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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명7

안록산(安祿山)의 종족과 종교배경은...? (하) 글: 영신강(榮新江) 3. 안록산의 종교신앙과 그 응집력 안록산의 종교신앙문제에 대하여 이전에 언급한 경우는 많지 않다. 안록산은 호인이므로 마땅히 다른 호인들처럼 자신의 종교신앙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소그드인은 페르시아에 유래하고 소그드특징을 지닌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중국에서는 천교(祆敎)라고 불렀다. 그래서 우리는 안록산도 천교신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증명한다. 안록산은 이런 종교신앙을 충분히 이용하여, 여러 호족민중을 단결시켰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록산이 정치인물로서 동시에 다른 종교의 역량도 이용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천보14년(755), 안록산은 유주 대민충사(大憫忠寺)의 동남부에 무구정광보탑(無垢淨光寶塔)을 건설했다. 방산석경(房山石經)에도 그.. 2023. 5. 14.
안록산(安祿山)의 종족과 종교배경은...? (상) 글: 영신강(榮新江) 1. 안록산의 소그드(粟特)종족 특징 안록산, 사사명(史思明)등이 반란을 일으킨 종교적 배경을 설명하려면, 먼저 그들의 종족 및 성장배경 즉 그들이 살았던 소그드족 취락의 상황을 명확히 해야 한다. 안록산의 종족에 관하여 일찌감치 1925년, 쿠와바라 지츠조우(桑原騭藏)가 요여능(姚汝能)의 에 근거하여, 강국(康國)출신의 소그드인이라고 하였다. 향달(向達)도 이 견해에 찬동했다. 진인각(陳寅恪)은 한걸음 더 나아가, 안사의 난(安史之亂)때 당나라사람들이 말하는 "잡종호(雜種胡)"는 대다수의 경우 아홉성의 소그드인(九姓粟特人)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1955년, Edwin G. Pulleyblank(중국명 蒲立本)는 성명, 내원(來源)등 방면에서 상세히 안록산이 막북 돌궐칸국내부에서 생.. 2023. 5. 14.
안록산(安祿山)은 반란후 1년만에 죽었는데, 안사의 난은 오랫동안 지속된 이유는...? 글: 압사룡(押沙龍) "안사의 난(安史之亂)"의 주인공 중 하나로서, 안록산은 아주 기이한 인물이다. 그는 능력도 있고, 야심도 있다. 그러나, 아주 집착적인 사명감같은 것은 없었다. 대사를 이루는 사람들은 왕왕 이런 사명감이 필요하다. 안록산은 투기꾼에 더 가까워보였다. 그는 낙양을 점령한 후 서둘르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대연(大燕)이라 한다. 그러나, 형세가 일단 악화되자 그는 신념을 잃어버린 듯했고, 이제 끝났다고 여기는 듯했으며, 곧 질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부하가 그를 위로한다. "대사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수만의 무리를 거두어 천하에 횡행하며 도척(盜跖)이 되더라도 오년 십년은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안록산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한다: "네가 내 마음을 풀어주는구나.. 2022. 1. 3.
예진황후(睿眞皇后) 심씨(沈氏): 당나라의 3대황제가 수십년간 찾았으나 찾지 못한... 글: 사문정품(史文精品) 자식이 모친을 사랑하는 것은 인류의 본능이다. 제왕이라고 하더라도 예외일 수는 없다. 예진황후 심씨는 당나라의 제9대황제 당덕종(唐德宗)의 생모이다. 안사의 난때 심씨는 난군의 공격에 갇혀 있다가 결국 행방불명된다. 당덕종이 즉위한 후, 그는 전국에 그.. 2019. 1. 7.
중국 고대의 공성전(2): 고대 성지(城池)의 건축특색 중국초기의 성지(城池)는 절대다수가 토축(土築), 즉 흙으로 쌓은 것이었다. 명나라 이후, 각지의 성벽은 비로소 대규모로 벽돌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중국고대역사의 절대다수의 시간동안, 성지는 누런 모양이었다. 일찌기 3천년전인 은상(殷商) 시대에,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 2014. 7. 17.
심진주(沈珍珠)와 6명의 당나라 황제 글: 양영춘(梁迎春) 자고이래로 강소,절강에는 미녀가 많이 나왔다. 당나라때 절강 호주(湖州)의 한 여자가 있었는데, 미모는 꽃과 같고, 현숙순량(賢淑純良)했다. 그리고 시사가무에 모두 정통했다. 단지 운명이 기구하여,여러번 난리를 맞이하였고, 그녀의 최후는 천고의 수수께끼이다. .. 2013. 11. 15.
한유(韓愈)의 죽음이 남긴 수수께끼 글: 진재지(陳在智),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고대실 장경(長慶) 2년(822년), 이월 초이틀,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은 병부시랑(兵部侍郞) 한유는 골치아픈 임무를 맡았다. 진주(鎭州, 지금의 하북성 정정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원인은 조정에서 진주에 절도사(節度使)로 파견한 전홍정(.. 2012. 8.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