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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시진핑의 대북정책은 원점으로 회귀했는가?

by 중은우시 2020. 10. 28.

글: 왕혁(王赫)

 

미중신냉전의 형세하에서, 5일동안 시진핑은 2번이나 요란하게 '항미원조'를 기념했다. 이는 여러가지 신호를 내보낸 것이다. 그중 하나는 아마도 대북정책을 현재 조정하는 중이라는 것일 것이다.

 

현대의 북중관계는 '괴태(怪胎)'라 할 수 있다. 70년동안, 중공은 수십만의 장병을 희생하고, 장백산, 천지 및 압록강입구의 모든 섬(1962년체결한 북중변경조약은 지금까지도 비밀로 유지되고 공개되지 않았다)을 넘겨주고,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경제원조도 해주고, 심지어 비밀리에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도록 지원했는데,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이는 중국인민을 해쳤을 뿐아니라, 북한인민도 해친 것이다. 그저 말을 잘 듣지 않은 김씨세습정권을 유지시켜주었을 뿐이다. 비록 중국은 김씨정권을 이용하여 미국을 견제했지만, 자칫 잘못하면 자신도 북한에 물릴 수 있다.

 

시진핑은 이를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보당(保黨)심리'과 당문화라는 미혼탕(迷魂湯)의 작용하에 한때 이성적으로 바뀌었던 대북정책이 현재 다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대북정책: 변(變)과 불변(不變)

 

모택동시대에 북중관계는 "사회주의대가정"의 내부관계였다. 주요한 것은 국가간관계가 아니었다. 대표적인 말은 "중국과 북한은 정치만 계산하지, 경제는 계산하지 않는다."였다.

 

등소평시대에 북중관계는 조정된다. 등소평은 이를 "특수한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로 정의한다.

 

먼저, "국가와 국가의 관계"로 북중관계는 재조정된다. 여기에는 3가지가 있다. 하나, 1979년 1월 1일 미중수교로 중국은 미국과 협조하기 시작한다. 이전에 중국은 미국이 반드시 한국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등소평은 "우리는 이미 미군이 한반도에서의 존재와 동북아안정의 요소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그외에 중국은 같은 사회주의국가인 베트남에 대하여도 전쟁을 일으켰다. 소련과도 대치상태이다. 이는 모두 김일성의 우려를 증대시켰다)

 

둘, 중공은 '개혁개방'을 하면서 북한에 대해 '경제적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중국은 예전에 미그기를 공짜로 주었다. 1985년 비행기를 중국으로 가져와 수리하였는데, 수리비용은? 외교부에서 대외경제무역부로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아이디어가 없었따. 마지막으로 등소평에게 올라간다. 등소평이 한 마디 한다: "우리는 군수물자사업가이다. 우리는 사업을 하는 것이다." (북한은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에 반감이 있었고, 구호를 내서, 정치적으로 중국을 봉쇄한다.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의 자본주의풍조가 북한의 깨끗한 하늘로 불어오지 않게 하겠다고 하였다)

 

셋, 1992년 한중수교이다. 이전에 1991년 중국은 더 이상 한국이 유엔에 가입하는데 반대하지 않았다. 이는 한국정권의 합법성을 승인한 것이다. 그후 한중간의 경제무역관계는 갈수록 커져간다.

 

다음으로, 북중의 이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는 '특수'하다는 것이다. 무엇이 특수한가? 주로 두 가지이다. 하나, 북중은 모두 공산주의정권이다. 중국은 현실적으로 보아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이 약화되긴 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았다. 특히 소련과 동구의 급변사태이고, 중국은 더욱 북한을 끌어들인다.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가자'는 것이다. 둘, 북한의 무장은 투견(鬪犬)이 되어 미국을 물고 늘어진다.

