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십팔로제후"는 왜 동탁에게 패배했는가?

중은우시 2014. 3. 2. 22:28

글: 동호소주(東湖少主) 

 

동탁이 권력을 찬탈하자, 천하는 속속 그를 토벌하러 나선다.

 

조조가 앞장서서, 십팔로제후가 낙양에 모이는데, 그 기세는 사상유례없이 대단했다. 이치대로라면 이러한 기세로 충분히 동탁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 아주 강대해보이는 '연합군'이 "뇌성대(雷聲大), 우점소(雨點小)"로 천둥소리만 요란했지, 비는 별로 내리지 않는 격이었다. 동탁을 전혀 뒤흔들지 못했고, 오히려 계속되는 내분투쟁으로 흐지부지되어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고 만다. 이런 결말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원인으로 이런 난감한 국면이 초래되었던 것일까? 필자의 생각에 이것은 절대 단순히 "출사불리(出師不利)"라는 한마디로 개괄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를 생각해보면, 조조는 동탁암살이 실패로 끝나면서, 황급히 낙양으로 도망쳤다. 그는 자신이 입신할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집안재물을 팔아 의병을 모집하여 동탁을 토벌하고자 한다. 다만 자신이 단독으로 하기에는 너무 힘이 약하여 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고 보고, 개인명의로 각로제후에게 위조된 조서를 보내어 모두 함께 거병하여 국적을 함께 주살하자고 호소한다. 위조된 조서가 발송된 후, 천하영웅은 속속 이에 호응한다. 마지막으로 조조를 포함한 18명의 제후가 낙양에 집합하여 토벌에 나설 준비를 마친다.

 

공동으로 거병한다면 맹주를 한 사람 뽑아야 했다. 그래야 통일적으로 명령을 내려 지휘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바로 이 맹주를 누가 하느냐에서 나온다. 이치대로라면, 조조는 동탁토벌의 발기자, 조직자이므로 각로제후의 맹주가 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조조는 스스로 자신의 실력이 약하고, 영향력이 없다고 보아 "대한명장(大漢名將)의 후예"인 원소(袁紹)를 맹주로 추천한다. 원소는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여러 사람들이 재삼 권하자 결국은 응락한다.

 

맹주는 쉬운 일이 아니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원소는 이상적인 인선이 아니었다. 강퍅자용하고 흉금이 협소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관건은 대규모병력을 이끌고 작전을 수행할 지혜가 없었다. 이것도 치명적이지는 않다. 당시 모인 사람들의 열기가 뜨겁고, 사기가 높았으며, 원소가 혼자서 작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원소의 또 한 가지 약점은 치명적이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쓰는데 문벌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사람을 기용하는데 대범하지 못했다. 이런 심리상태로는 난세에 자연히 아랫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결국은 아랫사람들이 배신하고 멀어지게 되어 오래 갈 수가 없다. 이번의 '동탁토벌'행동에서, 그는 더더욱 긍지와 오만이 극에 달하게 된다. 화웅(華雄)이 연속으로 여러 장수를 베어, 맹군이 꼼짝달싹 못하는 상황에서, 관우가 앞에 나서서, 출전할 것을 청한다. 그러나 맹주인 원소는 단순히 관우가 일개 '궁마수'라는 것때문에 크게 싫어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유는 아주 멍청하고 아주 웃긴다. 그것은 바로 '화웅에게 웃음거리가 될까봐 두려웠다'는 것이다. 그의 눈에 자신의 체변이 장병의 선혈보다 중요했다. 맹주로서의 흉금과 기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에 그의 동부이모의 동생인 원술(袁術)은 항상 시도때도없이 냉소하고 조롱하며, 부채질을 했다. 그리하여 원소로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다행히 조조의 영웅기백과 사람을 보는 혜안으로 '관운장온주참화웅'의 전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비록 이 싸움으로 위기를 잠시 넘기기는 했지만, 이런 용인술로는 장병들을 실망시킬 수 밖에 없다. 우두머리가 멍청하면, 아무리 힘을 써도 헛된 것이 된다.

 

