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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심진주(沈珍珠)와 6명의 당나라 황제

by 중은우시 2013. 11. 15.

글: 양영춘(梁迎春)

 

자고이래로 강소,절강에는 미녀가 많이 나왔다. 당나라때 절강 호주(湖州)의 한 여자가 있었는데, 미모는 꽃과 같고, 현숙순량(賢淑純良)했다. 그리고 시사가무에 모두 정통했다. 단지 운명이 기구하여,여러번 난리를 맞이하였고, 그녀의 최후는 천고의 수수께끼이다. 대당왕조 6명의 제왕이 그녀와 관련된다. 그녀는 바로 전설적인 색채를 지닌 심진주이다.

 

당현종(唐玄宗) 이융기(李隆基)

 

심진주를 얘기하자면 그 경심동백의 순간을 얘기해야 한다. 안사지난때 반군은 756년에 장안성을 공격한다. 당현종 이융기는 황급히 도망친다. 자신의 비빈, 황자, 황손 및 공주를제외하고 나머지 사람은 모조리 장안에 버려둔다. 일대제왕으로서 이융기가 이때 어떤 심정이었을 지는 이해할 만하다. 그가 버린 것은 단지 성 하나만이 아니다. 대당의 신민이 있다. 심진주는 안록산의 난때 반란군에 체포되어, 동도 낙양성의 액정(掖庭)으로 보내어진다. 이융기는 아마도 그녀를 생각한 적이 없을 것이다. 심씨는 대당의 강산과 비교하면 거의 무시할만큼 미미하다. 심진주는 수심화열(水深火熱) 속에서 생활했다.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를 그리워한 것은 단지 광평왕 이예(李豫) 뿐이다. 그중의 연원은 당숙종 이형과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당숙종(唐肅宗) 이형(李亨)

 

심진주의 가족은 절강의 명문거족이다. 조상대대로 관직에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울 뿐아니라 가정의 훈도를 받아 어려서부터 양호한 교육을 받았다. 재주와 품격으로 문인아사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재녀의 대표라 할 만하다. 심진주는 당현종 개원말기, 양가집여자로 동궁에 뽑혀 들어간다. 당시의 태자 이형은 광평왕부로 하사한다. 그리하여 광평광 이예의 왕비가 된다. 이형은 기실 심진주에게 뜻이 있었다. 단지 자신의 혼인은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두번에 걸친 혼인은 모두 정치때문이었다. 당현종의 앞에서 조심스러워하며 자신을 지켰다. 그는 심씨집안과 원래부터 교분이 있었다. 심진주를 광평왕에게 준 것은 평안을 위한 것이었다. 이형이 당당해진 것은 마외병변부터 시작되었다. 이융기는 촉의 땅에 들어각, 그는 이융기와 병력을 나누어 안사의 반란병과 싸우기 시작한다. 나중에, 이필(李泌)이 극력 광평왕을 추천하고, 이형은 이예를 병마대원수에 임명한다. 이예와 심진주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다.

 

당대종(唐代宗) 이예(李豫)

 

이예의 군사재능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장안이 함락된지 15개월후에 성공적으로 수복한다. 그후에 당군을 이끌고 동도 낙양으로 간다. 양경의 소복은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다. 이예는 황궁안에서 심진주를 다시 만난다. 희비가 교차한다고 할 수 있었다. 당초 반군때문에 서로 흩어지면서 그녀와 이별의 고통을 겪었던 것을 생각하고 그 후에 그녀를 잠시 동도 낙양궁에 안치시킨 후, 안록산의 반군을 계속 추격해 갔다. 단지 생각지도 못하게 사사명(史思明)이 다시 낙양을 함락시킨다. 이예가 다시 낙양을 수복할 때, 심진주는 행방불명이 된다. 생사도 불명이다. 당대종이 즉위한 후, 사람을 보내어 심진주의 행방을 찾는다. 18년간이나 찾는다. 나중에 당대종은 독고씨를 귀비에 봉했고, 그녀를 매우 총애했지만, 시종 그녀를 황후로 봉하지는 않았다. 당대종 재위기간에, 계속하여 황후를 책봉하지 않았다. 아마도 황후의 자리를 심진주를 위하여 남겨놓은 것이리라. 당대종은 심진주의 행방을 끝까지 찾지 못한다. 이를 보면, 당대종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고, 정의 깊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당덕종(唐德宗) 이적(李適)

