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초기의 성지(城池)는 절대다수가 토축(土築), 즉 흙으로 쌓은 것이었다. 명나라 이후, 각지의 성벽은 비로소 대규모로 벽돌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중국고대역사의 절대다수의 시간동안, 성지는 누런 모양이었다. 일찌기 3천년전인 은상(殷商) 시대에,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판축(版築) 기술을 알았다. 소위 '판축'이라는 것은 축성때 두 개의 나무판을 이용하여 두개의 판 사이의 너비가 성벽의 두께가 되는 것이다. 판의 바깥은 나무기둥으로 지탱한다. 그리고 두개의 판 사이에 진흙을 가득 넣어서, 저(杵, 공이)로 진흙을 찧는다. 끝나고 나면 목판,목주를 떼어내면 성벽이 되는 것이다.
춘추시대에 접어들면서, 판축의 기술은 크게 올라간다. 보편적으로 채용된 것은 현판항축법(懸板夯築法)이다. 즉 목곤(木棍)을 양측의 협판(夾板)을 통과하도록 하고, 밧줄로 고정시켜 똑바르게 한 후 중간에 흙을 메워서 다진다. <시경>에 나오는 "기승칙직(其繩則直), 축판이재(縮版以載)"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런 방법이다. 이런 판축기술로 축성한 성벽은 이전보다 훨씬 튼튼했다. 그러므로, 예전에 양측에 두던 호성파(護城坡)를 없앨 수 있었다. 이를 통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데 훨씬 난이도가 높게 되었다. 당시에 어떤 성벽은 흙덩이(개개의 흙덩이의 크기는 1미터X40센티미터X20센티미터임)를 쌓아서 만들기도 했는데, 아래 위를 서로 교차하게 하여 쌓아서, 성벽의 밀도와 강도를 높이기도 했다.
춘추시대 이래로, 중국의 성지는 이런 소박한 토축방법을 사용해왔다. 근 2천년이 흐른 후, 그 이름도 유명한 원대도(북경)의 성벽은 여전히 항토로 축성했다. 이런 토축의 성벽은 보기에는 그다지 좋지 않고, 그다지 튼튼하지도 않다. 특히 비가 내리면 빗물에 침식되어 손괴될 수 있다. 당연히 예외도 있다. 예를 들어, 동진 십육국시대에 하(夏)나라 혁련발발 대선우(407-425년 재위)가 만든 통만성은 토축사상의 기적이다. 통만성이 채용한 것은 '증토축성'법이다. 즉, 찹쌀즙, 백분토, 모래와 숙석회를 섞어서 다져 쌓은 것이다. 비록 토성이지만, 돌과 같은 단단한 재질과 강도를 갖추었다. 전설에 따르면, 시공을 책임진 질간아리(叱干阿利) 대장군은 아주 엄격한 기준으로 요구해서, 잔혹할 정도였다. 만들고 난 성벽에 사람을 시켜 철추로 검사했다. 철추가 1촌이 들어가면, 즉시 그 장인을 죽여버려, 시신을 성벽 안에 넣었다. 이런 미친듯한 고압적인 정책하에, 6년에 걸친 시공을 거쳐 완성된 통만성의 건축품질이 아주 뛰어났다. "그 날카로움은 칼과 도끼를 갈 수 있을 정도이다." 현대의 콘크리트와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당연히 이는 특별한 사례이다. 대다수의 토성은 견고함과 강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높고, 크고, 두텁게 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2천여년전의 제(齊)나라의 도성 임치(臨淄)의 성벽은 너비가 20미터이다. 초나라 도성인 영(郢)의 성벽두께도 14미터이다. 냉병기시대에, 이런 너비를 가지면 공격을 견디는 힘은 믿을 만하다. 그외에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높고 튼튼한 성벽외에, 성벽과 평행하게 인공으로 깊은 참호(물을 끌어들일 수 있고, 그렇게 하면 호성하가 됨)을 판다. 큰 도성의 성밖에는 호구호(護溝壕)가 둘러싸고 있으며 통상적으로 너비는 30미터이고, 깊이도 4,5미터이다.
그러나, 토성은 토성의 장점도 있다. 그것은 바로 쉽게 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사의 난때 이광필이 태원을 지킬 때, 반장 사사명의 대군이 밀려왔다. 만일 방원 40리의 태원성을 튼튼하게 수리하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군민을 이끌고 성밖에 호구를 파면서, 한편으로 사람을 시켜 파낸 흙으로 흙벽돌을 만들어, 흙벽돌로 보루를 만든다. 한 곳이 파괴되면, 다시 흙덩이로 메워놓는다.
