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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안록산(安祿山)의 종족과 종교배경은...? (하)

by 중은우시 2023. 5. 14.

글: 영신강(榮新江)

 

3. 안록산의 종교신앙과 그 응집력

 

안록산의 종교신앙문제에 대하여 이전에 언급한 경우는 많지 않다. 안록산은 호인이므로 마땅히 다른 호인들처럼 자신의 종교신앙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소그드인은 페르시아에 유래하고 소그드특징을 지닌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중국에서는 천교(祆敎)라고 불렀다. 그래서 우리는 안록산도 천교신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증명한다. 안록산은 이런 종교신앙을 충분히 이용하여, 여러 호족민중을 단결시켰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록산이 정치인물로서 동시에 다른 종교의 역량도 이용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천보14년(755), 안록산은 유주 대민충사(大憫忠寺)의 동남부에 무구정광보탑(無垢淨光寶塔)을 건설했다. 방산석경(房山石經)에도 그가 이름을 남겼다. 천보7년(748년) 오월 이십오일, 안록산은 <대당박릉군북악항산봉안천왕지명>을 세웠는데, 여기에는 농후한 도교색채가 있다. 사사명도 기본적으로 같은 상황이다. 

 

우리는 돈황 투루판문서와 관련사적의 분석연구를 통해, 그리고 우리가 소그드인의 이주 및 취락에 대하여 계통적으로 고찰한 바에 따라, 개략적으로 소그드인들이 모여살던 곳이면, 취락에 모두 천사(祆祠)와 천사(祆舍)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호인들이 조로아스터교의 신을 모신 곳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투루판분지의 고대 고창(高昌)은 1965년 투루판 안락성(安樂城) 폐불탑(廢佛塔)에서 출토된 <금광명경(金光明經)>권2의 제기(題記)에 따르면, 경오년(430년), 고창성 동쪽에 호천신을 모시는 천사(祆祠)를 건립했다. 그 주변은 마땅히 소그드부락이었을 것이다. 최근 바다무(巴達木)에서 발견한 호인묘지와 투루판에서 출토된 문서에는 고창군에서 고창국에 이르는 시기에 소그드인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거기에는 소그드의 수령인 "살박(薩薄)"(즉 薩保)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어 서로 증명해주고 있다.

 

투루판 동쪽의 이주(伊州)는 수말당초(隋末唐初)에 소그드인이 점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상당한 규모의 소그드취락이 있었다. 정관4년(630년), 돌궐이 당나라에 멸망하였으므로, 원래 돌궐칸국에 부속되어 있던 이주의 수령 석만년(石萬年)이 무리를 이끌고 당에 투항했다. 돈황에서 출토된 <사주이주지지(沙州伊州地誌)> 잔권(殘卷)에 따르면, 이주곽하(郭下)의 이오현성(伊吾縣城)에 천묘(祆廟)가 있었고, 천주(祆主)는 적반타(翟盤陀)였다. 또 다른 사묘가 있는데, 모시는 신의 이름은 "아람(阿攬)"이다. 투루판문서에는 소그드호인의 이름중에 "아람"이라는 문자가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소그드인이 모시던 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돈황의 장경동(藏經洞)에서 대량의 문서가 발견되면서, 우리는 돈황의 사주지구의 소그드취락에 대하여 비교적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주의 성 동쪽 1리되는 곳에 소그드이민으로 구성된 십삼향(十三鄕)중 하나인 종화향(從化鄕)이 있었다. 이곳은 원래 소그드인 취락인데, 당나라에 편입된 후 향리(鄕里)가 되었다. 다만 여전히 소그드인의 집중거주지였다. 돈황사본 <사주도경(沙州圖經)>권3의 기록에 따르면, 성의 동쪽 1리에 천사(祆舍) 한 곳이 있다. 이곳은 천교의 사묘이고, 종화향내에 건립되어 있었다. 이는 소그드민중의 정신신앙센터였다.

 

