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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가 전세계국가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다.

by 중은우시 2007. 7. 19.

글: 수은하(水銀河)

 

1900년 6월 21일 음력 5월 25일, 당시 중국의 실제통치자인 서태후(자희태후)는 공전절후의 큰 일을 벌인다. 바로 전세계를 상대로 선전포고한 것이다. 서태후는 <<조서(詔書)>>에서, "구차하게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은 만고에 수치스러운 일이다. 크게 들고 일어나서 자웅을 겨뤄보자" 이런 기세는 이전에 상권욕국(喪權辱國, 권리를 빼앗기고 나라를 욕보이는 것)의 서태후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당연히, 이것은 사학계에서 아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30년전에, 영국프랑스연합군이 북경에 쳐들어왔을 때, 서태후의 남편인 함풍제는 양놈들에게 놀라서 좁은 길로 도망쳐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갔고, 결국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도 새로운 서태후가 서양인들의 무서움을 모를 리가 없는데, 더구나 5년전에 청일전쟁에서의 참패도 잊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환갑을 넘긴 노친네가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치매라도 들었는가?

 

이미 중국을 40년간 통치해온 서태후가 미쳤을 리도 없고, 치매에 걸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나중에 취한 일련의 조치를 보면, 당시 이 노친네의 머리는 아주 맑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경거망동을 하게 만든 것일까? 당덕강(唐德剛) 선생은 <<만청칠십년>>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서태후가 갑자기 이렇게 한 것은 하나의 허위정보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허위정보인가? 사건은 그녀가 가장 신임하는 심복인 영록(榮祿)에게부터 시작된다. 5월 20일, 서태후는 어전회의에서 상의를 거쳐, 이홍장과 원세개를 불러오도록 결정한다. 그 의미는 서양인들과 강화협상을 하는 것이고, 돈을 배상하면서, 큰 일은 작은 일로 만들고, 작은 일은 없는 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날 밤에 한 검은 그림자가 총총 영록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영록이 일어나 보니, 원래 자기의 심복인 강소양도 나가걸(羅嘉杰)의 아들이었다. 그는 부친의 명을 받고 밤을 달려 보고하러 온 것이었다.

 

나공자는 나쁜 소식을 가지고 왔는데, 각국 공사들이 이미 연합하여 "황태후로 하여금 권력을 내놓도록 압박할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영록은 이 말을 듣고 대경실색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자신이 무술정변때 했던 일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만일 11개국이 황태후를 물러나게 하고, 광서제를 다시 전면에 나서게 한다면, 자기는 머리가 10개가 있더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 날 밤은 정말 잠을 잘 수 없는 밤이었다. 영록은 밤새 뒤척이다가, 해가 뜨자마자 급히 입궁하여 서태후에게 보고했다. 이번에는 서태후가 혼비백산했다. 서태후는 서양인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그녀의 남편인 함풍제가 바로 서양인들때문에 죽지 않았던가? 이제 서태후는 확실히 알았다. 서양인들이 왜 그녀가 세운 황태자(서태후는 광서제를 몰아내기 위하여 부준을 황태자로 세우고, 광서제를 물러나게 하려 했었으나, 나중에 이를 포기한다)에게 축하하러 오지 않았던지를. 원래 그녀를 쫓아내고 광서제를 다시 올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모두 확실해졌다. 서태후가 가장 우려하던 바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사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서태후는 눈물을 흘리면서 비분이 교차했다. 서양인들은 그녀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다. 지금은 한 가지 길 밖에는 없다. 그저 서양인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이다. 나를 죽이려면 같이 다 죽자. 스스로의 목숨이 문제되는데 대청강산이나 억만백성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다음날 새벽의 어전회의상에서 서태후는 울먹이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였고, 말에 두서도 없었다. 그녀가 이 소식을 공포하자 참석자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단친왕을 비롯한 황친귀족 이십여명은 서로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 격동하여, 이 북경의 권력자들은 서태후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하고, 서양인들과 죽기로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서태후도 말했다. 이왕 싸워도 망하고, 안싸워도 망할 것이라면, "망할때까지 기다리기보다, 한번 싸우고 망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중국근대사자료중간. 의화단>>. 제1책, 제48-49쪽)

 

이렇게 제2차 어전회의는 돌연 "전쟁총동원령"을 내리는 회의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북경의 9개문이 모두 열리고 의화단(義和團)이 대거 북경에 들어왔는데, 밤낮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서태후는 어쨌던 40년간 정치를 농단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충동적으로 의사결정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미국 역사학자인 모어스(페어뱅크의 스승)도 이렇게 말했다: "서태후는 일을 처리할 때 항상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녀는 그저 여인이었다" 아마도, 권력을 내놓으라는 말이 이 노친네에게 타격이 되었던가보다. 이는 모든 독재자들에게 가장 문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알아보자. 궁중에 퍼진 이 허위정보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나중에 그 내력을 조사해보니, 원래 상해 영국상인이 만드는 영문잡지인 <<북화첩보(北華捷報, North-China Dairy News)>>에 사론을 실었는데, 나중에 이 글은 다시 <<자림서보(字林西報)>>에도 전재되었다. 아마도 이 글이 실리기 전에 신문사의 중국계직공이 이 내용을 알고, 바로 나가걸에게 알려준 것같다. 결과적으로 이 내용에 살을 붙여서 중요한 정보로 영록에게까지 보고가 된 것이다.

