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갑(三甲)"은 1,2,3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글: 왕동지(王東志)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삼갑"이라는 말로 1,2,3등을 표시한다. 이 단어는 스포츠경기보도에서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어, 매체의 보도에 "누구누구는 4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아쉽게도 삼갑에 들지 못했다."등등의 유사한 내용이 많다. 사실상, "삼갑"은 1,2,3등을 표시하거나 3등을 표시하는 말이 아니다. 이 단어는 잘못 쓰이고 있는 것이다. "삼갑"이라는 단어는 원래 고대 과거제도에서 나왔다. 에는 '삼갑'이라는 단어와 해석이 없다. 에는 '삼갑'의 유래를 적어 놓고 있다: "태평흥국8년, 진사(進士)의 여러 과에 율의(律義)를 시험보기 시작했다....진사를 삼갑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그 뜻은 태평흥국8년(983년) 전시(殿試)이후 진사를 일갑(一甲), 이갑(二甲), 삼갑(三甲)의..
2020. 5. 7.
이경업(李敬業)의 무측천(武則天) 토벌은 왜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었을까?
글: 엽서도(獵書徒) 이경업(636-684), 일명 서경업(徐敬業). 조주(曹州) 이호(離狐) (지금의 山東 荷澤) 사람. 당나라의 관리, 장수. 개국공신인 사공(司空) 이세적(李世積)의 손자. 재주자사(梓州刺史) 이진(李震)의 아들. 부친이 일찍 사망하였기 때문에, 직접 조부로부터 영국공(英國公)의 작위를 승계하였다. 무측천이 당중종을 폐위시켜 여릉왕(廬陵王)으로 격하시키고, 이단(李旦)을 황제로 세웠다. 그후 이단은 글을 올려 사임을 청하고, 무측천이 임조칭제(臨朝稱制)하게 된다. 684년 구월, 이경업은 동생 이경유(李敬猶), 당지기(唐之奇), 두구인(杜求仁), 낙빈왕(駱賓王)등과 함께 양주(揚州)에서 거병한다. 이경업은 스스로 광복부대장군(匡復府大將軍), 영양주대도독(領揚州大都督)을 칭하며, 근왕..
2020. 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