나포박(羅布泊, Lop Nur) 남쪽의 선선(鄯善)지구는 7세기초 중원의 내란때 정치적 진공상태가 된다. 정관초년, 사마르칸트에서 온 강국(康國)의 대수령 강염전(康艶典)이 무리를 이끌고 동으로 와서 이곳에 거주한다. 그리고 선선성, 둔성(屯城), 신성(新城), 포도성(蒲桃城), 살비성(薩毗城)등 소그드호인의 취락을 지었다. 당고종 상원2년(675년), 선선성을 석성진(石城鎭)으로 고치고 사주에 예속시킨다. 다만 이곳은 여전히 강씨가족이 진장(鎭將)을 맡았다. 무주 천수2년(691년)때 석성진장은 강불탐연(康拂耽延)이었다. 과거 사람들은 이곳에도 천사가 있는 줄 몰랐다. 심지어 "탐불연"이라는 이름이 마니교(摩尼敎)의 법사인 불다탄(拂多誕)이라고 잘못 읽어 이곳에서 마니교가 유행했다고 생각했다. 다만 <사주도경> 권5에 기록된 "한 곳의 천사"가 발견되면서, 이 소그드인취락에 여전히 종교건축물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양주(凉州)는 소그드호인들의 일대 집단거주지이다. 일찌기 4세기초엽, 이곳은 소그드 고신찰(古信札)에 기록된 소그드상인집단의 주요 거주지였다. 상당한 규모를 가진 상단인원은 대부분 사마르칸트에서 왔다. <원화성찬(元和姓纂)>과 <신당서>등 사료에 기록된 북위부터 당나라까지 양주살보 무위안씨(武威安氏)외에 최근 들어 서안에서 다시 또 다른 북주말기의 양주살보 사군(史君)의 묘장도 발견되었다. 북주 장안성 교외의 거의 같은 장소에 묻혀 있는 동주살보(同州薩保) 안가(安伽)도 원래 출신지는 양주 무위였다. 이곳은 의심의 여지없이 북조에서 수당시기에 하서최대의 호인집단거주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그드취락이 한곳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나라때 사람인 장작(張鷟)이 편찬한 <조야첨재(朝野僉載)>권3 기록에 따르면 그 땅에 천신사(祆神祠)가 있었다고 한다.

 

수당제국의 수도인 장안에는 더더욱 대량의 소그드호인이 몰려 살았다. 그중에는 상인도 있고, 당나라에서 각급관청의 문직,무직을 맡은 관리도 있었으며, 그외에 무녀, 가수, 당로호희(當壚胡姬, 당로는 술을 판다는 의미임)등 각양각색의 인물이 있었다. 그중 많은 사람들은 서시(西市) 부근에 살았다. 호상무역과 서방과의 왕래편의를 위해서. 이들 호인들의 집단거주지의 주변에 있는 포정방(布政坊), 예천방(醴泉坊), 숭화방(崇化坊)의 삼방에는 모두 천사가 세워져 있었다. 소그드인들이 정신을 의지하는 곳이었다.

 

수당의 동도인 낙양의 상황도 장안과 유사했다. 호인들이 집중거주했다. 특히 무측천시기가 전성기였다. 낙양의 상업중심인 남시(南市)도 소그드인이 활동하는 중심지였다. 그리하여 그 주변의 회절방(會節坊), 복선방(福善坊)에 모두 천사가 세워져 있었다.

 

이들 천교(祆敎)의 사원들은 도무 위진남북조, 북조, 수당시기에 소그드취락이 건립되면서 계속하여 만들어 졌다. 주목할 점은 소그드본토에서 거리가먼 당나라의 하북도에 심지어 안사의 난이후에도 여전히 천사가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송나라 왕관(王瓘)의 <북도간오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영주(瀛州 낙수현(樂壽縣)에도 천신묘가 있다. 당나라 장경3년(823)에 설치했고, 본래 천신(天神)이라 불렸었다." 필자의 생각에 이는 안사의 난이후 호인들이 당나라본토에서 차별을 받게 되면서, 대량으로 안사의 부장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하북삼진지구로 이주했기 때문에 대량의 호인들이 오면서 새로운 천사를 건설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 다시 안록산, 사사명이 살던 유성소그드인취락의 상황을 보도록 하자. 여기의 종교신앙에 대하여 역사기록은 명확히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추적해보기 어렵지는 않다. 안진경은 강아의(康阿義)의 <신도비>를 써주었는데, 이를 보면 그가 이 집안의 출신지인 유성의 호인들과 교류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소한 이 비에 글을 써주었다는 것은 그가 분명히 그의 가첩(家牒)을 보았거나, 혹은 그들이 진술하는 <신도비>에 기재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노공(魯公)이 아들 석(碩)에게 아명을 "목호(穆護)"라고 지어주었는데, "목호"는 기실 천교(祆敎)의 신직(神職)이름이다. 요관(姚寬)은 <서계총어(西溪叢語)>권상에서 "당나라 정관5년(631년), 전법목호(傳法穆護) 하록(何祿)이 천교를 아뢰고, 칙령으로 장안 숭화방에 천사(祆寺)를 짓게 했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이를 보면, 안진경은 대체로 강씨집안을 통해서 어느 정도 천교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추리해볼 수 있다. 유성의 강아의 일가와 천교는 관련이 있다는 것을.