 

당대종 이예가 죽은 후, 장남 이적이 즉위한다. 당덕종은 생모 심씨를 "예정황태후"에 봉한다. 그리고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찾는다. 모자간에 다시 만날 날을 기대했다. 이 기간동안 일찌기 여러 건의 가짜 심진주사건이 벌어진다. 심지어 어떤 여승까지도 태자의 모친이라고 거짓말한다. 가짜로 나서는 자들이 많아서 당덕종은 사람을 보내어 따로 식별하게 한다. 여관 이진(李眞)은 이전에 오랫동안 심진주를 모셨고, 용모가 비슷하고, 나이고 닽았으며 왼손가락에 부상도 입었다. 식별을 거쳐 확인되어 당덕종이 궁중으로 받아들여 이 노부인을 태후로 모신다. 생각지도 못하게, 며칠 후, 고역사(高力士)의 양자인 고승열(高承悅)이 당덕종에게 밀주하여, 이 노부인은 심태후가 아니라 그녀의 언니라고 한다. 사정이 들통나서 자신에게까지 연루될까 겁이 나서 글을 올려서 화를 피하고자 한다. 당덕종은 대경실색하여 즉시 고역사의 양손 번경초(樊景超)에게 다시 확인하게 한다. 이진은 겁이 나서 죄를 인정한다. 젊었을 때 심진주와 함께 있었고, 심진주를 잘 알고 있으며, 황상이 급히 모친을 찾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서, 부귀영화를 탐하는 마음에 이런 짓을 벌인 것이었다. 비록 가짜로 자처하는 자들이 많아도 당덕종 이적은 그저 웃어넘겼고, 죄를 추궁하지는 않았다. 필자를 감동하게 한 것은 이 말이다: "나는 차라리 백번을 속더라도 한번의 진짜를 희망한다."

 

당순종(唐順宗) 이송(李誦)

 

역사는 만당(晩唐)에 접어든다. 이적은 재위 26년만에 죽는다. 장남 당순종 이송이 즉위한다. 그리고 7달후에 붕어한다. 이송이 재위한 기간은 200일에 못미쳤지만, 그는 큰 일을 하고 싶어했다. 궁중의 더러움을 모조리 쓸어내는 것이다. 첫째, 한미한 집안의 인재들을 조정대신으로 기용하여 탐관오리에게 타격을 가한다. 다만 환관이 장악한 군권을 회수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한다. 나중에 구문진이 다른 환관과 연합하여 정변을 일으키고, 당순종에게 황제위를 황태자 이순에게 넘겨주도록 협박한다. 당순종은 아주 가련했다. 그의 후궁비빈은 모두 황제에 상응하는 후비의 신분을 얻지 못했다. 모조리 여러 해 후에 추증된 시호들이다. 그는 치국안방에 정력을 쏟았고, 후궁에 신경쓸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바로 이런 황제이기 때문에, 당덕종이 완수하지 못한 숙원을 잊지 않았고, 당덕종이 생전에 안배한 심씨를 찾는 사람들을 독촉하에 계속하여 심진주를 찾는다.

 

당헌종(唐憲宗) 이순(李純)

 

당헌종이 즉위했을 때, 당나라정권은 위기를 맞이한다. 이순은 이제 사후의 일을 생각해야 했다. 심진주를 찾는 일은 수십년간 지속되었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관련부서에서 중지를 건의한다. 동시에 조서를 내려, 숙장내전에 심진주의 장례식을 치르고, 태황태후로 모시고, 의관총을 만들어 당대종의 능침에 세우고, 신위를 대종묘에 세운다. 심진주의 매력은 그녀의 이름과 같이 대당의 여섯 황제를 가슴아프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