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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자성)

이자성은 북경의 실패후 왜 남경으로 가지 않았는가?

by 중은우시 2019. 1. 7.

글:천애간점(天涯看點)


1644년, 이자성은 산해관에서 패배한 후 북경에서 퇴각한다. 1년도 되지 않아, 이자성의 근거지인 섬서는 청군에 의해 남북에서 협공을 받는다. 이자성은 할 수 없이 대순군을 이끌고 대본영 서안에서 퇴각한다. 처음에 이자성의 생각은 하남을 거쳐 남경으로 가는 것이었다. 나아가 강남을 점거하여 북방의 청나라와 분정항례(分庭抗禮)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기실 당시의 형제로 보면, 이자성의 이 전략계획은 가장 합리적이었고, 가장 현실적인 것이었다.


청군이 동관(潼關)을 돌파한 후, 서안은 이미 청군의 주머니속에 들어간 셈이다. 서북은 비록 대순군이 통치하고 있었지만, 서북은 물산이 척박하고, 지세도 편벽하여, 발전할 공간이 없었다. 서남쪽은 사천인데, 이때 이미 장헌충이 점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바로 여전히 강남을 차지하고 있던 남명이다. 이때 남명은 이미 복왕 주유송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역사에서 홍광제라고 부르는 황제이다. 남경은 명나라 초기의 수도로, 지세가 험준하다. 그리고 강남은 경제가 발달항, 명나라말기의 전쟁으로 파괴되지 않았다. 대량의 병력과 식량을 공급해줄 수 있다. 이자성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자성이 남방으로 이동한 노선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자성의 원래 방향은 남경이었다.서안을 출발한 후, 대순군은 양양, 승천(호북성 종상), 무창등지를 지난다. 그 후에 장강의 강물을 따라 내려가면 바로 남경에 이를 수 있다. 대순군의 실력으로 부패한 남명 홍광정권의 수중에서 남경을 빼앗는 것은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어진 역사는 이자성이 계획한 것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대순군은 무창에서 동쪽으로 강물을 따라 내려가지 못하고, 방향을 바꾸어 서남으로 진군한다. 그렇다면, 이자성은 왜 돌연 생각을 바꾼 것일까? 분석을 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자성이 남경으로 진군하는 것을 포기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대순군은 남으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청군의 아지거(阿濟格)부대가 계속 대순군을 추격했다. 쌍방은 자주 교전을 벌였는데, 모두 대순군의 패배로 끝났다. 대순군의 병사는 피로하고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청군이 추격하는 과정에서 대순군이 강을 따라 남하하기 위해 준비했던 수만척의 선박까지 청군에 빼앗겨 버린 것이다. 선박이 없으면, 대순군은 강을 따라 내려갈 방법이 없다. 그리고 선박이 없으면 남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것이 아주 곤란하다.


많은 사람들은 대순군에 선박이 없으면, 주변의 선박을 모두 징발하거나, 혹은 대순군병사들이 선박을 만들어 강을 내려가는데 필요한 선박을 만들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때 둘째 원인이 더욱 중요하게 된다. 청군의 또 다른 부대인 도도(多鐸)의 부대가 이미 하남 귀덕, 안휘 사주등을 거쳐 남경으로 진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경을 점령하는 것이 시간문제였다. 일단 청군이 남경을 점령하고 나면, 이자성이 다시 남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려 하더라도,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중천에 뜬 해와 같은 청군은 병사들의 자질에서나 아니면 규율성에서나 모두 남명군대보다 강하다. 그래서, 청군이 이미 남경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이자성은 남경으로 가는 생각을 포기한다. 방향을 바꾸어 호광지구로 진격하게 된다.


이자성이 남경공격계획을 포기한 후, 대순군을 이끌고 호광지역으로 진격하게 되는데, 이는 나중에 자신이 통산현 구궁산에서 산민에게 피살당하는 결과를 낳는다. 대순군은 그후 군룡무수(群龍無首)가 되어, 한동안 방황한 후, 남명정권과의 협력을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