 

더욱 중요한 증거는 안록산 본인의 사적에 있다. <안록산사적> 권상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여러 곳의 호인상인들이 흥성했다. 매년 외국의 기진이보를 백만단위로 들여왔다. 매번 상인들이 도착할 때면, 안록사이 호복을 입고 중상(重床)에 앉아, 향을 피우고 기진이보들을 나열하면서, 백호로 하여금 좌우에 시립하게 했다. 여러 호족들이 그 아래에 늘어서서 절을 했고, 하늘에 복을 빌었다. 안록산은 성대하게 고기등을 차려서 대접하고, 여러 무당들이 북을 치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밤늦게가 되어서야 연회가 끝났다."

 

<신당서.안록산전>의 마지막 문구는 이러하다: "여러 상인들이 들어와서 접견하며, 희생을 늘어놓았고, 여자무당들이 북치고 품추면서 신에게 제사지냈다." 이런 제사활동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호인들이 참가했다. 그리고 안록산은 특별히 호복을 입었다. 이는 여기에서 하는 것은 호인 자신의 제사활동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여러 호인들이 제사지내는 "천(天)"은 도대체 무엇일까? "천(天)"은 실제 "천(祆)"인 것이다. 호인들이 제사지내는 "천"은 호인들의 "하느님" 즉 천신(祆神)인 것이다. 당나라에 들어온 후, "천(祆)"이라는 글자가 있으므로, 사람들은 "천(天)"이 "천(祆)"을 가리킨다는 점에 그다지 주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무도 여기에서 제사지낸 대상이 천신(祆神)이라고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이 내용의 글만 가지고는 안록산등이 제사지낸 대상이 천신(祆神)이라고 알아보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가 <조아첨재>권3에 기재된 낙양성내의 "천사(天祠)"에 완전히 똑같이 이런 호인상인들이 '천신(祆神)'에 복을 기도하는 활동이 기재되어 있다는 점과 대비해보면, 일목요연하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남부 입덕방 및 남시서방에 모두 호천신묘(胡祆神廟)가 있다. 매년 호족상인들은 복을 기도하며, 돼지와 양을 삶아서 올리고, 비파를 켜고 북을 치며 피리를 불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춘다."

 

둘을 비교해보면, "매년 호족상인" "호족상인들이....매년" "돼지와 양을 삶고" "희생을 진열하고" "비파와 북 피리를 불며, 노래와 춤을 춘다" "북을 치고 노래와 춤을 춘다."는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록산등이 향을 피우고 절을 하는 대상은 분명 "천신(祆神)"이다. 마찬가지 상황이 <수서>권7 <예의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후제(後齊)....후주(後主) 말년, 그 귀신에 제사지내지 않았고, 북을 치고 춤을 추며 '호천(胡天)'을 모셨다. 업(鄴)에 여러 음사(淫祀)가 있었고, 이 기풍은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이런 천교(祆敎)의 제사활동은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당서>에 기록된 "여자무당들이 북치고 품추면서 그의 앞에서 제사지내고 스스로 신이 된 것같았다"는 문구는 우리로 하여금 안록산의 "모친 아사덕씨는 돌궐무당인데, 자식이 없었다. 알락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를 낳았다"는 내용을 생각나게 한다. 이 신화는 당연히 안록산이 당시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한 것이며, 그는 스스로 알락산신의 감응을 받아 태어났다는 것을 말해주려 한 것이다. 그리고 자친 "알락산" 혹은 "록산"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도 종교적인 함의를 지닌다. 천교는 광명, 태양을 숭배하고, 그 기본교의는 광명이 어떻게 암흑을 이기느냐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알락산" 혹은 "록산"은 소그드어에서 왔고, 그 의미는 "광명, 명량"이다. 그렇다면, "알락산신"은 바로 "광명신"이다. 즉 천교에서 숭배하는 '광명신'인 것이고 천신(天神) 혹은 천신(祆神)을 널리 가리키는 말이다. 사실상, 안록산은 호인들 가운데 천교의 '광명신'의 화신이고 사람들에게 숭배를 받았다. 그가 죽은 후, 사사명이 안록산에게 내린 시호는 "광렬황제(光烈皇帝)"인데, 마찬가지로 '광명'이라는 의미이다. 사사명의 본명이 "솔간"인데, 소그드어로 "발광" 연소"의 의미이다. 그래서 이름을 한자로 고칠 때 "사명(思明)"으로 한 것이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천교의 색채이다. 그러므로 그도 안록산의 이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외에 주목할 점은 그의 모친이 "돌궐무당"이라는 것이고, "알락산신에 기도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사적(史籍)에서 북방민족의 "무당"이라는 글을 보면 바로 "샤먼(薩滿)"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는 기실 서방인류학개념을 억지로 가져다붙여서 생긴 오해이다. 사적에 나오는 "무(巫)"는 아래위에 이어지는 문장을 고려하여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아사덕씨의 이 무당(巫)이 기도하는 대상은 소그드인이 막북으로 가져온 천교의 "광명신"이다. 포고특비명(布古特碑銘)으로 보면, 천교신앙은 일찌감치 막북돌궐칸국으로 들어왔다. 그렇다면 아사덕씨라는 무당은 마땅히 돌궐샤먼과 천교제사장의 혼합체이다. 그녀는 순수한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인 남성과 다르다. 여성도 종교적 제사장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신당서>에 기록된 안록산등이 천교제사활동에 "여자무당들이 북치고 품추면서 그의 앞에서 제사지내고 스스로 신이 된 것같았다"는 것은 아마도 돌궐화된 천신신앙영향의 결과일 것이다. 안록산, 사사명은 모두 일개 무인으로, 그다지 문화수준이 높지 못했다. 그들이 진행한 천교제사활동에는 무술적인 면이 많았다. 그런 점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당나라로 들어온 소그드인들은 상당한 장기간동안 그들의 취락에서 생활했다. 천교는 그들을 응집시키는 중요한 유대로서 작용했고, 천사는 호인들이 천신에 제사지내는 종교활동의 중심이었다. 그렇게 호인들을 응집시키는 정신작용을 했다. 안록산은 자신을 '광명신'으로 분장하여, 소그드인의 천교신앙을 이용하여 그들을 단결시켰다. 그는 유성에서 유주에 이르는 호인취락의 성원들을 단결시켰을 뿐아니라, 소그드인이 잘하는 상업무역을 이용하여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소그드인도 단결시켰다. 그는 천교의 신비로운 설교를 이용하여, '광명지신'의 명의로 민중들의 거병을 호소했고, 이는 우리에게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무장반란에 참가했는지를 설명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안록산 반란의 배경에 관하여, 학계에는 이미 많은 연구성과가 있다. 여기에서 그것을 다시 반복해서 설명하지는 않겠다. 위에서의 고찰을 통하여, 우리는 아래와 같은 몇가지를 알 수 있었다:

 

첫째, 안록산의 군사주력은 번병번장(蕃兵蕃將)이다. 주요 장수중 상당한 부분은 소무구성(昭武九姓)의 소그드인이다. 이들 장수들중 일부는 조손수대에 걸쳐 이끄는 부락이 있고, 그 내부에는 혼인을 통해 맺어진 혈연관계가 있다. 이런 부락병들은 전투를 잘했고, 안사의 난의 중요한 군사적 지주였다.

 

둘째, 안록산은 장사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한 소그드출신이다. 그리하여 무역과 상업을 잘 알았다. 그리고 무역상업을 통하여 재물을 모으는 이치도 잘 알았다. 안록산은 거병하기 전에, 소그드상인을 파견하여 소그드상인들의 당나라제국내에 구축한 무역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전국각지와 무역을 하고, 각지의 호족상인들을 끌어들여, 외국의 진귀한 물건들을 유연지구로 보내도록 했다. <안록산사적>에는 안록산이 여러번 당현종에게 금은기물을 진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현종에 그에게 하사한 물품의 가치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상업활동으로 모은 재물과 하사받은 재물은 모두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경제적인 기반이 된다.

 

셋째, 안록산은 자칭 '광명신'의 화신이라 했다. 그리고 직접 소그드취락에서 여러 호인들의 천교제사활동을 주재했고, 자신이 호족백성들의 종교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종교의 역량을 이용하여 관할지역내의 소그드족을 통합시켰고, '광명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민중들에게 호소했다. 많은 번병호장들이 안록산을 따라 반란에 가담한 것도 '광명신'의 호소라는 정신역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안록산이 반란한 이유와 어떻게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데 종교적배경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단지 안사반군의 소그드족특징만을 언급했다. 특히 안록산이 천교를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킨 배경을 언급한 것은 단지 이전 사람들의 안사의 난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는 것이다. 안사반군이 다민족, 다종교라는 총체적인 특징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안사의 난이 단순한 단일민족의 반란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당왕조와 안사반군과의 전쟁을 민족간의 투쟁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반란을 일으킨 수령 안록산, 사사명은 어쨌든 소그드족 출신의 호인이다. 그러므로,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경내에는 호인에 대한 공격화 호화(胡化)에 대한 배척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중당(中唐)시대의 사상계에는 호화에 대한 반발로 한유(韓愈)등이 복고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처럼 중국고전을 중시하는 사조는 결국 송나라의 내렴(內斂)과 유약을 불러왔다. 만일 더욱 거시적인 각도에서 당송시대의 변화를 본다면, 우리는 부득이 안사의 난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더욱 광범위하게 아시아대륙민족의 이주 및 사상종교가 상호영향을 끼친 대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