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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포스트 무측천시대의 여성정치참여현상

by 중은우시 2019. 11. 15.

글: 정아여(鄭雅如)


705년 2월, 여황 무측천(武則天)이 병이 들어 상양궁(上陽宮)에 드러누웠다. 재신(宰臣) 장간지(張柬之)등은 그 기회를 틈타 여황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쥐고 있던 장역지(張易之) 형제를 주살하고, 여황을 퇴위하도록 핍박하여 태상황(太上皇)으로 밀어내고, 황태자를 등극시킨다. 그가 바로 당중종(唐中宗)이다. 같은 해 12월 태상황 무측천이 사망한다. 이렇게 일대여황의 기복있고 전설적이었던 인생은 끝이 난다. 무측천은 660년부터 당고종(唐高宗)을 대리하여 정무를 처리한다. 나중에 무주왕조(武周王朝)를 창건하고 정식으로 황제에 오른다. 그녀는 명실상부한 국가통치자였다. 전후로 그녀가 권력을 장악했던 기간은 45년에 달한다. 이렇게 장기간동안 한 제국을 통치한 것은 세계역사적으로도 보기 드문 경우에 속한다. 무측천의 정치에 대한 연구는 많이 되어 있다. 이 글은 무측천시대이후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정치현상을 다뤄보고자 한다. 여인의 집단적인 정치참여현상이다.


일월당공(日月當空)


현재는 여황을 무측천이라고 부르지만, 기실 이는 후세인들이 그녀의 시호(諡號)에서 '측천'을 따와서 부르는 것이고, 그녀의 본명이 아니다. 여황은 스스로 글자를 만들어 자신의 이름을 "조(瞾)"이다. 이는 '일월당공' 즉 하늘에 떠서 비추는 해와 달이라는 의미이다. 그녀의 지위가 하늘 위에서 사람들이 우르러보는 해와 달이고, 만민의 어머니이자 아버지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글자는 그녀의 웅심과 기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무측천이 등극한 후, 그녀의 일처리에는 여성과 관련된 조치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비록 주로 자신의 정치적인 위세를 드높이거나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여성의 지위를 끌어올리고, 많은 여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예를 들어, 성대한 선양의식때 무측천과 다른 여성들이 각각 아헌(亞獻), 종헌(終獻), 예생(禮生)등의 역할을 맡았다. 이는 사상유례없는 일이다. 또한 이전의 예법에서 '부지존(父至尊, 아버지가 가장 높다)' '가무이존(家無二尊, 집안에 존귀한 사람은 한 명이고 두 명이 아니다)'를 주장하며, 고의로 모친의 장례를 격하시켰는데, 무측천은 모친을 위한 상례기간은 1년에서 3년으로 늘인다. 당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모친상의 기간을 늘인 것을 '여성'의 지위를 제고한 것이라고 여겼다.


상징적인 예의측면에서 여성의 지위를 끌어올린 것을 제외하고도, 무측천은 통치시기때 정치문화와 제도에서 여성의 정치참여를 위한 가능성을 많이 열어놓았다. 예를 글어, 그녀는 후궁의 '내관(內官)'이라는 이름을 없애고, 직분을 황제의 후궁에서 황후를 보좌하여 궁내를 다스리는 '내정관료'체계로 바꾼 바 있다; 나중에 내관이라는 명호는 되살리지만, 내관이 황후의 관료라는 성격은 그대로 유지한다. 그리하여 13살된 상관완아(上官婉兒)는 당고종의 후궁에서 5품의 '재인(才人)'에 봉해질 수 있었다. 실제로 그녀의 업무는 무후를 도와 정무처리를 보좌하는 것이었다. 무측천이 황후로 정치에 관여하는데서 천하를 직접 다스리게 되면서, 일찌기 일부 관리의 처나 모친을 입궁시켜 정무를 처리하는 것을 돕게 한 바 있다. 비록 사료로 남아 있는 경우는 많지 않고, 그녀들이 입궁한 후의 직위나 명분을 알 수가 없지만, 대신 배행검(裴行儉)의 신도비(神道碑)에는 명확하게 그의 처 고적씨(庫狄氏)는 입궁하여 '어정(御正)의 직위를 받았다'고 적고 있다. 이는 귀중한 단서이고, 무측천의 궁정에 여성을 위한 새로운 관직이 만들어져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현존하는 관지(官誌), 정전(政典)에는 모두 이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사관들이 여성이 관직을 받는 것은 이경배도(離經背道)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고의로 빠트리고 적지 않았을 것이다. 여황이 즉위한 후, 후궁내에 문학관(文學觀)에는 인원이 확충된다. 궁인(宮人)을 교육시키는 인원도 유학자인 학사 1명이 담당하다가 내교박사(內敎博士) 18명을 둔다. 여기에는 경학(經學) 5인, 사(史(, 자(子), 집철문(集綴文) 3인, 해서(楷書) 2인, 장노(莊老), 태일(太一), 전서(篆書), 율령(律令), 음영(吟詠), 비백서(飛白書), 산(算), 기(碁) 각 1인이다. 스승을 확충하였다는 것은 궁인을 교육할 수요가 늘어났다는 것을 반영한다. 이는 궁인의 직무가 변화되었음도 보여준다.


