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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356

노사(老舍): "인민예술가"인 그는 왜 '문혁'때 비투를 받고 자살해야 했을까? 글: 정문(鄭文) 노사는 1949년이후 중국에서 최초로 '인민예술가'의 영예칭호를 받은 사람이고, 공인된 신시대의 '창작표병(創作標兵)'이었다. 그러나 그는 왜 돌연 자살해야 했을까? 그는 모택동 및 중국공산당과 무슨 관계였을까?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노사의 본명은 서경춘(舒慶春)이고, 부친은 만주족으로 호군(護軍)을 지냈으며,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할 때 순국했다. 그리하여 일가족은 모친이 바느질과 빨래를 하면서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노사는 북경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소학교 교장, 교육국 관리를 지낸다. 그후 영국 런던대학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 , , 등의 소설을 발표하면서 점차 명성을 얻게 된다. 1936년에는 그의 대표작 를 발표한다. 항전시기에 노사는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 상무이사 겸 총무.. 2021. 1. 15.
허건국(許建國): 강청과의 악연으로 문혁때 죽은 상해공안국장 글: 왕우군(王友群) 중공 상해시 초대 공안국장 이사영(李士英)은 7년간 감옥에 갇혀 있는다; 제2대 공안국장 양범(揚帆)은 감옥에 25년간 갇혀 있는다; 제3대 공안국장 허건국은 7년간 감옥에 갇혀 있는다; 제4대 공안국장 황적파(黃赤波)는 감옥에 8년간 갇혀 있는다; 제5대 공안국장 왕유국(王維國)은 14년형을 받는다. 이 5명의 상해시 공안국장은 모두 중공독재자 모택동(毛澤東)의 처 강청(江靑)과 관련이 있다. 앞의 4명은 강청에게 박해를 받아 감옥에 간 것이고, 5번째는 '임표, 강청반혁명집단'의 구성원으로 형을 받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상해시 제3대 공안국장 허건국이 문혁때 박해를 받은 건에 대하여 얘기해 보기로 한다. 허건국은 진성감옥에 7년간 갇혀 있는다. 허건국, 호북 황피(黃陂) 사람, .. 2020. 11. 7.
이예(李銳): 3차례나 숙정당한 모택동의 비서 글; 왕우군(王友群) 일찌기 모택동의 비서를 지냈던 이예는 일생동안 3번에 걸쳐 숙정을 당하고,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나 수명은 길어서, 102살까지 살았다. 이예, 1917년 4월 13일생, 베이징 출생. 조적은 호남(湖南) 평강(平江)이며, 무한대학을 졸업했다. 일찌기 중공중앙위원,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 수전부 부부장, 모택옹의 겸임비서를 지낸다. 이예는 삼협공정을 반대한 대표적 인물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당시 중공지도자 장쩌민에 의해 묵살된다. 이예의 제1차 숙정 1943년 4월에서 1944년 9월까지, 중공의 연안정풍(延安整風) 후기의 '창구운동(搶救運動)'중 이예는 1년2개월간 구금된다. 당시는 항일전쟁이 가장 힘든 시기였는데, 중화민국 임시수도 중경은 자주 일본군 비행기의 공습을.. 2020. 11. 2.
시진핑의 대북정책은 원점으로 회귀했는가? 글: 왕혁(王赫) 미중신냉전의 형세하에서, 5일동안 시진핑은 2번이나 요란하게 '항미원조'를 기념했다. 이는 여러가지 신호를 내보낸 것이다. 그중 하나는 아마도 대북정책을 현재 조정하는 중이라는 것일 것이다. 현대의 북중관계는 '괴태(怪胎)'라 할 수 있다. 70년동안, 중공은 수십만의 장병을 희생하고, 장백산, 천지 및 압록강입구의 모든 섬(1962년체결한 북중변경조약은 지금까지도 비밀로 유지되고 공개되지 않았다)을 넘겨주고,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경제원조도 해주고, 심지어 비밀리에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도록 지원했는데,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이는 중국인민을 해쳤을 뿐아니라, 북한인민도 해친 것이다. 그저 말을 잘 듣지 않은 김씨세습정권을 유지시켜주었을 뿐이다. 비록 중국은 김씨정권.. 2020. 10. 28.
시진핑: 치국무능(治國無能), 치당유술(治黨有術) 글: 등율문(鄧聿文) 중공의 "중앙위원회공작조례"가 사전공포실시되었다. 원래 계획은 이를 이번 발에 거행되는 중공 5중전회에서 마지막 심의를 거친 후에 시행하는 것이었다. 다만 아마도 5중전회에서 심의해야할 사항이 너무 많아서인지, 시진핑은 이미 조례가 만들어 졌으면 심의는 단지 형식일 뿐이라고 여긴 것인지, 사전에 공표해버렸다. 이는 5중전회 자체에도 제한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이후, 중앙위원회의 운영, 5중전회의 소집, 개최를 포함해서 모두 이 규정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전의 중앙위원회의 의사나 운영에 아무런 규정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중앙위원회에건 정치국이건 아니면 정치국상임위원회이건, 중공은 모두 의사규칙같은 규정이 있었다. 다만 이런 규정은 현재의 조례와 다르다. 가장.. 2020. 10. 17.
오함(吳晗): 한 역사학자의 비극 글: 왕우군(王友群) 오함은 에 이렇게 썼다: "그물이 다 펼쳐졌다. 포위망은 점점 줄어들었다. 창응(蒼鷹)은 하늘을 맴돌고, 사냥개(獵犬)는 땅위에서 추격한다. 호각소리가 들리고, 고함소리가 들리고, 매를 부르고 개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미 그물에 걸려든 문인(文人)들은 하나하나 목이 잘리고, 가슴이 깨져 핏물 속에서 신음한다." 이 내용은 1949년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후 문인들을 대하는 생생한 모습이기도 하다. 오함은 스승을 버리고 중공에 투신한다. 오함은 절강 금화 의오(義烏) 사람이다. 1928년 가을, 상해중국공학(上海中國公學)에 입학하여 호적(胡適)의 제자가 된다. 얼마 후, 호적은 상해를 떠나 북경대학 교장이 된다. 오함도 그를 따라 북상한다. 그러나 북경대학에는 불합격하고, 청화대.. 2020. 10.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