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역사산인(歷史山人)
강희제는 청나라의 입관(산해관을 들어와 북경을 수도로 삼은 것) 이후 두번째 황제로 8살에 등극하여 일생동안 문치무공을 이루어 역사학자들에게 청나라때 가장 뛰어난 황제로 칭송받는 황제이다. 당시 '반청복명'의 사상이 민간에서 시시때때로 일어났고, 그는 한편으로 대거 '문자옥'을 진행하여 처벌하고, 다른 한편으로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회유했다. 그러므로, 청왕조가 강남지역에서의 통치가 안정화된 후 전체사회도 점점 정상적인 궤도로 접어들었다. 강희제는 여러번 명효릉(明孝陵, 명나라개국황제 주원장의 능)를 배알했고, 심지어 주원장의 공적에 대하여 "치륭당송(治隆唐宋)"이라고 칭송하는 어필편액까지 쓴다. 강희제가 강남의 사대부들을 회유하는 술책은 실로 고명했다.
다만 그렇기는 해도, 당시 주명황실(朱明皇室)의 후예는 청황실이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청나라군대의 입관후 사회에서는 여러번 대규모 추살이 벌어져, 주명황실의 후손은 거의 씨가 말랐다. 다만 아무리 심하게 추살을 하더라도 그물을 빠져나가는 물고기는 있기 마련이다. 생존하기 위하여 주명황실의 후예들은 이름을 바꾸고 성을 숨기며 살았다. 그중 청나라조정이 가장 신경쓴 인물은 바로 주자환이다. 민간에서는 그를 "주삼태자(朱三太子)"라 불렀다. 바로 숭정제의 다섯쨰 아들로 행방불명된 인물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당시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킨 후 주자환을 생포했다고 한다. 나중에 청군의 입관으로 이자성이 패배한 후, 이자성은 주자환을 데리고 남하하는데, 그 후에 종적이 묘연하다. 그리하여 민간에서는 그에 관한 전설이 여러가지 전해져 내려온다. 심지어 당시에 청군에 방항하기 위하여 각지의 의사(義士)들은 '주삼태자'를 칭하며 역량을 끌어모으곤 했다.
그러나, 주자환이 발견된 것은 극적이었다. 강희38년인 1699년, 강희제는 다시 남경으로 가서 명효릉을 참배한다. 이번에는 참배를 마친 후에 강희제가 즉시 남경을 떠나지 않고, 상당히 오랫동안 머물렀다. 동시에 대신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명황실의 후예를 찾아서 명효릉을 관리하도록 하면 좋겠다.
주자환은 도망치면서 강남까지 왔고, 왕(王)씨성의 집으로 구걸하러 갔다고 한다. 이 지방의 사대부는 주자환의 면모를 보고 그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중에 그가 바로 명황실의 주삼태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왕씨는 원래 예전에 명나라의 관리였고, 황자가 이 지경에까지 처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그를 거두어 왕사원(王士元)으로 개명시킨다. 나중에 왕씨가 병으로 죽은 후, 왕씨집안에서는 더 이상 주자환을 머물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방법이 없어 주자환은 다시 유랑생활을 한다. 마지막에는 절강성 여요 지방에서 호(胡)씨성의 인물을 만난다. 당시 호씨는 그를 가련하게 여기고 또한 그의 재주가 뛰어난 것을 보고는 자신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낸다. 조심성이 많은 주자환은 이렇게 하여 조용히 생활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청나라의 수색이 엄해지자 주자환은 처자식을 데리고 사방으로 도망친다. 강희중기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고, 주자환도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한다. 그는 일생동안 삼남이녀를 낳았고, 나중에 다시 손자까지 생겨서 자손이 많았다.
강희제가 남경의 명효릉을 참배하고 공고를 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주자환은 자신이 안정해졌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는 이미 환갑을 넘긴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알았으랴.강희47년 1708년 사월의 어느 날, 주자환은 주인집의 서재에서 주인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관병이 들이닥친다. 그리고는 그를 체포해서 가버린다. 이 사정의 연유는 주자환이 말년에 사회정책이 이미 느슨해졌다고 생각하여, 한번은 친구와 얘기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밝혔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강희45년 1706년에 누군가 주자환의 명의로 반청복명의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주자환은 가족을 데리고 도망쳤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2년후에 자신이 붙잡힌 것이다. 이때의 주자환은 이미 75세였다. 강희제는 그를 붙잡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명을 내린다: "주삼태자 즉 왕사원은 능지처참하라. 그 자식도 모조리 참하라." 이렇게 하여 평생 도망다니던 주자환은 자신의 아들들이 참수당하는 것을 두눈 멀거니 뜨고 본 후에 자신도 능지처참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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