비록 전체적으로 말해서 여성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여성들의 정치참여기회가 늘기는 했지만, 무측천은 고의로 여성의 정치참여를 제창하지는 않았고, 제도화된 여성의 임관제도를 만들지도 않았다. 태평공주(太平公主)나 상관완아의 경우에서 보듯이 비록 무측천이 집권했을 때 국사논의에 참여했지만, 여황은 그녀들에게 명확한 정치적 직위나 독립된 권력을 주지는 않았다. 여황의 엄격한 통치하에, 그녀들은 자신의 본분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조심스럽고 절제된 방식으로 권력을 사용했다. 황제의 자리에 앉은 무측천은 하늘에 뜬 해와 달처럼,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날카로운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들의 별은 흐릿하고 빛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군성쟁휘(群星爭輝)


재미있는 점이라면, 일월이 떨어진 후, 하늘에는 점점이 여러 별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더 많은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일이 포스트 무측천시대에 발생하게 된다.


당중종이 즉위한 후, 그의 척처인 위씨(韋氏)는 황후로 세워진다. 그녀는 무측천을 본받아 현만임조(懸幔臨朝)하여, 남편인 황제와 함께 천하를 같이 다스렸다. 비록 당중종은 예전 당고종처럼 병에 든 것은 아니었지만, 제후(帝后)가 함께 다스리는 것은 마치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중종때의 공주들은 황제의 자매이건 딸이건 불문하고, 모두 개부설관(開府設官, 공주부를 열고 관직을 설치하는 것)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비록 공주부의 규격은 친왕부보다 낮았지만, 개부설관은 제도적으로 공주들의 정치참여권한을 부여한 것이 되었다. 공주가 관료와 연결하는데 유리했고,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나아가 공주의 정치참여능력을 향상시켰다. 그중 태평공주의 경우는 더더욱 친왕과 동등한 규모의 개부설관권한을 부여받는다.


