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제5대 총서기 장문천(張聞天)의 최후
글: 왕우군(王友群) 1976년 7월 1일은 중공성립55주년기념일이다. 이날, 일찌기 제5대 중공총서기를 지낸 장문천은 그의 유배지인 강소(江蘇) 무석(無錫)에서 심장병이 돌연 발작한다. 당시 그의 안색은 창백하고, 식은 땀이 흘렀으며, 손에 쥐고 있던 외국어자료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앞뒤로 10분도 안되는 동안에 그는 세상을 떠난다. 장문천이 사망한 후, 중공은 부고를 발하지 못하게 막고, 추도회도 열지 못하게 막았다. 유골함에도 장문천의 이름을 쓸 수 없었으며, 유골함을 장의관의 정청(正廳)에 놓지 못하게 하였으며, 단독으로 아주 작은 창고 안에 놓아두게 했다. 유일하게 일본, 미국, 소련을 유학한 중공당서기 장문천, 가명은 낙보(洛甫)이다. 1900년에 태어났으며, 상해 남회(南匯) 사람이다. 19..
2021. 4. 8.
1980년 왕동흥(汪東興)과 함께 정계를 떠난 4명의 풍운인물의 최후는...?
글: 무한적야사(無限的野史) 천명에 이르는 개국소장(開國少將) 중에서 왕동흥은 가장 유명하고, 가장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17살때 홍군에 들어가서, 장정,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거치면서 여러번 구사일생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왕동흥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전투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택동주석의 경위를 맡았기 때문이다. 1947년부터, 왕동흥은 계속 모택동주석의 경위를 맡고, 중앙경위단(中央警衛團)을 장악한다. 그는 일을 열심히 했고, 여러번 특수한 임무도 훌륭하게 완수한다. 그리하여 모주석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건국후, 왕동흥은 소장의 계급을 받았으며, 관료로서의 승진도 순조로웠다. 말년에는 정치국에 들어가, 상임위원에 당선되어 일약 당내서열5위의 풍운인물이 ..
2021. 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