 

역사는 왕왕 많은 우연이 겹쳐서 이루어진다. 잠깐의 생각차이가 생령을 도탄에 빠뜨리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이왕 서양인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고 결정했으면, 왜 대사관을 그렇게 공격했는데도 함락시키지 못했는가?

 

사실상, 서태후는 비록 분노로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여지는 남겨두었다. 대사관으로 진공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도 아마 각국 공사들로 하여금 정권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철회하도록 핍박하는 용도로 생각했던 것같다. 게다가, 서양공사를 처리하더라도, 나중에 그녀는 "장수는 바깥에 있으면, 군주의 명을 듣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들어 책임을 떠밀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녀는 확실히 이렇게 했다. 그러나, 문제는 각국 공사들이야 어디 자기들이 서태후에게 물러나라고 한 적도 없는데 취소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저 청나라병사들이 공격해오니 죽어라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방군의 우두머리인 영록도 바보는 아니었다. 만일 대사관을 모두 점령하셔 부숴버리고, 공사를 죽여버리면, 서양인들이 책임추궁을 해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처음부터 영록은 병을 가장하여, 원세개의 무위우군(모두 독일식 무장군인)을 다른 곳으로 빼버렸다. 위에서 독촉이 심해지자, 동복상의 감군(甘軍)으로 하여금 싸우게 지시한다.

 

광주에서 관전하는 이홍장은 이 말을 듣고는 가가대소를 했고, 외부의 매체에서 일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사관이 아무 일이 없으니 모두 안심하라!" 원래 동복상은 토비였다. 대사관을 함락시킬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동복상의 군대는 서양대포도 없고, 모두 자체제작한 대포만 있는데, 대포소리만 컸지, 포탄이 떨어지는 것은 보이지를 않을 정도였다.

 

하물며, 영록대인은 서태후의 정책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선전포고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수박, 야�와 같은 위문품을 서양공사관에 전달했다. 그러니, 자신도 물러날 여지를 남겨두어야 했다. 그래서, 영록은 정말로 외국과 통모하기 지작한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도적인 것처럼 하고는 대사관내에 군수물자와 포탄을 대량으로 공급하게 한다. 그리고 공급한 것은 모두 독일제 군수물자이지, 감군의 중국식 화약이 아니었다.

 

가장 웃기는 일은, 동복상의 감군이 공사관을 맹공한지 십여일이 되도록,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을 때, 단친왕 재의는 태후의 상유(上諭)라는 형식으로 무위중군 분통(개략 여단장급)인 장회지(張懷芝)를 파견하여 "개화대포"로 도와주게 한다. 장분통은 군인출신이고, 천진무비학당을 졸업했으며, 나중에 "뇌물총통"인 조곤이 바로 그의 동창이다.

 

처음에는 장분통도 자기가 공을 세울 기회라고 생각했다. 독일제 "개화대포"는 위력이 대단하다. 당시 독일최신의 무기였다. 그저 3발 내지 5발만 쏘면 공사관은 폐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 명령을 내려 대포를 쏘려고 할 때, 장분통은 돌연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포를 한번 쏘게 되면 수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급히 명을 내려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말을 타고 상사인 영록에게 갔다. 영록의 서면명령을 받아서 그것을 증거로 하려고 한 것이다. 영록은 늙은 여우였다. 당연히 친히 명령을 발하려고 하지 않았다. 계속 요청하자 할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냥 대포소리만 나면, 안에서(궁안) 들리지 않겠어?"

 

장분통은 이 말을 듣고는 바로 눈치챘다. 돌아간 후 그는 대포의 조준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다시 조준했다. 조정후에는 목표를 공사관 뒷쪽의 공터로 잡았다. 일시간에 대포가 여러발이 발사되었으니, 아주 장관이었다. 공사관은 그저 대포소리만 들었지, 피해는 없었다. 그저 궁중에서 만족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 장회지는 과연 바보가 아니었다. 나중에 산동순무가 되고, 중화민국이 되고나서는 산동독군이 된다.

 

50일후, 한 대대가 영국국기를 단 인도의 시크병사들을 이끌고 북경에 들어와서 공사관의 포위를 풀어주었다. 북경성이 함락된 것이다.

 

나중에 싸움이 끝나고 나자 서태후는 아주 기뻐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 전쟁의 책임자로 서양인들로부터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계속 중국의 최고통치자로 남아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근거없는 허위정보가 서태후에게 며칠간의 유랑생활을 맛보게 했고, 중국인민에게는 험난한 고난을 안겨주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