무측천시대에 정무를 보좌하던 상관완아는 중종이 즉위한 후 2품 소용(昭容)으로 승진하여, 황제의 조명(詔命)을 전담한다. 무측천시대에 상관완아는 여황을 위하여 조제를 처리한 바 있다. 그러나 여황은 특별히 관직을 두지는 않았고, 여전히 칙명을 내려 조정의 대신들 소미도(蘇味道), 위승경(韋承慶)같은 사람을 입금중대조(入禁中待詔)로 삼았다. 입금중대조는 품질(品秩)이 없는 자리였고, 황제가 친히 뽑았으며 많은 경우는 재상이나 중서사인(中書舍人)등 고관이 맡았다. 그들의 업무는 조서를 초안하는 외에 국정결책에도 참여했다. 황제가 가장 가까이 두는 신하라고 할 수 있다. 중종때, 상관완아는 소용의 직위에서 완전히 조정대신들이 많았던 입금중대조의 직을 담당한다. 이는 비록 그녀의 명호는 비빈(내관)이지만, 중종이 가장 신임하는 보신(輔臣)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내관과 조정관리의 경계선이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는 것이다. 무측천시대에서 당중종시대까지, 상관완아의 역할은 황후의 여관에서 여황의 여관을 거쳐(이 당시에 새로 만든 직위를 맡았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남황제의 여관이 된 것이다. 정치적 신분은 점점 조정관리와 비슷해 진다. 상관완아는 중종의 가장 가까운 보신으로서 그녀의 신분은 소용의 이품과 같았다. 직접적으로 조정의 이품관리에 해당했다. 하나의 중요한 증거는 나중에 반위정변때 사망하는 상관완아는 당예종시기에 명예회복되며 '혜문(惠文)'이라는 시호(諡號)를 받는다. 당나라때 규정에 따르면 3품이상의 직사관(職事官), 2품이상의 산관(散官)에게 비로소 조정이 시호를 부여하게 되어 있었다. 상관완아는 '소용'인데도 시호를 받은 것이다. 이는 상관완아의 내관2품을 직접적으로 조정2품으로 봐주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상관완아는 소용이라는 직위로 입금중대조의 직무를 행했다. 그녀의 내관품계는 외조관품과 비교하여 부여되었다. 이를 보면 당시 정치에 간여하는 여성의 직위는 관료제도와 결합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이 관료사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조정관리로 대우를 받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후궁도 일부 궁인은 정치에 깊이 관여한다. 궁정정변대 그녀들의 향배와 선택은 성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중종이 즉위한 후, 일부 궁인들은 상을 받는다. 심지어 명부작위도 받아 대폭 신분이 상승한다. 이것은 남편이나 부친으로 인하여 받은 것이 아니고, 다시 나아가 일부 관료의 특권까지 부여받는다. 여기에는 장례때 원래 5품이상 경관(京官)들만 누릴 수 있던 고취군악(鼓吹軍樂)을 행할 수 있다든지, 직사관의 대우에 상응하게 자녀들이 음서(蔭敍)로 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후자는 중요했다. 왜냐하면 자손은 이로 인하여 관직을 얻고, 죄형을 감면받고, 부역을 면제받는 등 특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음서는 통체계급의 신분복제, 가족이익연속의 중요한 제도이다. 여성이 정치참여로 음서권리까지 받는 것은 여성이 정치분야에서 독립적인 인격임을 보여주고, 동시에 여성의 정치참여를 관료가로 본다는 것을 말해준다.


무측천이 사망한 후, 정치권력에 흥미를 느낀 것은 황후, 공주만이 아니다. 일군의 명부(命婦, 관료부인), 궁인도 있었다. 무측천이 장기간 통치하면서 최종적으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이들 여성들에게 정치참여의 꿈을 꾸게 해준 것이다. 중종의 딸인 안락공주(安樂公主)는 일찌기 자신을 '황태녀(皇太女)'에 봉해달라고 청한 적이 있다. 그녀의 자신감은 무측천이 황제에 오를 수 있다면, 그녀는 황제의 딸이니, 당연히 차기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황제는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여성도 황제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여성의 정치참여로 관료가 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포스트 무측천시대에는 여성들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적지 않은 남성들도 정도는 다르지만 여성의 정치참여를 받아들이게 된다.


중종과 예종 두 형제는 평생동안 무측천의 영향을 받아왔고, 여성의 정치참여를 받아들인 대표적 인물이다. 중종은 656년에 태어났고, 예종은 662년에 태어났다. 그들이 철이 든 후로 모후는 계속하여 부황을 도와 국가를 통치했다. 형이 폐위되고 자신이 황태자에 오르고, 황제에 올랐지만, 금방 모후에 의해 폐위되고, 마침내 모후는 왕조를 교체하여 황제에 오른다. 모친은 계속하여 강대한 존재였다. 중종시기에 비록 남황제가 올랐지만, 여성정치참여의 정도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여러 방면에서는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고 할 수 있다. 반위정변(反韋政變)이후 즉위한 예종은 역시 누이 태평공주의 정무참여를 지지한다. 그리고 상관완아의 2품관의 신분을 회복시켜주며, 반위정변후 한때 중단되었던 여성의 정치참여를 허용한다. 우리는 이들 역사인물의 내심변화를 알 수 없지만, 중종, 예종은 자신의 처, 자매, 딸 심지어 궁인집단의 정치참여에 대한 반응을 보면 그들은 여성의 정치참여를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성별이 정치당파를 구분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치에 참여하는 여성들은 제도적인 참정채널을 확보하거나 이익확보의 측면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다만 정치권력을 다투는 점에서는 여전히 서로가 적이었다. 중종후기 위후와 안락공주의 가장 큰 정적은 바로 예종(당시에는 상왕이었음), 태평공주 및 상관완아의 연합세력이었다. 위후, 태평공주, 안락공주, 상관완아등의 지위가 비교적 높은 참정여성들을 지지하는 남성관료들이 그녀들의 아래에 모인다. 비록 여성의 정치참여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말해서 당시의 정치분위기는 여성의 정치참여에 비교적 개방적이고 우호적이었다.