 

등소평 본인도 '특수'하게 북한을 대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비공식방문한 국가는 북한이다(1982년 4월 27일, 당시 등소평의 나이 78세), 마지막으로 기차역에 나가서 영접한 외국귀빈은 김일성이다(1989년 11월 5일, 당시 등소평의 나이 85세), 1991년 10월 김일성의 마지막 방중때, 등소평은 역시 파격적으로 그를 만나 주었다(1990년이후, 등소평은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더 이상 외국귀빈을 맞이하지도 않았었다)

 

등소평의 대북정책은 장쩌민, 후진타오에 의해 계승된다. 장쩌민이 취임한 후, 처음 방문한 외국은 역시 북한이다(1990년 3월), 그때 '절대로 조선인민에 미안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2001년 장쩌민은 다시 북한을 방문한다. 그리고 김정일과 회담하고, "전통을 계승하고, 미래를 향하며, 이웃과 우호적으로 지내고, 협력을 강화한다(繼承傳統, 面向未來, 睦隣友好, 加强合作)"는 16자방침을 얘기한다. '계승전통'의 네 글자는 이데올로기의 기치를 높이 내거는 것이다. 중국은 이렇게 말한다. 외교는 국가이익에서 출발하며, 이데올로기로 선을 긋지 않는다고. 그러나 이는 또 한번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말에 불과하다.

 

장쩌민의 대북정책중 최대의 멍청한 일을 하나 저지른 바 있다. 그것은 바로 암중으로 김씨일가를 도와 핵무기, 미사일을 개발하게 한 것이다. 지연요소로 인하여 북한이 핵을 이용하여 중국을 위협할 가능성은 미국을 위협할 가능성보다 훨씬 많음에도.

 

20여년동안, 미국정부 자체에 존재하는 포용정책으로 인하여, 중국은 특별히 6자회담을 설계한다. 그리고 서방대기업의 협조등의 요소를 보태어 여러 미국정부는 김씨일가에 놀아났다.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결정을 내리지도 못했다.

 

이 과정에서 김씨일가는 기세가 올랐고, 더 이상 북경의 지시를 따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과격한 북한의 핵실험은 중국에 현실적으로 위협으로 드러나기시작한다. 그외에 2011년말 정권을 잡은 김정은은 친중파인 고모부 장성택등을 잔인하게 죽여버린다. 이는 2012년 취임한 시진핑으로 하여금 대북정책을 부득이 조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시진핑의 대북정책조정의 요절

 

먼저 조정을 얘기해보자.

 

김씨일가는 핵무기를 발전시키는 것을 국책으로 삼는다. 김정일은 2번의 핵실험(2006년, 2009년)을 하였고, 트럼프가 '로켓멘'이라고 부른 김정은은 4번(2013년,2016년 1월 및 9월, 2017년)의 핵실험을 한다. 이는 직접적으로 시진핑의 한반도비핵화의 바램과 대립되는 것이다. 비록 겉으로는 중국이 한반도핵문제는 미국과 북한의 쌍방간문제이고, 중국대륙은 주인공이 아니며 결과에 여하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북중은 일찌감치 동상이몽이었다. 그래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의 대북제재때 중국은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시진핑이 대북정책을 조정했다는 대표적인 조치는 바로 2013년 7월(한국전쟁 정전60주년) 당시 국가부주석인 리위안차오를 북한에 대표로 파견한 것이다. 리위안차오는 단지 중앙정치국위원이고 데리고 간 사람들도 중국의 '당정대표단'이 아니었다. 그저 '중국정부대표단'이었다. 대표단에는 일선에서 양측을 오가는 중련부 부장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방문기간중 '항미원조'라는 말은 한번도 하지 않고, 그저 '조선전쟁'이라고 언급했을 뿐이다. 이는 중국이 북중관계를 '정상적인 국가관계'로 설정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더 이상 '혈맹관계'가 아닌 것이다.

 

동시에 중국은 한국과의 관계를 신속히 추진한다. 2014년 7월, 시진핑은 국가주석에 취임한 이래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이는 시진핑이 처음으로 방문한 국가이다. 2015년 9월 3일, 중국은 항전승리70주년 열병식을 거행하는데, 당시 한국대통령 박근혜가 시진핑의 오른쪽 두번째 자리에 위치한다.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이는 김정은을 미쳐날뛰게 만들었다고 한다. 관료들 앞에서 시진핑을 '개새끼'라고 욕했다고 한다. 그후 러시아와 동남아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라고 명령한다.