군사방어라는 각도에서 보자면, 중국고대 성지의 구축은 배치가 정묘하고 기관이 겹겹이라고 말할 수 있다. 높고 큰 성벽의 꼭대기에는 외측에 요철(凹凸)이 연속된 이빨모양의 왜장(矮墻)을 쌓는데, 치첩(稚堞)이라고 불렀다. 타장(垜墻)이라고도 부른다. 위에는 타구(垜口)가 있어 화살을 쏘거나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했고, 아래에는 통풍구멍이 있어 성벽을 보호하는데 쓰였다. 안쪽의 왜장(矮墻)은 여장(女墻)이라고 부르고, "비예(睥睨)"라고도 불렀다. 일반적으로 '타구'보다 낮고, 난간의 역할을 했다. 사병들이 오고 갈 때 헛디뎌 떨어지지 않게 하는 작용을 한다. 그외에, 성벽내부에는 환성마로(環城馬路)와 등성도(登城道)를 건설한다.
성벽의 매 성문의 한가운데에는 모두 성루(城樓)를 짓는다. 이것은 성벽의 꼭대기에 있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고층건축이다. 평소에는 높이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고, 전쟁때는 주장이 이곳에서 지휘를 한다. 이곳은 성에서 중요한 고공방어설비이다. 높은 성벽의 외측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성박이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 이곳은 바로 마면(馬面) 혹은 적대(敵臺), 돈대(墩臺), 장대(墻臺)라고 불리는 곳이다. 마년은 장방형과 반원형의 두 가지가 있다. 왜관이 가늘고 길어서 말의 얼굴같다고 하여 '마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년의 사용은 성벽의 상호작용으로 성아래의 사각지대를 없애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삼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너비는 12미터 내지 20미터이고, 튀어나온 성체의 외표면은 8미터 내지 12미터이다. 서로간의 거래는 20미터 내지 250미터이다(일반적으로는 70미터). 이는 송나라때 진규의 <수성록.수성기요>의 기록과 일치한다: "마면(馬面), 옛 제도에 따르면, 육십보에 1 좌(座)씩 둔다. 성밖으로 튀어 나와 있으며, 이장(二丈)이상이다. 넓고 좁기는 지형에 따라 서로 다르다. 양측에서 성의 귀퉁이를 볼 수 있으며 그 위에는 모두 누자(樓子)가 있따." 냉병기시대에 이 거리는 바로 화살을 쏘거나 돌을 던질 때의 유효사정거리내이다.
마면의 방어 및 전쟁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마면의 위에는 일반적으로 모두 적루(敵樓)를 건설했다. 여기에는 병력을 주둔시키고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한 무기를 보관하기도 한다. 성벽의 방어성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전시에는 그것이 튀어나오고 높은 특징을 이용하여 적의 상황을 살피고, 관찰하여, 적이 성아래를 우회하여 공성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또한 적루는 정면과 좌우의 삼면에서 교차화력을 이용하여 적을 저격할 수 있고, 수시로 점선을 연결시켜 엄밀한 고공화력망을 구성할 수 있다. 성벽방어공정의 주요구성부분이 된다. 그외에 성벽의 사각에 있는 각대(角臺)에는 각각 누각을 하나씩 만드는데, 이를 각루(角樓)라 부른다. 각루의 방향은 성벽과 135도이다. 누각의 높이, 크기는 성루와 적루의 중간이다. 주로 성의 사각을 방어하는 것이 목적이다. 즉 성이 구부러진 곳의 방어가 약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전체 성의 방어능력을 강화시킨다. 전쟁시에 각루의 안에서 지키는 사람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아 시야가 넓어, 여러 각도에서 진격해오는 적을 감시하고 칠 수 있다.
