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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허건국(許建國): 강청과의 악연으로 문혁때 죽은 상해공안국장

by 중은우시 2020. 11. 7.

글: 왕우군(王友群)

 

중공 상해시 초대 공안국장 이사영(李士英)은 7년간 감옥에 갇혀 있는다; 제2대 공안국장 양범(揚帆)은 감옥에 25년간 갇혀 있는다; 제3대 공안국장 허건국은 7년간 감옥에 갇혀 있는다; 제4대 공안국장 황적파(黃赤波)는 감옥에 8년간 갇혀 있는다; 제5대 공안국장 왕유국(王維國)은 14년형을 받는다.

 

이 5명의 상해시 공안국장은 모두 중공독재자 모택동(毛澤東)의 처 강청(江靑)과 관련이 있다. 앞의 4명은 강청에게 박해를 받아 감옥에 간 것이고, 5번째는 '임표, 강청반혁명집단'의 구성원으로 형을 받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상해시 제3대 공안국장 허건국이 문혁때 박해를 받은 건에 대하여 얘기해 보기로 한다.

 

허건국은 진성감옥에 7년간 갇혀 있는다.

 

허건국, 호북 황피(黃陂) 사람, 1922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오랫동안 중공의 비밀정보업무와 보위업무를 해왔다. 1949년이후 천진시 부시장 겸 공안국장, 상해시 부시장 겸 공안국장, 공안부 부부장등의 고위직을 지낸다. 나중에 중국 주루마니아대사, 주알바니아대사도 지낸다.

 

1966년 3월, 허건국은 중국을 방문하는 알바니아 장관회의주석 셰후와 함께 북경으로 돌아온다. 1966년 5월 16일, 문화대혁명이 발발하고, 허건국은 북경에 남아 운동에 참가하라고 요구받는다. 1967년, 중앙문혁소조 부조장이며 모택동의 처인 강청은 천진에서 조반파(造反派)를 접견할 때, 허건국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허건국이 '반도, 특무'라고 한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허건국에게는 액운이 닥친다. 1968년 1월, 허건국은 비밀리에 체포되고, 얼마 후 진성감옥(秦城監獄)에 갇힌다. 그후 7년간이나 갇혀 있게 된다.

 

허건국은 모택동이 강청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다.

 

강청과 허건국간의 원한은 연안시기에 맺어졌다. 1937년, 허건국은 섬감녕(陝甘寧)변구정부 보위처 부처장으로 있으면서, 중앙조직부 특과 과장을 겸직했다. 1938년, 중앙보위부 부장이 된다; 1939년, 중공중앙 사회부 부부장이 된다. 당시, 그의 주요업무는 중공중앙의 보위와 간부심사업무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1937년, 44세의 모택동이 상해에서 온 23살의 여배우 강청과 결혼하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중공중앙보위위원회 위원이었던 허건국은 강청이 상해에서 3류배우로 있을 때의 각종 스캔들을 조사한 후, 그녀는 도저히 모택동이 처가 될만한 적절한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공정치국 상위 주덕, 주은래, 유소기, 임필시등이 중앙보위위원회의 의견을 물었을 때, 허건국은 반대의견을 직접적으로 표시한다. 비록 반대가 효력은 없었지만, 중공정치국은 강청에게 결혼후 정치에 간섭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 일로 강청은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허건국은 강청을 위한 증인이 되기를 거부했다.

 

1943년, 중공은 연안정풍운동을 시작하여 간부심사단계에 접어든다. 허건국은 진찰기(晋察冀)변구정부 당단서기를 겸직하여 변구당교1부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강청이 돌연 허건국을 찾아온다. 그에게 그녀의 역사증명인이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이때 강청은 이미 중공정치국주석, 중앙서기처서기인 모택동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허건국이 모택동의 체면을 봐서, 그녀의 요청을 들어줄 것으로 생각했다. 동시에 그녀는 중앙에서 보위와 간부심사를 담당하는 주요지도자인 허건국이 그녀의 역사를 증명해주면, 이후, 아무도 감히 그녀의 역사문제를 들출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허건국은 그녀가 연안에서 일한 기간에 대하여는 증명인이 되어줄 수 있지만, 그녀가 이전에 상해에서 했던 일에 대하여는 증명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른 증명인을 찾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허건국의 이런 태도에 강청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이때부터 신중국이 들어선 몇년동안 강청은 허건국을 만나더라도 아예 보지못한 것처럼 지낸다.

