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한무제)

한무제(漢武帝) 무릉(茂陵): 도굴꾼들이 가장 탐내는 능묘중의 하나

by 중은우시 2016. 12. 18.

글: 호북위성TV <대게비(大揭秘)

 

도굴을 얘기하자면, 중국고대의 장례습속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후장(厚葬)은 중국장례문화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이다. 대량의 보물을 땅 속에 묻는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재물을 탐하는 자들이 노리게 되고, 이로 인하여 중국특색을 지닌 '도굴문화'가 발생하게 된다.

 

모든 제욍능묘는 모두 하나의 보물창고이다. 그 안이 부장품은 모두 가치가 엄청난 것들이다. 당시에는 아주 보통인 자기그릇 하나만 해도 지금은 모두 문화재이다. 제왕능묘는 시대를 거슬러올라가면 갈수록 그 부장품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민간과 사료의 기록으로 보면, 부장품이 가장 풍부한 것은 3개의 제왕능묘이다. 진릉(秦陵), 무릉(茂陵), 건릉(乾陵). 앞의 두 개는 모택동의 시사에서 언급된 "진황(秦皇)", "한무(漢武)"의 능묘이고, 건릉은 바로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무측천과 그녀의 남편인 당고종 이치의 합장묘이다.

 

무릉은 한무제 유철의 능묘이고, 섬서성 함양시와 흥평시의 사이에 있는 들판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서안과 40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서한때, 무릉은 괴리현(槐里縣) 무향(茂鄕)에 속했다. 한무제가 이 곳에 능묘를 만들었기 때문에 '무릉'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유철(기원전157-기원전87)은 서한의 다섯째 황제이고, 재위기간이 54년이다. 통치에 정력을 기울여 다민족의 통일을 강화하고 공고히 하는데 공헌을 해서 서한의 전성기를 연다. 중국역사상 업적이 많은 봉건제욍의 하나가 된다.

 

<진서>의 기록에 따르면, "한천자는 즉위1년만에 능을 만든다. 천하의 부(賦)를 3분의 1로 나누어 1은 산묘(山廟)에 바치고, 1은 빈객(賓客)에 바치고, 1은 산릉(山陵)에 바쳤다. <한서.공우전>의 기록에 따르면, "무제는 천하를 버리고, 곽광이 일을 전횡하여 많은 금전재물, 조수전별우마호표를 산채로 잡아서 무릇 90가지를 모조리 보관했다." 즉, 무릉은 한무제가 즉위한 다음 해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모두 53년이 걸렸고, 한무제는 매년 부세수입의 1/3을 능묘를 만드는데 쏟아부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묘는 높고 크고 웅대하며 형태는 방추형이어서 '동방금자탑'이라고도 불린다.

 

또 다른 <관중기>의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때의 여러 능은 높이 12장, 너비 120보인데, 오로지 무릉만은 높이가 14장, 너비가 140보이다." 현재 실측한 능의 높이는 46.5미터이고 바닥은 동서로 231미터, 남북으로 234미터이다. 기록과 들어맞는다. 진릉과 비교하자면, 무릉의 규모는 약간 작다. 그러나 부장품의 풍부함은 입을 딱 벌릴 정도이고, 누가 더 많은지를 따지기 어려울 정도이다.

 

나중에 이런 글도 있다. "한무제는 재위기간이 길어서 죽을 때가 되어서는 능안에 더 이상 넣을 공간이 없어졌다." 부장품이 얼마나 풍부했을지는 충분히 알 만할 것이다. 서한의 유흠(劉歆)이 편찬한(나중에 동진의 갈홍이 편찬했다고 적혀있음) <서경잡기>의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 황제가 죽으면 모두 옥으로 옥갑을 만드는데 갑의 형태는 갑옷과 같다. 이것을 이어서 금실(金縷)로 잇는다. 관안에 한무제는 입에 선옥(蟬玉)을 물고, 몸에는 금루옥갑을 입고 있는데, 갑에는 모두 교룡만봉어린의 모습의 새겨서 세상에서는 교룡옥갑이라고 불렀다." 전해지는 바로는 한무제는 몸이 뚱뚱해서 그가 입은 옥의는 형태가 아주 커서 전체 길이가 1.88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크고 작은 옥조각이 2398개이며, 옥조각을 꿴 금실만 2근여에 이르렀다고 한다.

