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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의 능이 왜 동쪽에 있는가?

by 중은우시 2007. 1. 29.

청나라 동치제때 황궁에는 두 명의 황태후가 있었다. 한명은 자안(慈安)황태후로, 동태후(東太后)라고도 불렀고, 다른 한명은 자희(慈禧)황태후로 서태후(西太后)라고도 불렀다. 두 황태후의 능침은 모두 하북성 준화현의 청동릉(淸東陵)에 있으며,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동서에 나란히 있다. 중간에는 하나의 마조구(馬槽溝)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것은 동태후가 서쪽에 묻혀 있고, 서태후가 동쪽에 묻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민간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하나는 바둑으로 능을 두고 내기를 걸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동태후는 동쪽에, 서태후는 서쪽에 묻혀야 하는데, 동태후는 정궁황후에서 태후로 승격된 것이므로 그가 지위가 높고, 서태후는 아들이 황제가 되어 그 덕에 황후가 된 것이고 귀비에서 태후로 승격된 것이므로 비록 같은 태후이지만 지위나 자격에서는 동태후보다 한 격이 떨어지므로 서쪽에 묻혀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악독한 서태후가 이를 참을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주 교묘하게 계획을 세워서 바둑으로 내기를 하자고 하였다. 바둑을 이기는 사람이 먼저 능의 위치를 정하기로 했고, 서태후는 계획을 면밀하게 세우고, 충분히 준비하여 이겼다. 그리고는 동쪽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서태후가 동태후의 능침을 차지한 것과 관련하여, 하루는 그녀가 꿈속에 자신이 죽은 것을 보았고, 동태후의 조치하에 자기가 서쪽의 능침에 묻힌 것을 보았다. 이 꿈은 서태후에게 아주 큰 계시를 주었다. 그녀는 만일 동태후가 자기보다 먼저 죽는다면 자기 혼자 수렴청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혼자서 정국을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태후는 동태후를 모해하여 죽였고, 권력을 이용하여 동태후를 서쪽에 묻었다. 그리고 동쪽을 자신을 위하여 남겨두었다.

 

그러나, 전설은 전설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장례제도로 보거나 정리상으로 보거나 동태후는 당연히 서쪽에 묻혀야 하고, 서태후는 동쪽에 묻혀야 했다.

 

동, 서태후의 명칭은 그녀들의 능묘의 위치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녀들이 생전에 거주했던 위치에 따라 정해진 것이다. 자안황태후는 생전에 자금성내의 동육궁의 종수궁(鍾粹宮)에 거주했으므로 동태후라고 칭하였다. 자희황태후는 서육궁중의 저수궁(儲秀宮), 장춘궁(長春宮)에 거주했으므로 서태후라고 칭하였다. 이것은 능침의 방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장례제도에 따르면, 지위가 높고 가까운 자는 더욱 중심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강희제의 경릉, 건륭제의 유릉, 도광제의 모릉의 지궁에서도 모두 여러명의 후비를 배장하고 있는데, 원배후(原配后, 원래의 황후)를 황제의 좌측(즉, 서쪽)에 두고, 계황후(繼皇后)를 그 다음 왼쪽 또는 오른쪽에 두고, 재계후(再繼后)는 그 다음다음 좌측, 또는 다음 우측에 둔다. 황귀비는 그 다음에 놓인다. 함풍황제의 정릉의 서쪽에는 지위가 비교적 높은 동태후의 능이 놓여 가까이 있게 되는 것이고 서태후의 능은 상대적으로 먼 곳에 놓이는 것이다. 이것은 동태후의 능이 서쪽에 있고, 서태후의 능이 동쪽에 있게 된 연유이다.

 

그리고, 청나라때 황제와 황후의 능침의 신도는 모두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의 것을 잇는 것이다. 실제로 자희릉의 신도는 자안릉의 신도를 잇고, 자안릉의 신도는 정릉의 신도위에 있다. 정릉의 신도는 다시 효릉(순치제)의 신도위에 있다. 이로써 자안의 지위가 자희의 지위보다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대량의 청나라궁전의 자료나 관련서적으로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최초로 능지를 선택할 때부터 동태후는 서쪽, 서태후는 동쪽으로 정해져 있었다는 것을.

 

두 황태후릉은 모두 정동릉(定東陵)이라고 부르는데, 자안릉은 보상욕에 있고, 자희릉은 보타욕에 있어서, 자안릉은 보상욕정동릉, 자희릉은 보타욕정동릉이라고도 부른다. 동치12년 2월 10일 양릉은 동시에 착공했고, 광서5년6월에 동시에 완공했다. 양릉의 법도와 공법은 같았고, 우열이 없었고, 높고낮은 구분이 없었다. 광서21년, 서태후는 "오래되어 수리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자기의 능침의 삼전을 뜯어서 다시 지었다. 다른 건축에서 대규모의 보수와 장식을 진행했다. 공사는 서태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중수후의 자희릉은 재로가 귀한 것을 쓰고, 공사를 정교하게 하여 청나라 제후릉중 가장 뛰어난 것이 되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자희릉이 중수된 이후의 것이고, 처음 지었을 때의 모습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