은 당시 홍위병운동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인물들이 지금도 건재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직접 참여한 사람으로서 당시의 풍운변환을 잘 알고 있다. 다만 수십년동안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은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다. 그들은 개혁개방의 기회를 빌어 당대서방철학, 법학, 경제학 혹은 사회학등 학과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 이는 그들이 이 직접 겪은 역사를 생각할 때, 고지에 서서 숲을 볼 수 없게 만든다. 당연히 심도있게 들어갈 수도 없고, 더욱 전면적으로 내려다볼 수도 없다.

 

1966년 5월 29일, 청화부중(淸華附中)의 장승지(張承志, 장청즈)라는 학생이 교내에 붙인 대자보(大字報)에 "모택동의 홍색위병(毛澤東的紅色衛兵)"이라고 작성자를 표시했고, 이것이 '홍위병'이라는 명칭의 기원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정보는 모택동에 대한 개인숭배가 이미 놀라운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장승지는 나중에 아주 재능있는 작가가 된다. 그러나 문자를 보면 장승지는 모택동에 대한 진실한 숭배자는 아니다. 그러나 당시 전체사회의 모택동에 대한 숭배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조류가 되어 있었다. 이 점으로 인하여, 모택동은 쉽게 발견한다: 그의 도구상자에 또 하나의 새로운 도구를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용한 후에는 버릴 수 있는 도구이다.

 

2

 

홍위병현상에 대한 연구에 대하여 최소한의 요구사항은 홍위병에 대한 분류이다. 정확하게 분류해야만, 비로소 홍위병운동의 진상을 정리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당시의 홍위병은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 유형, 초기 홍위병으로 베이징의 일부 학교의 고위간부자제들이며, 중학(우리나라의 중학교, 고등학교를 합친 것)생이 위주이다. 이 부류의 홍위병은 바로 오늘날 말하는 태자당(太子黨)이다. 이 부류의 홍위병은 명확한 후계의식이 있었다. 모택동이 이런 말을 한다: "세계는 너희의 것이다. 또한 우리의 것이다. 다만 결국은 너희의 것이 된다." 이는 그들이 가장 흥미를 느낀 말이다. 그들 중 영향력이 비교적 컸던 사람은 진소로(陳小魯, 천샤오루), 송빈빈(宋彬彬), 담립부(譚立夫, 탄리푸), 등용(鄧榕, 덩룽), 하붕비(賀鵬飛, 허펑페이), 복대화(卜大華, 푸다화), 낙소해(駱小海, 뤄샤오하이)등이 있다. 그들은 모두 신귀족으로 자처했다. 왜냐하면 강산은 그들의 부친대에서 싸워서 차지했고 내일은 당연히 그들이 강산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혁이 끝난 후, 그들은 전후로 중공중앙정치국, 금융계최고위층, 대형국유기업등에 들어간다. 후계의식은 통치의식으로 전환된다. 이런 후계와 통치의식은 나중에 시진핑(習近平), 보시라이(薄熙來)등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담립부가 당시에 쓴 대련(對聯)이 널리 알려진다: "아버지가 영웅이면 아들도 사나이이고(老子英雄兒好漢), 아버지가 반동이면 아들도 나쁜 놈이다(老子反動兒混蛋)" 이 대련은 태자당인 홍위병들이 '혈통론'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근정묘홍(根正苗紅)의 후계자로 자처한 심리를 엿볼 수 있다. 얼마 후, '혈통론'을 비판한 민간사상가 우라극(遇羅克, 위뤄커)가 사형판결을 받고, 다시 그 후에 "혈통론"을 고취하던 태자당 담립부는 문화부 판공실주임이 된다. 이건 완전히 사람과 귀신이 뒤바뀐 시대인 것이다.

