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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이경업(李敬業)의 무측천(武則天) 토벌은 왜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었을까?

by 중은우시 2020. 4. 29.

글: 엽서도(獵書徒)

 

이경업(636-684), 일명 서경업(徐敬業). 조주(曹州) 이호(離狐) (지금의 山東 荷澤) 사람. 당나라의 관리, 장수. 개국공신인 사공(司空) 이세적(李世積)의 손자. 재주자사(梓州刺史) 이진(李震)의 아들. 부친이 일찍 사망하였기 때문에, 직접 조부로부터 영국공(英國公)의 작위를 승계하였다.

 

무측천이 당중종을 폐위시켜 여릉왕(廬陵王)으로 격하시키고, 이단(李旦)을 황제로 세웠다. 그후 이단은 글을 올려 사임을 청하고, 무측천이 임조칭제(臨朝稱制)하게 된다. 684년 구월, 이경업은 동생 이경유(李敬猶), 당지기(唐之奇), 두구인(杜求仁), 낙빈왕(駱賓王)등과 함께 양주(揚州)에서 거병한다. 이경업은 스스로 광복부대장군(匡復府大將軍), 영양주대도독(領揚州大都督)을 칭하며, 근왕구국(勤王救國), 여령왕 이현(李顯)의 복위를 명분으로 거병한다. 이때 낙빈왕은 그 유명한 <위서경업토무조격(爲徐敬業討武瞾檄)을 써서 천하에 호소한다. 병사가 금방 10여만으로 늘어났다.

 

무측천은 양군공(梁郡公) 이효일(李孝逸)을 총사령관, 위원충(魏元忠)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하여 30만의 병력을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그때 이경업의 휘하에 있던 위사온(魏思溫)은 직접 동도(東都) 낙양(洛陽)을 치자고 건의하나, 설장(薛璋)은 먼저 남진하여 상주(常州), 윤주(潤州, 지금의 江蘇 鎭江)를 치자고 권한다. 결국 이경업은 설장의 의견을 취하여, 먼저 장강을 건너 윤주를 함락시키고, 다시 북상하여 이효일과 고우(高郵)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경업은 처음에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오래 싸우면서 병사들이 피로해졌다. 십일월, 이효일은 화공으로 이경업의 군대를 대파한다. 이경업은 윤주로 도망갔으나 부하에게 피살당한다.

 

먼저 이경업이 무측천을 토벌하기 시작한 때의 "용두(龍頭)"를 보자:

 

첫째, 이경업의 조부인 이세적은 대당왕조의 개국공신이다. 당고조, 당태종, 당고종의 3조를 거쳤을 뿐아니라, 무측천을 황후로 세우는 과정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지위는 높고 권력도 컸다. 그래서 대당왕조의 조야에 큰 영향력을 지녔다. 이경업은 이세적의 손자로서 작위도 승계했다. 그는 장수집안의 후손이며, 권력귀족이라는 이중의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영향력이 일반인과는 남달랐다. 그래서 아주 짧은 기간내에 여러 인재와 방대한 병력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무측천이 임조칭제하면서 대권을 독단하고, 당중종 이현을 폐위시키며, 이단을 황제로 올림으로써, 대당조정내부의 권력분배국면을 바꾸었을 뿐아니라, 유가의 전통으로 보자면 참월(僭越)에 해당했다. 이경업의 토벌은 대의라는 측면에서 부합했다. 그래서 조정내부에서도 상당히 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셋재, 남북조후기부터 수왕조를 거쳐 당왕조에 이르기까지, 양주가 위치한 장강하류의 경제는 급속히 발전하는 과정에 있었다. 인구와 토지가 모두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중앙에 도전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을 갖추고 있었다.

 

이경업이 거병초기에, 금방 10여만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고, 거기에 낙빈왕의 천고에 전해지는 명문장이 신속히 대당의 경내로 퍼져가면서, 기세가 대단했다. 그리하여 무측천은 불안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경업의 이어지는 중대한 실책은 토벌행동의 '용두'가 '사미(蛇尾)'로 바뀌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좋았던 국면이 금방 망가졌을 뿐아니라, 자신과 동료들의 목숨까지도 함게 잃고 말았다.

 

첫째, 그는 개조환대(改朝換代)를 꿈꾸었고, 대의명분을 잃게 된다.

 

이경업이 거병초기에 내세운 기치는 당중종 이현을 황제로 복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병후에는 이현에게 사람을 보내어 연락하지도 않고, 오히려 용모가 죽은 태자 이현(李賢)과 비슷한 사람을 찾아내, 이현의 명의로 천하를 호령했다. 그렇게 되니, 세상사람들은 모두 알아차리게 된다. 이경업은 아예 당중종 이현을 복위시킬 생각이 없고, 자신이 이당황실을 차지하려는 것이라고. 그때 무측천은 비록 임조칭제하고 있었지만, 여전이 이당의 명의로 통치를 진행하고 있었다. 둘을 비교하면 이경업이 명분에서 밀렸다.

 

둘째, 전략방향에서 잘못된 선택을 해서, 시기를 놓치게 된다.

 

이경업의 부하 위사온의 건의는 병력을 이끌고 동도 낙양을 직접 치자는 것이다. "산동호걸들이 무씨의 독재에 불평불만이 크니, 공이 거사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모두 식량과 무기를 들고 남에서 북상하는 군대를 기다릴 것이다. 이 기세를 타면 큰 공을 세울 수 있다. 만일 그러지 않고 스스로의 소굴에 웅크리게 되면 누가 오든지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효산(崤山) 동쪽지구는 무측천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을 뿐아니라, 장안에 대한 통치에도 시종 불만이 있었다. 그래서 언제든지 난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이당황실은 관농집단에 속한다. 효산이동지역의 명문거족들과 지속적으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곳은 또한 북방유목민족의 활동지역과 접경하고 있어 역대이래로 불안정한 곳이었다. 게다가 대당의 통일천하과정에서 산동지구에서는 여러 해동안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었다. 그래서 이곳의 백성들은 마찬가지로 조정에 깊은 적개심ㅇ르 지니고 있었다(후세의 황소의 난이 이곳에서 발생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러나, 이경업은 먼저 남쪽을 취하고, 뒤에 북쪽을 취하겠다는 전략을 선택한다. 남쪽으로 진격하여 먼저 안정적인 근거지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그 후에 다시 북진하려고 했다. 그렇게 당나라의 경성에서 더 멀어지다보니, 무측천의 조정에서 서두르지 않고 군대를 증강시킬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셋째, 실제상황을 모르고서 조정내부의 동료들의 음모에 기대를 걸었다.

 

중서령(재상) 배염(裴炎)은 시종 무측천의 권력독점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여러번 강력하게 천자에게 권력을 돌려주도록 요구한다. 이경업이 거병한 초기에 이경업과 연락했고, 무측천이 용문 만불동에 가는 틈을 타서 그녀를 납치하고, 위협하여 권력을 천자에게 돌려주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불확실했고, 실행가능성도 낮았다. 결국은 그런 기회를 기다리지도 못했다.

 

이경업이 거병하여 무측천을 토벌할 때, 선택한 시기와 장소는 모두 문제없었다. 아쉽게도, 그의 개인능력과 자신의 포부는 조부와 차이가 너무 컸다. 멍청한 짓을 한바탕 벌이다가 결국 용두사미의 꼴을 당한다. 무측천의 기반을 흔들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무측천으로 하여금 실력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가 되도록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