군사공격의 각도에서 본다면, 한 성의 가장 약한 부분은 자연히 성문이다. 그러므로, 성의 설계자는 자연히 성문에 대하여 보호역량을 강화하는 조치를 한다. 규모가 작은 성지는 일반적으로 현문(懸門) 혹은 조교(弔橋)를 쓴다. 큰 성지에는 옹성(瓮城)을 설치한다. 옹성은 성문의 바깥에 건설하는 작은 성이다. 월성(月城)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전문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든 작은 성이다.<무경총요전집.수성>에 다르면, "그 성의 바깥에 있는 옹성은 네모나거나 둥글다. 지형에 따라서 만든다. 높이와 두께는 성과 같이 하고, 오직 문 하나를 비스듬히 둔다. 좌우 어디에 두는지는 편의에 따라서 한다." 즉, 적군이 옹성의 성문을 격파하더라도 아직도 주성문의 방어가 가능하다. 옹성의 안은 협소하여 대규모 병력의 작전을 벌이기 어려우므로, 적군의 진격속도를 늦출 수 있다. 그래서 성벽 꼭대기의 수비군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보면서 사방에서 사격할 수 있어 적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한다. 이것은 소위 '문을 걸어잠그고 개패듯이 패는 것'(關門打狗), "독안에 든 자라잡기(瓮中捉鼈)"이다. <시경.정풍.출기동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출기인도(出其闉闍), 유녀여도(有女如荼)" 여기서 '인도'는 바로 '옹성'을 가리킨다. 이를 보면, 일찌감치 춘추시대에 성의 방어기술은 이미 상당히 완비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성벽, 성루, 호성하, 마면, 적루, 각루, 옹성등으로 구성된 입체성방어 배치국면은 기본적으로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성숙되어 정형화되었고, 명청시대까지 지속된다.
오늘날 우리는 북경 천안문광장에서 정양문(正陽門)을 바라보면, 예전 냉병기시대에 성병의 웅위한 풍채를 느낄 수 있다. 정양문은 북경의 경사구문(京師九門)중 하나이다. 그것은 정양문성루(城樓), 정양문전루(箭樓), 정양문옹성(瓮城)이 일체가 되어 완벽한 고대상어성건축체제를 보여준다. 명나라 정통4년(1439년), 경사의 방어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경사의 각성문의 바깥에는 전루(箭樓)를 추가한다. 정양문전루는 바로 이 때 만들어졌다. 성루와 전루의 사이에는 원래 거대한 옹성이 있었다. 남북으로 108미터, 동서로 너비 88.6미터이다. 옹성의 사방에는 각각 문이 하나씩 있으며 모두 공권식(拱券式) 문동(門洞)이었다. 정양문의 성루는 높이가 43.65미터이고, 정양문 전루의 높이는 35.37미터이다. 모두 중국내지 세계의 '성문'중 가장 높고 웅위한 성루이며 전루이다.
한 성의 방어능력이 강대한지 여부는 성 자체의 건설요소외에, 당연히 성이 위치한 지리적 선택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고대 성지의 부지선택은 '풍수'를 중시했다. 미신적인 말들은 빼더라도, 천시지리의 편리를 이용하고, 산과 물에 가까이 하여 병법에서 말하는 '성유불가공(城有不可攻)의 우월한 수비태세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사반공배(事半功倍)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특히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한 상황하에서 이 점은 특히 중요하다. 고대전쟁사상 송,원시기에 발생한 두개의 성의 방어전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기로 하자.
하나는 조어성(釣魚城)이다. 남송말기 송원(宋元)전쟁이 발발한다. 사천제치사(四川制置使) 겸 지중경부(知重慶府) 여개(余玠)는 몽골군대의 진격을 막기 위하여, 파주(播州, 지금의 귀주성 준의) 사람 염진(冉璡), 염박(冉璞) 형제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바로 "택험(擇險), 임인(任人), 적속(積粟), 주병(駐兵), 사성(徙城)"의 건의이다. 순우3년(1243년)에 조어산에 성을 쌓고 합주 및 석조현의 관청을 그곳으로 옮기고, 병력과 양식을 쌓아두어 삼강(三江)을 막는다. 이렇게 하여 중경을 막는 병풍으로 삼았다. 조어성은 산을 따라 쌓아서, 산이면서 성이고, 성이면서 산이다. 그리하여 금성탕지와 같이 견고했다. 그곳에는 험준한 절벽을 따라 내외의 두 개의 방어선이 구축되었을 뿐아니라, 세로로는 수군부두까지 연결된다. 암도로 출구가 있고, 일자의 성벽과 서로 연결되어 보급선이 확보되었다. 그리거 천지천정(天池泉井)과 수동문(水洞門)을 대표로 하는 배수계통도 있었다. 