 

모택동의 또 다른 한 마디는 이들 홍위병들에게 극히 중요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이치는 복잡다단하지만, 결국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조반유리(造反有理, 반란에는 정당한 도리가 있다)이다. 모택동과 그들의 부친대는 바로 반란으로, 토호들을 타도하여 토지를 나누어 줌으로써 성공한 것이다. 모택동과 그들의 부친들은 초기의 반란에서 중국의 넓은 농촌의 생산력을 치명적으로 파괴시켰고, 중국인의 도덕관념을 왜곡시켜서 오늘날에 이른다. 모택동은 지주, 부농들에게 높은 모자를 씌워 길거리를 행진하게 하는 투쟁을 찬양했고, 이처럼 '호남농민운동'을 모범으로 삼은 야만적인 행위는 문혁이 시작되자마자 이들 홍위병들에 의해 그대로 복제되어 사용된다. 그들의 부친들은 이런 행위를 직접 실행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도 이런 것에 전혀 낯설지 않았다. <국제가>의 가사 하나는 그들을 흥분시켜 마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구세계는 타도되어 사라질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세계가 타도되어 사라진다고 하여, 그것이 바로 노예들이 일어서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다른 잔인한 노예주가 등장하는 것이다. 문혁초기 진소로(陳毅의 아들)가 만든 서성구규찰대(西城區糾察隊)부터 나중에 악명이 자자한 연합행동사령부(연동)까지 모두 이 부류의 홍위병이 조직한 폭력집단이다. 그들은 가산몰수, 납치, 박해뿐아니라, 사적으로 재판정을 열고, 고문을 하며, 허리띠버클로 사람을 때렸고, 가죽신발로 피해자들의 머리, 얼굴과 가슴을 짓밟았다. 그들은 피의 빚을 가득 진 죄인들이다. 오늘날 중공정치국에서 발언권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이 부류의 홍위병들을 주체로 한 태자당이다.

 

문혁이 시작되자, 이 부류의 홍위병은 그들의 부친대와 마찬가지로, 모택동이 도대체 무슨 궁리를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부친대로부터 얻어들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정보를 얻어들을 뿐이었다. 예를 들어, 1966년 12월 중앙희극학원의 홍위병 섭향진(葉向眞, 예샹쩐, 葉劍英의 딸)은 팽진(彭眞, 펑쩐)을 납치할 것을 기획한다. 그후에 팽진, 나서경(羅瑞卿, 뤄뤼칭), 육정일(陸定一, 루딩이), 양상곤(楊尙昆, 양샹쿤)을 비투하는 모의에 참가한다. 그것은 바로 섭검영의 입으로부터 섭향진은 모택동이 그런 의향을 가졌다는 것을 들어서 감히 손을 쓴 것이다. 기실 모택동이 이들 홍위병을 교묘하게 운용한 것이고, 섭검영은 이를 통해 자신의 모택동에 대한 충성을 표시한 것이다. 가장 먼저 공개적으로 팽, 나, 육, 상을 반혁명집단이라고 비난한 것고 바로 섭검영이다. 대다수가 태자당인 홍위병은 그 시대의 기본행위는 바로 반란, 파괴, 상해와 살인이었다. 그들의 혈액 안에는 도적의 유전자가 바뀌지 않고 흘렀다. 이들 홍위병들의 반란은 호남농민운동의 연속이다. 또한 그들 부친대의 살인약탈의 연장이다. 그들은 파죽지세였고, 아무도 막거나 저항하지 못했다. 이는 홍위병의 죄행을 중공이 종용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하여 전체 사회는 지암시각(至暗時刻)에 빠진다.

 

