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릉 10

소태후(蕭太后): 무덤까지 혼외 애인을 데려가다

글: 장계합(張繼合) 1004년 겨울, 북풍이 몰아칠 때 밀물처럼 요나라병사들이 물려왔다. 유명한 소태후 소작(蕭綽)과 그녀의 친아들 요성종(遼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緖)는 함께 전투에 참가한다. 이번에 주도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바로 실지수복(失地收復)이다. 즉 송나라의 손에서 ..

한무제(漢武帝) 무릉(茂陵): 도굴꾼들이 가장 탐내는 능묘중의 하나

글: 호북위성TV <대게비(大揭秘) 도굴을 얘기하자면, 중국고대의 장례습속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후장(厚葬)은 중국장례문화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이다. 대량의 보물을 땅 속에 묻는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재물을 탐하는 자들이 노리게 되고, 이로 인하여 중국특색을 지닌 '도굴문화..

무측천은 임종전에 무엇을 하였는가?

글: 복녕객(福寧客)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무측천의 심정은 처량했을 것이다. 그녀가 여황제로 있을 때, 모든 것은 더할 나위없이 신비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무측천은 자신이 하늘과 통한다고 여겼고, 할 수 없는 일이 없다고 여겼다. 어찌된 일인지는 몰라도, 사서에서는 무측천이..

건릉(乾陵): 당고종과 무측천의 합장묘

글: 손건화(孫建華) 세계에서 어느 황제의 묘가 가장 도굴하기 힘드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의문없이 당고종과 무측천의 "만년수역(萬年壽域)", 건릉을 가리킬 것이다. 건릉은 냉병기시대에 도검으로 파본 적이 있고, 열병기시대에는 기관총과 대포를 동원한 적도 있다. 1200여년동안, 도굴을 시도한 사..

무측천(武則天)이 무자비(無字碑)를 남긴 이유는?

글: 침묵과담(沈默寡談) 산서성 건현(乾縣)의 현성 북쪽에 있는 양산(梁山)에 위치한 건릉(乾陵)은 당고종 이치와 여황제 무측천의 합장묘이다. 중국역대제왕의 능원중 유일한 부부황제 합장묘이다. 묘앞에는 두 개의 거대한 석비(石碑)가 세워져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은 "술성기비(述聖記碑)"로 무측..

신룡정변(神龍政變): 무측천의 최후의 나날 (II)

5 소위 "남총(男寵)"은 바로 면수(面首)이며, 자신의 몸을 가지고 권세를 가진 여자를 기쁘게 하는 남자를 말한다. 무측천도 정상적인 생리적 욕구가 있고, 거대한 심리적 압력을 받았다. 복잡한 정무를 처리한 후에는 그녀도 안위가 필요했다. 누군가 곁에 있어주어야 했다. 나이가 들면서, 무측천은 권..

건릉(乾陵, 측천무후, 당고종의 합장묘)에 얽힌 이야기 (2)

건릉은 도굴된 적이 있는가? 1960년, 몇몇 농민이 폭약으로 돌을 깨다가, 부주의로 무척천의 묘도입구를 깬 적이 있다. 이 묘도입구는 참으로 국가의 절대기밀사항이었다. 도굴군들이 천여년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고, 황소(黃巢)가 40만대군을 시켜 수년을 팠지만 파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