포스트 무측천시대에 많은 여성들은 정치참여공간을 확장한다. 여기에 남황제, 남성관료들도 지지하고 옹호했다. 여성의 정치참여세력은 더욱 활발하게 성장하게 된다. 나아가 정치체제의 성별 울타리가 느슨해지게 된다. 포스트 무측천시대의 여성정치참여국면은 황제와 천하를 공동으로 통치하는 황후, 공주부를 열고 관료를 두며, 권력이 친왕과 같은 공주, 그리고 관료특권과 대우를 취득한 여관이 있었다. 정치제도와 문화에서 중대한 변화가 있었던 시기이다.


열일작신(烈日灼身)


710년 중종이 사망한다. 위후, 안락공주진영 대 상왕, 태평공주, 상관완아진영간에 권력충돌이 발생한다. 상왕의 아들인 이융기(李隆基, 나중의 당현종)은 태평공주와 연합하여 정변을 일으킨다. 이로 인하여 위후와 안락공주는 난리통에 사망한다. 그러나 이융기는 다시 맹우를 배반하고 기회를 틈타 다른 여성정치참여세력도 제거한다. 그는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위후, 안락공주를 제거하고, 동시에 동맹군을 맞이하는 상관완아와 기타 정치참여궁인들도 참살한다. 그는 병력을 보내어 위씨의 친족, 동당을 체포하여 모조리 주살한다. 무씨일족을 유배보내고, 무측천의 정권장악이후 수십년간 지속되던 무씨세력을 거의 뿌리뽑는다. 그는 공주의 개부설관제도를 폐지하여, 같은 진영에 선 태평공주의 분노도 촉발시킨다. 이융기의 이런 행동은 여성의 정치참여를 근절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종이 즉위한 후, 즉시 공주의 개부설관권한을 회복시키고, 태평공주의 정치참여를 지지한다. 나중에 다시 상관완아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그녀의 정치적 지위를 회복시킨다. 이를 통해 부자간에 여성의 정치참여문제를 놓고 전혀 다른 입장을 드러낸다. 이융기는 정변의 공으로 황태자에 오르지만, 태평공주도 예종의 지지하에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고, 이융기에게는 가장 큰 정적이 된다. 713년 이융기는 핑계를 잡아 태평공주가 '모역'을 꾀했다는 이유로 병력을 이끌고 토벌한다. 그리고 그녀의 일당을 체포한다. 그리고 예종을 핍박하여 모든 정치권력을 내놓게 한다. 포스트 무측천시대의 백화제방의 여성정치참여의 성황은 이후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된다.


전통사서에서는 중종, 예종때의 역사서술이 편견과 왜곡 및 고의적인 개사, 유망(遺忘)으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중종은 스스로 '자습모정(子襲母政)'이라고 하여 계속하여 무측천을 존중하는 것이 중종의 입장이었다. 상관완아는 조서를 초안하면서 무측천을 존중했는데, 이는 그저 황제를 대신하여 쓴 것에 불과하다; 다만, <구당서>는 이를 가지고 상관완아가 무삼사(武三思)와 사통하여 '무씨를 존중'하는 것을 개인적인 인품에 문제가 있어 정치를 망친 죄악이라고 묘사한다. 그리고 사서에서는 중종이 사망한 것을 위후, 안락공주의 독살때문이라고 하였는데, 당대의 역사학자들은 이미 그 모순점을 고증해 냈다. 이는 이융기(당현종)등이 정변을 일으키고, 위후와 안락공주를 주살할 때 두 사람에게 뒤집어씌운 죄명이라고 본다. 이를 통해 정변이 정정당당한 것이라고 말하려 했던 것이다. 동시대의 관료들은 대부분 상관완아의 공로를 인정했다. 다만 당나라때의 <실록>, <국사>는 상관완아의 공적이나 예종이 상관완아의 명예를 회복시킨 것등을 고의적으로 축소시킨다. 이를 통해 이융기가 상관완아를 죽인데 대한 비난이 나오지 않게 한 것이고, 더더구나 당에종이 상관완아를 시켜 문집을 편찬케 한 것을 이융기가 한 것으로 바꿔 자신이 인재를 아끼고 문학을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쌓으려 하기까지 했다.