 

더옥 호화롭게 지을 수록 더 쉽게 도굴꾼들의 주목을 받는다. 역사적으로 무릉이라는 이 거대한 보물창고는 여러번 도굴당한다.

 

첫번째 도굴은 한소제 시원3년(기원전84년)이다. <한무제내전>에 따르면, "한무제의 관안에는 옥상(玉箱), 옥장(玉杖)을 두었는데, 이는 서역 강거국왕이 바친 것인데, 황제가 아주 좋아했다. 그후 4년만에, 어떤 사람이 부풍 살중에서 이 두 개의 물건을 얻는다. 황제의 곁에서 모시던 자들이 이 물건은 선제께서 아끼던 물건이다라고 말했다."

 

두번째는 한선제 원강2년(기원전64년)에 밠행한다. <한무제내전>에 따르면, "한무제 생전에 지궁에 잡경30권을 넣어두었는데, 하동공조 이우에 의하여 상당 포독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애석에서 이를 얻는데 금상(金箱)에 담겨 있었다. 서권의 뒤에는 동관신하의 성명이 있고 책에 쓰여진 일월은 한무제때이다.한선제는 한무제때의 신하인 전서랑 염등에게 물어보니 염등이 말하기를 이는 효무황제를 염할 때 들어간 물건이다라고 하였다."

 

<중국사간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세번째 도굴은 기원25년 9월이다. 적미군이 십삼영으로 나뉘어 모두 30만명이었는데, 경시군을 격파하고 장안에 들어온 후, 양초, 경비가 부족하여 대거 노략질을 벌인다. 그들은 성을 나서서 2,3개월의 기간을 들여 무릉의 선문을 열고, 수천수만의 반란군이 능안의 부장픔을 옮겨갔는데, 거의 수십일간 옮겼다. 그래도 능안의 물건은 여전히 절반도 줄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농민반란군 적림군은 장안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황궁을 불태우고, 또한 "여러 릉을 도굴하여, 보물을 취했다" 여치(呂稚)의 유체 또한 시간당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시에 본 여후의 시신은 살아있는 것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도굴자들은 음심이 동하였다는 것이다. 나중에 반란군은 돈이 없어지자 다시 한번 무릉을 도굴한다.

 

동한말기, 동탁도 무릉을 도굴한 바 있다. 그는 여포에게 당부하여, 무릉에 진입할 때 벙어리를 치료하는 비방을 주의해서 찾으라고 했다. 원래 그의 손녀인 동백(董白)이 벙어리였다. 당나라말기 황소의 난때도 쓸 돈이 없자, 역시 무릉에 눈독을 들인다.

 

<중국제왕능침>의 기록에 따르면, "제4차도굴은 당희종3년(880년)에 있었다. 황소의 반란군이 장안에 진입한 후 다시 한번 무릉을 도굴한다. 대량의 금은옥기가 각지로 흩어진다."

 

민국시기, 군벌 손련중은 능위에 참호를 만드는데, 실제는 도굴한 것으로 의심된다. 다만, 이들 도굴에 관하여는 구체적인 문자기록이 없다. 무릉 지궁에 보물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당초에 왜 그랬겠는가. 무릉이 당한 여러가지 겁난은 일대영주 한무제의 생전에 절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당초 그가 온갖 노력을 기울어 웅대한 능묘를 만들었는데, 후세에는 서로 앞다투어 빼앗아가려는 보물창고가 되어 버렸다. 그의 재물은 도굴꾼들이 마구잡이로 가져가는 물건이 되었다. 그의 입에는 보주를 물고, 몸에는 '주유옥갑'을 입고 있던 시신도 밖으로 끌어내져서 들판에 내버려진다. 만일 하늘에 영혼이 있다면, 이때의 한무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신중국이 성립된 후, 역사의 풍파를 겪은 무릉은 제1차 국가중점문화재보호단위가 된다. 1979년 12월, 무릉박물관이 만들어 지고, 원래 무릉에 묻혀 있었던 유금수두은반, 금병등 118건의 문화재가 다시 무릉박물관으로 돌아왔다.