 

북중의 긴장관계는 2017년에 정점에 이른다. 북한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를 '중국의 대북제재'라고 불렀다.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북한의 내부문건에서는 중국을 "반도(叛徒), 방흉(幇凶)'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중국을 '개구리'라고 부르면서 자신이 일찌기 '올챙이'였음을 잊었다고 했다. '양심'과 '신의'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 참통한 댓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한때는 '중국은 천년숙적'이라고 말했다(일본은 백년숙적이라고 부를 뿐이다)

 

중국 관영매체도 반격했다. <인민일보>의 계정인 협객도(俠客島)는 2017년 5월 5일자 글을 통해, "만일 김일성이 반도를 통일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반도에 왜 전쟁이 발발했겠는가? 중국을 거기에 끌어들여서 수십만의 생명을 잃게 만들고, 미중간에 20년에 걸친 대항을 가져왔으며 심지어 양안문제도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하게 되었다. 중국은 북한이 옛날에 '마구잡이로 벌인' 망동에 대한 대부분의 댓가를 부담하고 있다." 중국학술계에서도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북한은 사실상 이미 중국의 잠재적인 적이 되었다. 한국은 기실 중국의 친구가 되었다.

 

이런 긴장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시진핑과 김정은이 계속하여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시진핑이 대북정책조정은 철저하지 못했고, 금방 요절된다.

 

트럼프가 미국대통령에 취임한 후, 대북압박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역사적인 김정은과의 2차례에 걸친 회담(2018년 6월, 2019년 2월)을 거행한다. 중국은 북미간의 직접회담을 우려한다. 자신이 배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그러나 트럼프의 앞에서 중국카드를 쓰고 싶었다. 그래서 희극적인 4차례의 시진핑-김정은회담이 벌어진다: 2018년 3월, 5월, 6월과 2019년 1월에 4번에 걸쳐 중국을 방문한다.

 

김정은이 스스로 몸을 굽히고 들어오자, 중국은 만족감을 느낀다. 이데올로기측면의 유대감을 표현하자, 중국은 김씨정권을 진짜 버릴 수는 없게 되었다. 그리고 2016년의 '사드사태', 2018년부터 일어난 미중무역전은 시진핑으로 하여금 북한의 중국외교에서의 지위를 재평가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2019년 6월 20일, 미중무역전이 격렬할 때, G20에서 시진핑이 트럼프와 만나기 전에, 시진핑은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한다. 이는 14년만에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북한을 방문한 것이다.

 

2020년에 들어서며,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가 세계를 휩쓴다. 전세계가 중국에 책임을 묻고 있다. 트럼프는 중국에 신냉전을 시작한다. 비록 김정은이 초기에 국경을 봉쇄했지만 북한의 중국에 대한 의존은 더욱 심해진다. 중국이 보기에, 김정은이 미국과 싸우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현재 시진핑이 두번에 걸쳐 요란하게 '항미원조'를 외친 것은 아마도 북중간에 더욱 긴밀하게 결탁하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기실, 시진핑의 대북정책조정은 철저하지 못한 암선(暗線)이 있었다. 그런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2008년 시진핑이 '후계자'가 된 후 처음 방문한 국가는 바로 북한이다. 2015년, 중공정치국상위 류윈산이 북한을 방문했고, 다시 장쩌민의 대북 16자방침을 확인하며, 2013년 리위안차오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의 표현을 수정한다. 이는 분명 시진핑으로부터 사전동의를 받았을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은 다시 한번 '보당정서'가 시진핑에게 독이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미중신냉전에서, 시진핑이 강경하게 나가려면, 북한을 위기를 돌파하는 카드로 쓸 수 있다. 최종결과는 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