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무측천과 후계자문제

중은우시 2011. 7. 14. 19:34

 

 

: 성공인(誠公人)

 

무측천은 말년에 아주 골치아픈 문제를 떠안게 된다. 그것은 바로 유산을 계승할 후계자문제이다.

그녀의 유산은 바로 그녀가 피바람을 겪으면서 건립한 대주왕조의 황제 자리이다.

여인으로서 그녀는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이고, 이 기업은 정말 쉽지 않게 얻은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서, 직위가 겨우 5품에 불과한 재인이었던 그녀는 당태종의 총애도 거의 받지 못했다. 당태종이 죽은 후 그는 다른 자식을 두지 않은 후궁들과 함께 암자로 들어가 여승이 된다. 다행히 그녀는 선제가 살아있을 때, 태자였던 이치와 관계를 맺었고, 이치가 다행히 그녀와의 사랑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궁중투쟁에서 입장이 불리해진 왕황후는 그녀를 불러들이게 된다.

 

대단한 점은 그녀가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권모술수에 능통한 타고난 정치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은인과 음모로 전황후와 정통을 지키려는 대신들을 물리치고 황후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녀의 남편인 당고종이 그다지 남성스럽지 못하고, 그녀에게 모든 권한을 양보한데다가 몸이 좋지 않아 일찌감치 죽어버린다. 더욱 대단한 것은 그녀가 아주 냉혹하다는 것이다. 권력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는 친자식이나 조정중신들까지 제거한다. 그녀가 67세가 되었을 때, 그녀의 혁명은 완성된다. 이당왕조를 없애고, 무주왕조를 건립한다. 이뿐아니라, 이 늙은 여인은 소인을 멀리하고 현신을 가까이 했다. 이렇게 그녀의 무주왕조는 통치에 질서가 잡히게 된다. 무주왕조를 건립하기 위하여 임어당이 <무측천정전>에서 통계낸 바에 따르면 93명을 모살한다. 거기에는 당나라이씨종실이 34, 조정대신이 36, 그녀의 친척이 23명이 포함되어 있다.

 

대주왕조의 기업을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 이것은 대주황제 무측천이 직면해야할 문제였다.

 

황제의 계승문제는 전통에 따르면 생전에 태자를 책봉하는 방식으로 확정한다.

 

후계자를 정함에 있어서 그녀에게는 3가지 선택이 있었다:

 

첫째, 조카

둘째,

셋째, 아들

 

조카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면 무씨혁명은 철저하게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통에 따르면, 조카가 황제가 된다면, 그는 부모를 높이 모시고 부모를 위하여 태묘를 만들 것이다. 고모인 무측천은 태묘에서 제사를 받을 자격이 없게 될 것이다.

 

딸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면, 여성왕조가 시작된다. 여권혁명을 철저하게 완성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딸이 황제가 된 후 그 다음대에 가면 강산은 다시 사위의 성씨로 바뀌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강산을 외인에게 넘겨준 꼴이 된다. 누가 외할머니인 무측천을 위하여 향불을 사르겠는가?

 

아들에게 물려주면, 천신만고끝에 친자식까지 죽이고 이가로부터 빼앗아온 강산을 다시 이가에게 되돌려주게 된다. 이는 혁명의 종말을 의미한다.

 

무측천의 후계자문제는 난제였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결정을 한 것은 그녀가 75세 되던 해였다. 그녀는 아들 이현을 태자로 책봉한다. 82세로 죽을 때 그녀는 유언을 남긴다: 황제의 칭호를 없애고, 황후로 칭하라. 남편 당고종과 함께 건릉에 합장해달라.

 

이것은 스스로의 선택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것은 역사전통에 순응하는 선택이었다. 중남경녀, 남존여비의 역사전통하에서, 재산의 상속은 아들에게 전하지 딸에게 전하지 않는, 안으로 전하지 밖으로 전하지 않는 전통을 따른 것이다. 그녀는 일생동안 남성위주의 전통에 반항했지만, 결국은 남성사회의 전통에 굴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