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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49

소년 제갈량은 조조의 손에 죽을 뻔했다 글: 유려평(劉黎平) 제갈량이 띠집(茅廬)을 떠나기 전에 조조와는 거의 만난적이 없는 것같다. 그러나, 소년시대에 제갈량의 목숨은 한때 조조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는 한헌제 초평4년(193년)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 해, 조조의 부친 조숭(曹嵩)은 전란을 피해, 산동 낭야일대에 거.. 2015. 2. 10.
한소제(漢少帝): 환관묘에 묻힌 유일한 황제 글: 문재봉(文裁縫) 고대인들은 사후의 묘를 쓰는 것을 아주 중시하였다. 백성의 집안들도 그러했으니, 황실귀족은 더욱 그러했다. 이치대로라면, 황제의 묘는 설사 금벽휘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주 신경써야 할 것이다. 다만, 한소제가 죽은 후, 그저 아무렇게나 환관의 묘에 묻어버린다.. 2014. 12. 15.
황건적의 난 이후의 5년 (3): 흔들리는 한영제와 떠오르는 영웅들 한영제는 역사적으로 혼군(昏君)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 점에 관하여 얘기한 사람은 너무 많다. 동탁마저도 한 마디를 했다: "매번 한영제를 생각하면, 분독(憤毒)하게 된다"(<후한서.원소열전>)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 한영제에 대하여 개관논정(蓋棺論定)한 사람으로 가장 뛰어.. 2014. 12. 12.
원소(袁紹)의 영웅기개: "모두 어딜 갔는가?" 글: 동호소주(東湖少主) 원소의 가족은 사세삼공(四世三公)으로 명성이 혁혁했다. 원소에 이르러, 마찬가지로 삼공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는 조상의 음덕으로 명성과 지위를 잃은 적이 없다. 단지, 한나라황실이 쇠약해지고, 정치가 부패하였으며, 원소의 지위는 대장군 하진(何進)의 뒤.. 2014. 4. 4.
"십팔로제후"는 왜 동탁에게 패배했는가? 글: 동호소주(東湖少主) 동탁이 권력을 찬탈하자, 천하는 속속 그를 토벌하러 나선다. 조조가 앞장서서, 십팔로제후가 낙양에 모이는데, 그 기세는 사상유례없이 대단했다. 이치대로라면 이러한 기세로 충분히 동탁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 아주 강대해보이는 '.. 2014. 3. 2.
사대미녀는 어떻게 뽑았을까? 글: 이치아(李治亞) 중국의 전통적인 관념상 4대미녀는 바로 서시(西施), 초선(貂蟬), 왕소군(王昭君), 양귀비(楊貴妃)이다. 현재 어떤 사람은 왜 무측천(武則天)이 4대미녀중 한 명에 들지 못했는지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기실 이런 관념은 전통관념에 대한 도전이다. 무측천이 4대미.. 2013. 1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