 

허건국은 강청의 보모를 북경으로 보내는 것을 거절한다.

 

1952년 1월, 허건국은 상해시 공안국장이 된다. 같은 해 6월, 강청은 전화를 걸어 허건국에게 상해에서 사람 하나를 찾아달라고 한다. 강청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30년대 내가 상해에서 고용했던 보모인데, 매평(梅萍)이라고 한다. 나에게 아주 충성스럽다. 상해에 있을 때 나를 돌봐주었다. 나를 도와서 이 사람을 찾아서 중남해로 보내달라."

 

허건국은 그녀를 찾아낸다. 그러나 그는 강청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녀를 보고 싶으면, 상해로 오면 된다. 이 사람을 중남해로 보내는 것은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반드시 중남해에 거주하는 중앙 수장들의 안전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강청은 대노해서, 전화로 허건국을 마구 욕했다.

 

허건국은 모택동의 전처를 돌봐주고, 강정은 불쾌해 한다.

 

1953년 봄, 허건국은 북경으로 와서 회의에 참석한다. 모택동은 단독으로 허건국을 만난다. 당시, 모택동의 전처 하자진(賀子珍)이 상해에 계속 살고 있었다. 모택동은 약간의 돈과 물품을 허건국에게 주면서, 그로 하여금 상해로 돌아가면 하자진에게 전해주라고 한다. 모택동이 부탁한 일이니 허건국은 전심전력을 다해서 처리한다. 그후 그는 모택동과 하자진간의 중간연락인이 되어, 여러번 모택동이 보내는 물건을 하자진에게 전해준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하자진을 적지 않게 돌봐준다. 강청이 그 일을 알고 난 후, 극히 불쾌해 한다. 모택동을 찾아가서 몇번 불평했다가, 모택도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강청은 더 이상 불평하지는 않았지만, 허건국에 대한 원한은 가슴 속에 새겨두었다. 

 

허건국이 익명서신을 조사하여 강청을 기분나쁘게 하다

 

1953년 10월, 당시 공안부 부장으로 있던 나서경(羅瑞卿)은 상해시 공안국장 허건국에게 서신을 하나 보낸다. 이는 익명의 고발서신이었다. 내용은 강청이 1930년대의 역사문제를 고발하는 것이다. 서신에서, 강청은 1930년대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국민당 군통 특무조직인 남의사(藍衣社)에 가입한 바 있다는 것이다. 강청은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하여 얘기하기를 꺼렸고, 계속 감추어 왔다. 그녀는 실제로 중공의 반도이며 특무라는 것이다. 나서경은 자신이 이미 이 익명서신의 내용을 모택동에게 사실대로 보고했다고 말한다. 모택동은 절대적으로 충성스럽고 믿을만한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조사하도록 지시했고, 조사결과를 적시에 그에게 보고하라고 말했다. 나서경은 이 일을 허건국에게 맡긴 것이다.

 

얼마 후, 강청이 이 소식을 알게 된다. 허건국이 비밀리에 조사를 시작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강청의 전화가 연이어 상해로 걸려왔다. 입을 열자마자 익명서신을 보낸 사람을 욕하며 악의를 품고 그녀를 무고하며, 해치려 한다고 말했다. 욕을 마친 후, 허건국에게 조사결과가 어떤지 물어본다. 허건국은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고, 이는 강청을 아주 기분나쁘게 한다.

 

1954년 11월, 허건국은 공안부 부부장이 되어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간다. 익명서신에 나오는 사실에 대한 조사를 마치지 못했으므로 나서경에게 어떻게 할 지를 물어본다. 나서경은 이렇게 말한다: "조사를 다 못했으면, 됐다. 이후 이 일은 영원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허건국은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허건국은 강청의 보복을 받는다.

