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화/중국의 과거

"삼갑(三甲)"은 1,2,3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by 중은우시 2020. 5. 7.

글: 왕동지(王東志)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삼갑"이라는 말로 1,2,3등을 표시한다. 이 단어는 스포츠경기보도에서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어, 매체의 보도에 "누구누구는 4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아쉽게도 삼갑에 들지 못했다."등등의 유사한 내용이 많다. 사실상, "삼갑"은 1,2,3등을 표시하거나 3등을 표시하는 말이 아니다. 이 단어는 잘못 쓰이고 있는 것이다.

 

"삼갑"이라는 단어는 원래 고대 과거제도에서 나왔다. <현대한어사전>에는 '삼갑'이라는 단어와 해석이 없다. <사원(辭源)>에는 '삼갑'의 유래를 적어 놓고 있다: "태평흥국8년, 진사(進士)의 여러 과에 율의(律義)를 시험보기 시작했다....진사를 삼갑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그 뜻은 태평흥국8년(983년) 전시(殿試)이후 진사를 일갑(一甲), 이갑(二甲), 삼갑(三甲)의 3개등급으로 나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삼갑"은 3개 등급을 가리키는 말이고 3명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금(金)나라때 과거급제자를 상, 중, 하의 삼갑으로 나눈다; 원나라때 양방(兩榜)으로 나누어, 몽골,색목인을 일방으로 하고, 한인, 남인을 또 다른 일방으로 하였다. 거기서도 매방마다 일갑, 이갑, 삼갑으로 나눈다. 명청때애도 원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삼갑으로 나누는데, 양방으로 나누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과거시험의 제도로 정립되어 성적의 고하에 따라 '삼갑'을 나누었다. 일갑(一甲)은 '진사급제(進士及第)'를 하사받는데 오직 3명만 뽑혔다. 장원(壯元), 방안(榜眼)과 탐화(探花); 이갑(二甲)은 약간명을 뽑는데, '진사출신(進士出身)'을 하사받는다. 삼갑도 약간명을 뽑는데,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을 하사받는다.

 

명나라때 이갑과 삼갑의 1등을 전려(傳臚)라고 불렀다. 청나라때는 이갑의 1등만을 전려라고 불렀다. 이갑과 삼갑의 인원수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일갑보다는 많았다. 구체적으로 얼마를 뽑을 것인지는 그때 그때의 나라사정에 따라 달랐다. 당시 거인(擧人)으로 삼갑에 들어가면 '진사'가 되는 것이었다.

 

청나라 광서제때의 계묘과를 예로 들면, 진사 합계 360명을 뽑았는데, 일갑 3명, 이갑 183명, 삼갑 174명이었다. 이를 보면, '삼갑'은 과거시험에서 진사의 등급분류임을 알 수 있다. 즉 3개 등급을 총칭하는 말이다. 앞의 1,2,3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명나라때의 왕탁(王鐸)의 글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왕탁은 31살이 되어 경성으로 가서 전시를 보았다. 삼갑오십팔명(三甲五十八名)'으로 '동진사출신'을 하사받았다...." 여기에서 '삼갑'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 수 있다. 왕탁은 일갑, 이갑에 들지 못하고, 삼갑에서도 58등을 했다는 것이다. 고대에 진사의 등수를 소개할 때, 모두 직접적으로 몇갑몇명이라고 표시한다. '만력 모모년 진사 이갑 십육명'과 같이....

 

그렇다면, 수나라때 시작한 과거제도에서 왜 송나라가 되어서야 비로소 '삼갑'이 출현하게 된 것일까?

 

사학자인 두우(杜佑)의 <통전>을 보면, "무후천수원년(690년), 책문공인어낙성전(策問貢人於洛城殿), 수일방료(數日方了), 전전시인자차시(殿前試人自此始)" 그 뜻은 지방에서 추천한 수험생들에 대하여 무측천이 낙양의 남문에서 친히 시험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전시는 아니었다. 전시가 처음 치뤄진 것은 당고종 현경2년(658년) 봄이었다. 당고종은 친히 전시를 조직했었다. 그러나 규모가 크지도 않았고, 제도로 정비되지도 못해썼다. 무측천시기에 이르러, 그녀는 규모와 형식을 갖추었고, 제도적으로 확립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무측천이 전시를 시작했다고 얘기한다.

 

전시의 진정한 형식이 확립된 것은 송태조 개보6년(973년)이다. 과거시험의 핵심단계로서, 당시 전시의 내용은 상당히 간단했다. 단순히 시무책(時務策) 하나만을 보았다. 시제는 일반적으로 내각이 사전에 협의해서 정했다. 시험 하루전에 황제에게 올려서 최종 확정한다. 전시시간은 하루였고, 해가 지면 답안지를 제출해야 했다. 송타라때 과거제도는 계속 성숙되고, '삼갑'이라는 것도 나타난다. '갑'이라는 것은 가장 우수하고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삼갑'을 세 명의 가장 우수한 사람이라고 오해했고, 그렇게 오용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일갑은 확실히 3명이다. 장원, 방안과 탐화. 명청시기에 정원을 '정갑(鼎甲)'의 으뜸으로 하여, '정원(鼎元)' 혹은 '정갑(鼎甲)'이라고도 불렀다. 정은 세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갑중 세 명의 가장 우수한 사람을 '삼정갑(三鼎甲)'이라고 부를 수는 있다. 그러나, '정'자를 생략해서 '삼갑'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