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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151

왜 이홍장을 명예회복시켜야 하는가? 글: 성시전기(城市傳奇) 청말의 일대중신으로서, 이홍장은 19세기하반기의 중국역사무대에서 시종일관 고금 중외 조야 만한의 각종 모순의 소용돌이중심에 있었다. 그는 전통과 현대 사이에 배회하던 사람이다. 오늘 우리가 되돌아보면, 이홍장의 이상, 이념은 그와 동시대의 사람들보다.. 2008. 10. 10.
태후조희(太后趙姬)의 진실 작자: 미상 사마천의 <<사기>>에서 진시황을 깍아내리는 것으로는 2가지가 핵심이다: 하나는 "한단헌희(邯鄲獻姬)" 즉, 한단에 인질로 잡혀와 있던 진시황의 부친 이인에게 여불위가 임신한 조희를 바쳐 진시황을 낳았으므로 진시황의 생부는 여불위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태.. 2008. 6. 27.
어느 미국인이 본 서태후 글: Isaac Taylor Hedland 비록 지금 서태후(자희태후)는 세상에 살아있지 않지만, 여러 사람들이 공개적인 장소 혹은 비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녀와 교분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일생과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관.. 2008. 4. 30.
서태후와 절세보물 비취서과(翡翠西瓜) 원제목: 한 청나라말기의 여인과 한 쌍의 비취서과에 얽힌 옛 이야기 북경TV 채널3 <<전기중국>> 2008년 4월 13일 저녁 18시35분 방영 프로듀서: 육춘(陸春) 서론 넓다란 자금성 안에서, 일찌기 24명의 서로 다른 성격, 서로 다른 취미의 명,청황제가 거주했었다. 그리고 이들 제왕들 중에서, 2 사람은.. 2008. 4. 15.
서태후는 어떻게 권신 숙순(肅順)을 무너뜨렸는가? 1861년 10월 6일 오시, 압송도중에 백성들이 던지는 기왓조각, 진흙덩어리도 얻어맞아 얼굴이 시퍼렇게 멍들고 부어오른 봉두난발의 중년남자가 북경 서시의 형장에 꿇어앉아 있었다. 죽음을 앞에 놓고도 그는 얼굴색에 변함이 없었으며, 시종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마침내 망나니의 칼이 그의 목.. 2008. 2. 15.
진비(珍妃) : 서태후에게 대든 특이한 후궁 글: 중화유산 중국의 봉건사회에서 후궁은 그저 황제의 후손을 잇기 위한 도구이며, 전례를 행할 때 곁에서 서 있는 역할을 할 뿐이었고, 자신의 의지나 개성을 가져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에 감히 봉건예절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하고, 세속에 대하여 도전을 한, 강렬한 반항심리를 지닌 .. 2008. 1. 2.
한 서방기자가 목격한 서태후의 장례식 글: 헨리 보렐 자희태후(慈禧太后, 서태후)의 방대한 영구(靈柩)가 가마꾼들에 의하여 보렐이 서 있는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금황색의 비단이 영구를 덮고 있는데, 거기에는 푸른색 봉황과 붉은색 구름무늬와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영구의 윗부분에는 금색 원구가 상감되어 있었다. 도로의 건너편.. 2007. 9. 14.
서태후가 전세계국가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다. 글: 수은하(水銀河) 1900년 6월 21일 음력 5월 25일, 당시 중국의 실제통치자인 서태후(자희태후)는 공전절후의 큰 일을 벌인다. 바로 전세계를 상대로 선전포고한 것이다. 서태후는 <<조서(詔書)>>에서, "구차하게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은 만고에 수치스러운 일이다. 크게 들고 일어나서 자웅을 겨.. 2007. 7. 19.
서태후의 능이 왜 동쪽에 있는가? 청나라 동치제때 황궁에는 두 명의 황태후가 있었다. 한명은 자안(慈安)황태후로, 동태후(東太后)라고도 불렀고, 다른 한명은 자희(慈禧)황태후로 서태후(西太后)라고도 불렀다. 두 황태후의 능침은 모두 하북성 준화현의 청동릉(淸東陵)에 있으며,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동서에 나란히 있다. 중간.. 2007. 1. 29.
이홍장: 역사상 가장 억울한 속죄양 작자: 삼호도(三糊塗)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얘기들을 한다. 사실 시대는 속죄양도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 중국역사상 가장 억울한 속죄양은 이홍장을 꼽아야 한다고 본다. 대청제국의 매국노는 단 한 명이다. 그것은 바로 청나라의 실제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던 늙은 태후이다. 이.. 2007. 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