사마광(司馬光)이 쓴 <자치통감>에서는 당중종이 안락공주를 '황태녀'에 앉히지 않은 것을 기본적인 '상식'으로 판단한 것이고 재상 위원충(魏元忠)의 간언을 듣고서 비로소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중종이 비록 어리석으나, 황태녀를 세우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사마광은 확실히 중종이 여성이 황제에 오르는 것도 선택사항중 하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당현종이 난리를 틈타 상관완라를 죽인 것에 대하여, 중종 예종시기에 여성의 정치참여에 우호적인 정치분위기 속에서 충량을 죽인 것이고 맹우를 배신한 것이라고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다만 후세에 여성의 정치참여를 부정하는 각도에서 보자면, 상관완아를 참살하고, 여성의 정치참여를 막은 것ㅇ르 당연한 것이고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서의 편찬도 '성왕패구(成王敗寇)' 이기면 충신 지면 역적이라는 철칙을 회피할 수 없다. 승리자는 역사를 쓸 권력을 갖는 것이다. 다만 이 시기의 역사는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 쓰고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은 대다수의 전통적인 사학자들이 정통보수문화의 입장에서 남성의 독점적인 정치적분야에서의 권리를 당연한 일로 보고, 여성의 정치참여는 반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대세계를 한번 살펴보자. 작년 독일총리 메르켈(Angela Dorothea Merkel)은 집권정당인 기민당의 당수에 더 이상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네번째 총리임기가끝나면(2021년), 그녀는 정계를 은퇴할 것이라고 했다. 메르켈은 2005년부터 기민당의 당수로 지금까지 14년에 이르렀다. 독일어에서 '총리'는 원래 남성명사인 Kanzler이다. 메리켈이 취임한 후 비로소 여성명사인 Kanzlerin이 만들어 져서 여성총리를 지칭하는 단어가 된다.


독일의 디벨트(Diee Welt)지는 2018년 10월 31일, 청소년들에게 "독일은 남자총리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Ist Deutschlan schon bereit für eine männliche Kanzlerin?)"라는 내용을 묻는 인터뷰를 진행한다. 인터뷰에 응한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철이 든 후에는 거의 남성명사의 총리(Kanzler)를 들은 적이 없다. 독일 젊은이들의 인상에서 총리는 당연히 여성이어야 한다. 그래서 속속 여성이 남성보다 총리를 맡는데 더욱 적합하다고 대답한다. 이 뉴스는 필자로 하여금 무측천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녀처럼 장기간 통치하게 되면 여성정치참여의 '성황'이 나타나게 될 수밖에 없다. 무측천과 메르켈이 처한 정치적인 상황은 천양지차이다. 그저 차금사고(借今思古)하는 것이다. 어쩌면 어떤 계시를 얻을 수도 있을테니까.


현재 적지 않은 민주국가는 선거제도를 통하여 여성정치지도자를 뽑고 있다. 어느 정도 성평등이 자유민주사회의 과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더 많은 국가의 지도자들은 남성이다. 남성이 지도자를 맡기에 더욱 적합하다는 편견이 있고, 여전히 광범위하게 일상문화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메르켈시대'에 성장한 독일의 청소년들은 남성보다 여성이 총리를 맡는데 더욱 적합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뉴스에서 보여주는 '역'성차별은 우리들에게 정치와 각 분야의 성편견을 일깨워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