1966년 "홍팔월" 베이징에서만 9,200호가 재산을 몰수당하고, 맞아죽은 사람이 1,772명에 달한다. 갖은 괴롭힘으로 자살한 사람은 통계를 낼 수없을 정도이다. 거기에는 노사(老舍), 향달(向達), 진몽가(陳夢家), 유대인(兪大絪)같은 명사학자들도 포함된다. 죽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화장터로 보내어졌는데, 그 중에는 혼절한 산 사람도 있었다. 화장터의 노동자들이 발견해서 목숨을 구한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중앙문혁소조는 9월의 <간보(簡報)>에서 홍위병의 혁명행동은 '전과가 풍성하다'고 말한다. 이어서, '홍색공포만세'라는 구호가 국내에 크게 울려퍼진다. 홍위병의 '홍팔월'에서 잔혹한 정도는 남경대학살이나 크리스탈나흐트(유대인 대학살)에 못지 않다. 개혁개방후, 신속히 부를 쌓은 것도 이들이다. 이들 홍위병의 죄행은 지금도 정의의 청산이나 심판을 받지 않았다. 부패와 약탈로 얻은 엄청난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다. 이건 여러 글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이 법률의 제재를 피하는 법을 알아서가 아니다. 사실살 그들은 법률의 제재를 피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찌감치 순조롭게 승계하여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법률은 그들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다. 그런데도 정의의 심판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저 웃기는 말이다.

 

3

 

둘째유형, "5대학생영수"를 위시한 수도의 대학생홍위병이다. 홍위병의 "5대영수"는 모택동이 아무렇게나 붙인 명칭이다. 모택동은 부하들이나 타격대상을 마음대로 묶어서 부르는 습관이 있다. 예를 들어, 고강(高崗), 요수석(饒漱石)을 하나로 묶어서 '고요반당집단'이라고 부른다. 장백균(章伯鈞), 나융기(羅隆基)를 묶어서 "장라연맹"이라고 부른다. 기실 고강, 요수석은 무슨 집단을 만든 것도 아니고, 장백균, 나융기도 무슨 연맹을 맺은 것이 아니다. "5대영수"는 섭원재(聶元梓, 북경대학), 괴대부(蒯大富, 청화대학), 담후란(譚厚蘭, 북경사범대학), 한애정(韓愛晶, 북경항공학원), 왕대빈(王大賓, 북경지질학원)이다. 섭원재는 북사대여부중(北師大女附中)에서 맞아죽은 당총지부서기 변중운(卞仲耘)과 마찬가지로 1937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노혁명가이다. 이해에 담후란은 막 출생했고, 괴대부,한애정,왕대빈의 '3명의 영수'는 다시 8,9년이 지나서 태어났다. 문혁이 발발하기 전에, 섭원재는 북경대학 철학과의 당총지부서기였고, 학생이 아니었다. 그런데, 학생영수가 된다. 마치 한 사람이 축구를 해본 적도 없는데, 축구스타로 등극한 것과 같았다. 이 우스개는 거의 '황제의 새옷'이나 비슷했다. 수십년동안 아무도 이를 까발리지 않았다. 원인은 아마도 모택동이 직접 정해주었으므로 섭원재는 홍위병에 대하여 지시를 할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 철류(鐵流)는 섭원재에 대한 평가는 아주 적절하다. 섭원재는 권력욕이 아주 강하고, 정이라고는 없다. 처로서나 모친으로서 섭원재는 완전 불합격이다. 섭원재는 심지어 여성스러운 맛도 전혀 없다. 섭원재의 학식정도는 중학생정도이다. 그녀가 읽은 것은 모조리 중공당중앙문건뿐이다. 그런데도 북경대학 철학과를 장악했으니, 이는 북경대학에 대한 무정한 조롱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철학과의 회의때 섭원재는 진지하게 후르시쵸프가 <고요한 돈강>을 썼다고 말해서, 교수들이 뒤에서 비웃는 거리가 된다. 계선림(季羨林)은 회고글에서 섭원재를 아예 "파혜(破鞋, 다 떨어진 신발이라는 뜻인데, 화냥년같은 욕으로 쓰임)"라고 칭했다. 이런 인간쓰레기가 모택동의 한마디때문에 '전국최초마르크스레닌주의대자보'의 제1작자가 된다. 이는 중공에게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풍자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대자보는 5월 25일에 나온다. 제목은 '송석(宋碩), 육평(陸平), 팽패운(彭佩雲)는 문화대혁명에 무엇을 했는가?>이다.모택동은 이것이 팽진과 북경시위를 끌어내릴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고, 대자보에 대하여 극력 칭찬한다. 그리고 6월 1일 전국에 방송한다. 이렇게 하여 섭원재는 전국에 이름을 날리게 된다.

