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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희제)

강희제는 왜 제정러시아에 영토를 양보하면서까지 전쟁을 회피했을까

by 중은우시 2018. 7. 10.

글: 역사상적나점사아(歷史上的那點事兒)


청나라 268년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의 특이한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강희제건 아니면 나중의 건륭제이건 차라리 영토를 떼어주고 배상금을 물지언정, 시종 서방열강과 끝까지 혈전을 벌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중에서 염숭년이 천고일제라고 추켜세우는 강희제가 특히 두드러진다. 당시 국력도 강하였는데, 왜 제정러시아와 전쟁을 치를 생각은 아예 하질 않았던 것일까?


강희제가 제정러시아와 충돌한 것은 주로 1685년-1688년의 아크사전투이다. 이 전투에 대하여는 아마도 여러분들이 약간 알고 있을 것이니 여기에서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만 한 가지 기이한 일은, 분명히 대승을 거두었는데, 왜 <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해서 많은 영토를 할양했을까라는 점이다. 당시 유럽의 삼류국가인 제정러시아의 침략에 대하여, '천고일제'인 강희제는 왜 대군을 모아서 일거에 제정러시아의 극동세력을 제거해버리지 않았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전문가들이 내놓으 해석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양국간의 평화를 위하여. 이 이유만으로 통크게 영토를 양보한 것이다. 둘째, 북방의 불모지, 한랭지는 굳이 지킬 가치가 없다. 셋째, 군사적 각도에서 만일 혈전을 벌이게 되면 대규모 병력을 모아서 전투를 벌여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노사원정(勞師遠征), 후근불창(後勤不暢)"의 국면이 벌어질 수 있다.


첫째, 둘째의 견해에 대하여는 여기서 코멘트하지 않겠다. 다만, 셋째의 점은 한 가지 문제를 놓치고 있다. 즉, 동북(외동북을 포함하여)은 만주의 고향이다. 청나라가 굴기한 곳이다. 아크사는 바로 그 범위내에 들어 있다. 그런데, 무슨 '노사원정'이란 말인가. 하물며, 제정러시아와 비교하면 강희제는 훨씬 더 가까운 거리만 가도 된다.


그렇다면, 강희제는 왜 군사적으로 곤혹스러워했을까?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1644년 청군의 입관(산해관을 들어와 북경에 자리잡음)이후 만주의 병력은 기본적으로 모두 산해관을 들어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춥고 배고픈 땅에 머무르겠는가? 살기 좋은 중원땅을 버리고.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개략적인 데이타에 따르면, 청군의 입관후 심양을 지키는 군인은 5000명이다. 다른 지방에 흩어져 있는 주둔군을 합쳐도 5000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청나라의 이 해우이는 강희제로 하여금 병력을 모으는데 곤란을 느끼게 했다.


다만, 청나라말기의 데이타를 보면, 아마도 문제가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광서연간, 동북의 금간령(禁墾令, 개간금지령)이 폐지된 후, 당시 요녕, 길림, 흑룡강의 삼성인구는 454만명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강희제에서 광서제까지 중국의 인구는 3.3배가 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나라초기 전체 동북인구는 개략 100만가량이다. 즉, 방대한 동북, 외동북을 합쳐서 겨우 100만명이 살았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장기간 대규모병력을 배치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덧붙인다면, <요동지>의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 주원장시기에 요동에는 개략 100만명의 한족이 살았다. 200여년간의 세월이 흘러 누르하치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는 개략 400만의 한족이 살고 있었다. 다만 청나라군대의 5차에 걸친 입관약탈(인구약탈을 포함)이후, 청나라초기 전체 동북의 인구는 겨우 100만명가량이라는 것이다. 이런 차가운 숫자의 뒤에는 피비린내나는 살기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강희제가 관내의 병력을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제정러시아보다는 거리가 훨씬 가깝다. 그렇다면, 강희제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관건적인 원인이 하나 있다. 즉, 팔기는 이미 버려졌고, 그리고 움직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위력을 보이는 역량이기 때문이다. 녹영을 움직인다면, 쉽게 반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면 만주의 통치에 영향이 미친다. 그래서 더더욱 장기적인 전쟁은 할 수가 없다.


요동이 비어 있으면, 강희제는 다른 왕조때와 마찬가지로 "이민실변(移民實邊, 백성을 이주시켜 변방을 채우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더욱 장기적인 전략계획일 것이다. 어쨌든 제정러시아는 세번이나 도발을 하고, 그들의 본성이 침략적이라는 점은 충분히 드러났다. 강희제는 장래의 상황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여전히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강희제의 전략적인 안목은 정말 형편없다. 이것은 근대 제정러시아의 침략을 가져오는 화근이 되었다.


주목할 점은, 청나라의 국토를 얘기할 때, 많은 사람들은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청나라가 비록 크지만 전통중국인의 범위는 얼마나 큰가. 기실 주로는 역시 전통적인 한족의 땅이다. 동북, 서북, 몽골등지는 진입금지구역이었다. 즉, 서방이 미친듯이 외부로 식민지를 확장할 때, 청나라는 여전히 전통중국인을 새장안에 가두어 놓았다. 이런 상황하에서 사람이 많으면 많을 수록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강건성세라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라. 만일 청나라인구가 외부로 확장되어 퍼져나갈 수 있었더라면, 동북, 외동북등지로 대량이민했더라면, 제정러시아가 침입해 들어오는 것은 고사하고, 아마도 오히려 제정러시아의 극동영토를 모조리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설사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신속히 충분한 무장역량을 결집하여 그리고 충분한 군수조달이 가능했을 것이다. 황량한 토지위에 충분한 민중이 있다면 그것은 강의 양쪽에 큰 나무들이 무수히 들어선 것과 같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안정화되었을 것이다. 이 이치를 강희제도 몰랐으니, 옹정 건륭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