초반기를 얘기하자면, 십팔로제후의 기세는 상당히 컸다. 사람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나쁜 일이기도 하다. 사람이 많으면 쉽게 자만에 빠져서 적을 경시하게 된다. 아마도 사람이 많으면 힘이 커진다는 것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동탁의 병마를 앞에 두고, 사람들은 서로 앞다투어 공을 세울 생각만 하고 자신의 재능을 드러낼 생각만 한다. 만일 단순히 이렇다면 그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용감하게 앞장서고 적을 죽여서 나라에 보답한다면. 다만 이들이 생각하는 공을 세우려는 것은 국가의 앞날을 위한 것이 아니고, 백성의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개인의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대국에 관련되는 일을 함에 있어서 가장 꺼려야 할 것은 사심이다. 일단 사심을 갖게 되면, 함께 단결할 수가 없게 된다. 이런 사심의 직접적인 결과는 바로 권리다툼이다. 서로 시기하고 발목을 잡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뿌리는 역시 원소에게서 나온다. 원소가 맹주가 되었으면 당연히 여러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현명한 사람을 기용하고, 영웅을 널리 받아들였어야 한다. 다만 원소는 자신이 맹주가 되자 동생인 원술에게 맹군의 양초를 감독하게 한다. 형제 2명이 한 명은 사람을 관장하고 다른 한명은 물자를 관장한 것이다. 각로제후는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비록 혁명업무에 각자의 업무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원술이 이익을 따지는 소인이라는 것이다. 방대한 재정대권을 그의 손아귀에 넘겨주니,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게 이상할 정도이다. 과연, 손견이 공격하여 초기에 승리를 거두었을 때, 원술은 그에게 양초를 공급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손견의 군대는 인심이 흩어져서 결국 패배하고 만다. 수하의 대장인 조무(祖茂)는 화웅의 손에 죽고 만다. 더욱 무서운 일은 십팔로제후가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각자 따로 놀았다는 점이다. 처음에, 원래는 손견이 선봉을 서기로 했지만, 제북상(濟北相) 포신(鮑信)은 잔머리를 굴린다. "손견이 선봉이 되어 만일 큰 공을 세우게 되면, 우리들은 드러나지 않게 된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사심을 가지고 있게 되니, 포신은 동생 포충(鮑忠)을 따로 보내어 손견보다 먼저 출전하게 한다. 그 결과 포충은 무슨 재주를 갖고 있지 않아서, 화웅에게 베어져 말 아래로 떨어진다. 공로를 다투기 위하여 항명도 거리끼지 않으며, 마음대로 출전했다. 그의 마음은 어린아이나 다를 바가 없다.

 

동탁에게 용맹한 여포가 있어서, 십팔로제후가 진군하기 힘들었다고 한다면 용서될 여지는 있다. 그러나, 사실은 '삼영전여포'로 맹군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 게다가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모책에 있지 용맹에 있지 않고, 역전(力戰)으로 이길 수 없으면 지취(智取)하면 된다. 겁을 먹고 물러나거나, 전투의 시기를 놓치게 되면 군심이 흩어진다.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려는 것은 바로 대군을 몰살시킬 좋은 기회이다. 그러나 조조가 승세를 몰아 추격하여 급습하자고 했을 대, 원소는 '병사들이 피로하고 공격해야 얻을 것이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조조는 이치를 들어 다투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다른 제후들도 모두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말을 한다. 결국 조조는 대노하여 벌떡 일어나 욕까지 하게 만든다. "수자부족여모(竪子不足與謀, 어린 자식과는 대사를 도모할 수 없다)". 다행히 원소는 성격이 좋아서, 벌컥하지는 않았다.

 

비록 이번 기회를 놓쳤지만, 맹군이 다시 정돈하여 계속 서진했다면 아마도 동탁을 소멸시킬 수도 있었다. 다만 전투가 계속 확대되자, 맹군내부의 의견차이가 날로 두드러진다. 제세안민, 공토역적의 웅지는 점점 이욕훈심(利慾熏心)으로 대체된다. 동탁의 천도후 손견은 부대를 이끌고 낙양성에 들어갔는데, 우연히 전국옥새를 얻게 된다. 그는 사적인 욕심으로 '다음 날 병을 핑계로 부대를 이끌고 되돌아가려고 한다' 일처리를 주도면밀하게 하지 못하여, 결국 원소에게 발각된다. 원소는 이 소식을 듣자, 즉시 손견을 불러서 추궁한다. 손견이 어찌 전국옥새를 쉽게 내놓겠는가? 그래서 장막안은 분위기가 살벌하게 되고 거의 칼싸움이 벌어질 뻔한다. 다행히 사람들이 말리는 바람에 싸우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을 거치면서 손권은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어 병력을 이끌고 낙양을 떠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십팔로제후는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사라진다. 각자 자신의 이익만을 계산한다. 조조는 모두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을 보자, 결국은 실망하고, 큰 일을 성사시킬 수 없겠다고 보고 아예 부대를 이끌고 떠나버린다. 대세가 이미 기운 것을 보자, 연주자사 유대(劉岱)도 기회를 보아 동군태수 교모(橋瑁)에게 '식량을 빌리려 한다'. 교모가 주지 않자, 유대는 밤에 교모의 군영으로 쳐들어가서 교모를 죽여버리고 그 병사의 항복을 받아낸다. 원소는 여러 제후들이 갈 사람은 가고, 죽을 사람은 죽어, 스스로 1인사령관이 되자 낙양을 떠나서 다른 출로를 찾게 된다.

 

이제 겉으로 보기에 대단히 요란했던 '토동행동(討董行動)'은 내분중에 흐지부지 실패로 끝난다. 나중에 사도 왕윤이 '미인계'를 써서 동탁을 주살하게 된다.

 

수재조반(秀才造反), 삼년불성(三年不成). 선비가 반란을 일으키려면 삼년이 지나도 이룰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왕윤과 같은 수재가 여자 초선과 함께 소리소문없이 동탁을 주살한다. 이렇게 나라의 간적을 제거하고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자를 없앤다. 나중에 이 당세의 영웅이라던 제후들이 이를 보고 어떤 느낌이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