 

기실 괴대부 이전에 수도삼사(수도홍위병제3사령부의 약칭)의 학생지도자는 북경지질학원의 주성소(朱成昭)였다. 수도삼사의 전신은 수도고교홍위병사령부이고, 섭향진이 희극학원, 전영학원 및 음악학원의 홍위병을 가입시켰으므로 수도삼사로 개칭하게 된다. 수도고교홍위병은 처음부터 태자당홍위병과는 차이를 보였다. 그 구별은 주로 (1) 후계의식이 없다. (2) 혈통론에 반대한다. 주성소는 재능이 있었다. 괴대부, 한애정, 왕대빈등 3명보다 3-4살이 많았다. 독립사고능력이 괴,한,왕등 학생영수보다 훨씬 뛰어났다. 이는 섭향진이 주성소에게 애정을 품게 된 원인이다. 강청(江靑)과 중앙문혁은 주성소와 지질학원홍위병, 북경항공학원홍위병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그들을 사천으로 보내 팽덕회(彭德懷)에 대한 비투를 선동한다. 주성소는 그 기회를 틈타, 팽덕회의 친필원고자료를 많이 읽어보고, 고향(안휘)의 대기근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사고로 분석한 결과 최종적으로 팽덕회는 여산회의때 억울하게 비판받았다고 결론내린다. 그리하여 팽덕회에게 동정심을 가진다. 1966년말, 수도삼사의 간부회의에서 주성소는 두려울 게 없는 담량으로 문혁의 "감독은 사기꾼이고, 연기자는 미치광이며, 관객은 바보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당시 우라극, 장지신(張志新)을 뛰어넘는 놀라운 통찰력이었다. 또한 중국고교(대학)에서 보기 드문 먼저 깨달은 사람였다. 아마도 이러한 인식수준에 이르렀던 사람으로는 곽수영(郭守英, 郭沫若의 아들), 장학자(張鶴慈, 張東孫의 손자)등 일찌감치 불만을 가졌던 학생들도 있었고, 영원히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의 학생들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다른 먼저 깨달은 사람들은 의견을 드러낼 기회나 담량이 없었을 뿐이고, 이렇게 극단적으로 공포스러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북경외국어학원의 독일어전공의 한 여학생은 모택동의 8.18.홍위병열병식을 보고 이는 나치와 다를 것이 없다고 의식하고, 즉시 서신을 써서 모택동을 공격하고, 자살할 준비를 한다. 괴대부, 한애정, 왕대빈등 학생영수는 근본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모택동 수중의 도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논리에 부합할 것이다. 섭원재, 담후란은 더더욱 언급할 가치도 없다. 담후란은 1965년 북경사범대학 정치교육과의 조간생(調干生, 간부를 학교에 보내어 공부시키는 것을 가리킴)이다. 담후란의 문혁때의 주요영향은 "파사구(破四舊), 입사신(立四新)"이다. 미친 듯이 공가점(孔家店)을 부수고 문화재와 유산을 파괴했다.

 