 

1966년 5월 문혁이 발발한 후, 처음 타도된 것은 소위 '팽,라,육,양반당집단(彭,羅,陸,楊反黨集團)'이다. 그중 라는 바로 공안부장 나서경이다. 1967년 봄, 허건국은 돌연 당시 중국총리 주은래의 부름을 받아 북경반점으로 간다. 주은래는 그에게 상해에서 일하는 동안에, 나서경에 익명서신 한통을 보내주지 않았는지, 그 서신에는 강청의 30년대 역사문제에 관련된 것이 아닌지 물어본다. 허건국은 사실대로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주은래는 다시 묻는다: 나서경이 당신에게 그 서신에 적힌 내용이 사실인지 여부를 조사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허건국은 역시 사실대로 대답했고, 그 일은 나중에 흐지부지되었다고 말했다. 주은래가 이런 때에 그 일을 묻자, 허건국은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왜냐하면 이 때의 강청은 이미 중앙문혁소조의 부조장이고, 그녀가 원한을 품었던 사람은 한 명도 봐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들여서 박해했다. 그녀가 원한이 깊은 허건국을 어찌 그냥 내버려 두겠는가.

 

1967년말, 강청이 공개적으로 허건국이 '반도, 특무'라고 비판한 후, 조반파는 여러번 허건국의 집으로 쳐들어왔고, 공공연히 자료를 요구했다. 그는 기밀자료를 아주 깊숙히 숨겨두었기 때문에, 조반파는 그들이 원하는 자료를 얻지 못한다. 의외의 사고를 막기 위하여, 하루는 깊은 밤에 허건국이 눈물을 머금고 기밀자료를 불태워버린다. 그후 3일째 되는 날 그는 격리조사를 받는다.

 

강청의 뜻에 따라, 전안조(專案組)는 그에게 돌아가며 심문을 했고, 이런 심문이 3개월여 계속된다. 다만, 아무리 괴롭힘을 당해도, 허건국은 시종 그에게 덧씌워진 죄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강청은 어쩔 도리가 없어, 전안조에게 그를 진성감옥에 가두라고 지시한다.

 

허건국은 신분이 특수하고 죄행도 특수하므로, 중요관리대상이 된다. 그는 단독으로 겨우 6평방미터(길이 4미터, 너비 1.5미터)의 감옥방에 갇힌다.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매일의 임무는 성실하게 자료를 써서, 자신의 죄행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생활이 7년간 계속된다.

 

1975년 여름, 문혁때 타도된 등소평이 복직한 후, 허건국은 비로소 "보외취의(保外就醫, 병보석)"을 받아 북경 부흥병원에 입원한다. 그후 안휘성 육안지구의원으로 옮겨져서 치료를 받는다.

 

허건국의 사망

 

1976년 10월 6일, 모택동의 처 강청등 "4인방"이 체포된다. 허건국은 아주 흥분한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급히 중공중앙에 강청의 죄증을 고발하는 자료를 써서 보낸다.

 

다만, 오랫동안 장기간 구금되고, 정신과 육체가 힘들어져 있어, 허건국은 자주 밤새도록 기침을 했다. 날씨가 추워지자,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된다. 부득이 육안지구의원에서 합비인민병원으로 보내어 검사를 받는다. 검사결과는 폐병말기라는 것이다.

 

그의 억울한 사건은 강청이 만들어 낸 것이다. 지금 강청이 체포되었으니, 그의 사건은 명예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다려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붓을 들어, 다시 중공중앙에 청원을 한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현재, 저는 몸은 폐병에 걸려 이미 확산되어 세상에 오래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절박하게 죽기 전에 당이 저의 역사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정확한 결론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서신을 보낸 후, 그는 매일 기다렸다. 

 

1977년 10월 4일, 안휘성위 조직부에서 돌연 사람이 와서, 중공중앙의 심사결론을 보내왔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던 허건군은 흥분하여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그의 흥분은 금새 절망으로 바뀐다. 찾아온 사람은 아무런 표정없이 중앙의 심사결론을 읽었다: 허건국의 '흑조사(黑調査)'에 참가한 문제도 사실이고, '반도'문제도 사실이다. 중앙은 결정한다: 허건국을 당에서 제명시킨다. 이는 뒤통수를 맞는 격이고, 허건군의 숨을 끊는 것이다. 그날 허건국은 기절하여 숨을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