성안의 양극대지에는 좋은 전답도 있어 천무(千畝)에 달했다. 양식과 풀이 충분하고, 수원에 걱정이 없었다. 게다가 지휘도 적절히 잘 하여, 저항을 아주 잘했다. 그리하여 몽골대군이 비록 용맹하기 그지없지만, 그저 성을 바라보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고 속수무책이었다. 조어성을 공격하는 전투에서 대명이 자자한 몽케 칸이 비환(飛丸)에 맞아서 황천으로 간다. 몽케 칸이 전사한 후, 악주(호북 무창)로 진군하던 몽케의 동생 쿠빌라이와 장주(지금의 호남 장사)로 진군하던 타차르 그리고 다마스커스를 점령하고 고대이집트의 마무르크왕조의 군대와 전쟁을 벌이던 훌레구는 칸의 자리를 다투기 위하여 황급히 군대를 되돌린다. 이때부터 몽골귀족집단은 장기간의 내부투쟁에 들어간다. 조어성은 세계역사상, '송나라 왕조를 이어지게 하고, 유라시아에서 전쟁의 피해를 늦추게 하고 몽골이 아프리카로 확장하는 것을 막는" 불후의 공적을 세운다. 조어성은 바로 '동방의 메카", '상제절편처(上帝折鞭處)'로 국내외에 이름을 날리게 된다. 만일 몽케 칸이 조어대에서 목숨을 잃은 것에는 우연의 요소가 있다고 치더라도, 조어성이 군민일체가 되어 하나의 자그마한 석두성에 의존하여, 몽골의 공격을 36년간이나 막았다는 것은 '행운'이라는 두 글자로 간단히 개괄할 수 없다. '사람'의 요소 이외에 성의 독특한 지리위치와 이를 기초로한 산성방어체계의 공로도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것은 양양성(襄陽城)이다. 양양성과 이웃한 도시 번성(樊城)은 지금의 호북성 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한수(漢水)의 양안에 있으며 두 성은 서로 물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한수는 더욱 남쪽의 무창에서 장강으로 흘러들어간다. 그 중요성은 독특한 전략적 위치에 있다; 그들이 장강유역에 들어가는 최후의 보루이며, 장강중부 강한평원, 동남과 서부지구로통하는 길을 지키는 교통요도이다. 이 두개의 성을 탈취하게 되면 몽골에 하나의 기지를 제공하게 되어 남부의 다른 지역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런 특수한 지리적 위치때문에, 남송군대는 양양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견고한 성보, 견실한 성벽과 깊은 호성하'를 만들어 방어공사를 강화한다. 몽골인들은 참중한 사망의 댓가를 치르고 5년의 포위공격끝에 비로소 이 눈엣가시를 없앨 수 있었다. 남송의 양양수군이 이렇게 긴 기간동안 저항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는 바로 성방의 특수한 지리적 위치이다.
유라시아 및 아프리카의 삼개 대륙을 석권하고 거의 싸우면 이기는 몽골군대에 있어서, 남송의 성지의 강대한 방어역량에 연이어 패퇴하고 심지어 칸까지 목숨을 잃게 되자 그 교훈과 자극은 적다고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몽골인들로 하여금 성지, 특히 마지막에 귀순한 남방성지에 대하여 특별한 반감을 지녔다. 원세조 쿠빌라이는 바로 몽케 칸의 동생이다. 남송을 정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계획적으로 회하유역, 장강중류, 장강상류지역의 성벽을 부숴 버린다. 소수의 성시만이 각종 특수한 원인으로 성벽을 남길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강서의 융흥성은 비서강의 홍수방어목적때문에 성벽을 보존할 수 있었다. 원나라때 진대진이 찬수한 <대덕남해지> 권8 <성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주군이 있으면 성지가 있다. 그래서 외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다....천병이 남하하며, 성벽을 부수었고, 누,노,치,첩(樓櫓雉堞)은 모조리 없어진다. 이후에는 이로 인하여 다시 복원되지 못했다." 없애버리고 새로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보면 성을 없애버린 것은 단순한 화풀이가 아니라, 피정복지구의 방어능력을 영구히 약화시키겠다는 뜻이다. 아쉽게도 원나라말기, 의군이 일어나면서, 사방에서 공략당해 각지의 형세가 위급해진다. 성벽이 없으므로 이들 도시는 반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게 된다. 공수의 형세가 바귀자 원정부는 부득이 다시 성벽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또 다른 역사의 중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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