주성소와 담후란, 괴대부, 한애정, 왕대빈등의 유일하게 같은 점이라면 북대 6.18사건후, 모택동은 무한으로 수영을 하러 떠난다. 목적은 함정을 파서 유소기등이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유소기는 과연 '반우'와 '사청(四淸)'의 옛 방식대로 각 대학에 공작조를 파견하고, 많은 학생들이 타격을 받는다. 일시에 '검은 구름이 성으로 밀려와서 성을 무너뜨리려는 듯'했다. 주성소와 담후란, 괴대부, 한애정, 왕대빈등 많은 학생들이 모두 위험한 지경에 처한다. 주성소는 공작조에 의견을 제시함으로 인하여 공작조에 의해 운동후 노동개조를 보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괴대부는 비판을 받은 후 지질학원으로 도망쳤다. 7월하순, 모택동이 돌연 베이징으로 돌아와서 공작조에 관한 보고를 받은 후 한 마디를 한다: "무릇 학생운동을 진압하는 자는 최후가 좋지 않을 것이다!" 그후 공작조를 해체하도록 명령한다. 이는 유소기에 대한 큰 타격이었다. 유소기는 전혀 대응할 수가 없었다. 비판당하던 학생들에 있어서 이는 해방이나 다름없었다. 주성소와 담후란, 괴대부, 한애정, 왕대빈은 이렇게 구분된다: 주성소를 제외하고, 나머지 학생영수들은 과연 모택동에게 감격해 마지 않았다. 특히 담후란, 한애정은 모택동의 반수방수(反修防修)의 '위대한 사상'에 대한 완전한 추종자가 된다. 일찌기 호풍환우하던 학생영수들이 소년시대에 받은 세뇌교육이 마침내 효과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주성소는 달랐다. 그의 독립사고 및 팽덕회에 대한 동정은 그로 하여금 모택동수중의 도구가 될 수 없게 하였다. 모택동과 중앙문혁은 그를 용인할 수 없었다. 1967년 8월 20일 주성소와 섭향진은 '반혁명집단조직죄'로 체포된다. 그후 오랫동안 감옥에 갇힌다. 임표의 "9.13사건"후 섭향진은 석방되고, 주은래의 개입으로 섭향진은 주성소와 철저히 관계를 끊는다. 주성소가 정식으로 명예회복한 것은 1980년 6월의 일이다. 그러나 그후 한동안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시기에 그는 대륙을 떠날 기회를 잡지 못했고, 회고록이나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지 못하고 1998년 돌연 세상을 떠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괴대부와 청화대학 홍위병은 왕광미(王光美, 유소기의 부인)를 유인하여 붙잡아 강제로 청화대학으로 데려와 비투하고 모욕하고, 나아가 중남해로 진입하여 유소기를 위투(圍投)한다. 얼마전 지질학원, 항공학원홍위병이 팽덕회를 비투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두 주은래, 강청과 중앙문혁의 명시적인(암시가 아니라) 지시를 받은 것이다. 홍위병이라는 어용 '군중조직'이 없었다면, 강청과 중앙문혁은 왕광미를 공개적으로 비투, 모욕할 수 없었을 것이고, 유소기를 직접 비투 구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괴대부와 홍위병은 모택동을 대신하여 모택동이 직접 손쓸 수 없는 일들을 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철저히 유소기를 타도하는 밑바탕을 깐다. 유소기의 공작조가 그들을 조치했기 때문에, 그리고 모택동이 그들을 구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기꺼이 모택동의 도구가 되었다. 괴대부의 인식수준이 이 정도이다. 가련하지 않을 수 없다. 왕대빈도 완전히 여산회의에서 팽덕회가 억울하게 당했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았다. 등소평이 권력을 장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애정은 심지어 인터뷰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바로 모주석을 따라 반수, 방수한 것이다. 나 자신의 인생목표는 바로 공산주의를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 이를 보면, 북경대학생홍위병지도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풍운을 질타했지만, 기실 그저 살아있는 강시에 불과했다. 북경대학생홍위병은 중앙문혁이 길렀고, 중앙문혁에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다.

 

4

 

셋째유형의 홍위병은 북경이외의 상해, 광주 내지 전국대학,중학의 홍위병이다. 이는 수량에서 절대다수이며, 분산된 학생혁명조반조직이다. 오합지중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모택동에 고혹되어, '조반유리'를 믿고, '혁명은 손님을 모셔서 식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믿었다. 그들이 하는 것은 모두 북경의 홍위병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그중 태자당홍위병을 모방하는 곳도 있고, 수도삼사홍위병을 모방하는 곳도 있었다. 그들은 미친 듯이 깨부수고 악독하게 '사류분자(四類分子)'를 학대했다. 교사를 마구 패고, 문화명사와 각급관리에 대하여도 재산몰수, 징벌, 모욕, 걸기러행진등 온갖 행패를 다 했다. 저명한 번역가 부뢰(傅雷), 피아니스트 고성영(顧聖嬰), 유명감독 정군리(鄭君里), 배우 상관운주(上官雲珠)...등등이 자살한다. 상해의 무강대루(武康大樓)는 사람들이 속속 투신자살하여 일시에 '다이빙풀'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자본주의 도로를 가는 당권파'들은 더더욱 홍위병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모택동의 사악한 지혜는 여기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모택동은 오랫동안 시대를 역행하는 조치로 중공과 하층민중의 갈등을 부추겨놓고는 뒤돌아서서 이를 이용하여 유소기를 타격한다. 그리고 사회하층의 중공에 대한 원한을 유소기를 위시한 '주자파'애 대한 원한으로 뒤바꿔 놓는다.

 

전국홍위병들이 혼란스럽게 투쟁한 결과는 각지의 홍위병들이 양파로 분열하여 내부투쟁을 벌이게 된다. 모택동은 다시 공선대, 군선대를 학교로 진주시켜 투(鬪), 비(批), 개(改)를 지도하게 한다. 두 가지 사건이 있는데, 홍위병의 무지로 인해 일어난 결과이다. 하나는 중경홍위병묘원이다. 일찌기 양파로 분열한 홍위병은 머리 속에 뭐만 가득찼는지, 공동으로 자신들의 약속을 실현한다: 죽음으로 모주석의 혁명노선을 보위한다. 그들이 죽기 전에 외치는 구호는 완전히 일치했다; "유유희생다장지(唯有犧牲多壯志), 감규일월환신천(敢叫日月換新天)" 그들은 인생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생명을 여기에서 끝낸다. 그들 부모에게 남긴 것은 끝없는 애상(哀傷)이다. 또 다른 사건은 구타하고 부수고 빼앗는 일이 끝난 후의 홍위병들을 대거 농촌에 보낸 것이다. 명목을 좋았다: '빈하중농에게 재교육을 받는다' 그들의 청춘은 이렇게 철저히 매장된다. 화가 왕국빈(王國斌)은 지식청년이 농촌에서 합법적으로 유린당한 것을 표현한 걸작 <나의 전남편>이 2007년 공개전시된다. 무수한 당시 홍위병들이 이 그림 앞에서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지식청년는 바로 구타하고 부수고 빼앗은 일이 끝난후의 홍위병이다. 홍위병들은 돌연 발견한다. 그들의 청춘은 무정한 기만과 극도로 거칠게 망가졌다는 것을. 기실 이 그림의 의미는 심원하다. 화면의 신부는 퇴색한 해방군 군복을 입고 있다. 이것은 당시 홍위병의 표준적인 옷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당시 그녀가 구타하고 부수고 빼앗는 미친 듯한 시기에 그녀는 어떻게 소매를 치켜들고 재산을 몰수하고 폭력을 가했던가. 이들 홍위병들 중에는 자신의 스승, '사류분자' 혹은 문화명인을 구타한 자들이 6할, 7할은 될 것인가? 아니면 4할, 5할은 될 것인가? 반세기가 지났지만 아무도 그들이 참회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5

 

홍위병현상은 문화사의 치욕이다. 그들의 우매, 무지와 야만적인 폭력때문이다. 홍위병집단은 모택동의 요강이다: 쓰고난 후에는 버린다. 그들 중의 대다수는 지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도 그러할 것이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타도된 '우귀사신(牛鬼蛇神)의 자녀들' '사류분자의 자녀들'이 비록 차별대우를 받아 홍위병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이로 인하여 그들은 문혁때 청백(淸白)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괴대부, 한애정, 왕대빈등 홍위병 영수들에게 말하고 싶다. 너희들이 살아있을 때, 객관적으로 홍위병이라는 이 현상을 평가하고 싶다면, 전제는 마땅히 중공과 모택동의 여러가지 죄행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먼저 반드시 사람의 자연권리원칙을 알아야 하고, 인류의 고도로 성숙한 정치적 지혜는 근본적으로 요란한 공산주의 유토피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여기에서 나오는 삼권분립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댓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